7세기말~10세기초 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어 200년간 존속했던 고대국가 발해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발해와 관련된 1차 사료와 새로 발견된 자료를 중심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 보자. 해석의 다양성, 사료의 중요성과 함께 발해사의 감춰진 이야기들을 들춰보는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발해 건국 관련 기본 사료
발해는 옛 고구려 땅에 세워졌다. 발해를 건국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사료는 아래의 자료이다.
발해가 존속한 시기 중국의 당나라 역사를 기록한 책의 열전의 일부이다.
「발해전」은 오늘날 발해의 역사를 이해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941 – 945년간 완성)에서는 발해를 건국한 사람이 대조영이라 하고, 『신당서』(1044 – 1060년간 완성)에서는 발해를 건국한 사람의 성이 대씨라고 할 뿐이지만 이어지는 기록으로 미루어 대조영을 가리키는 점에서는 같다. 다만 대조영의 출신에 대한 설명은 서로 다르다. 『구당서』는 대조영이 ‘본래 고려별종’이라 하고, 『신당서』에서는 ‘고려별종’이란 말이 보이지 않는다. 성이 대씨인데, 그는 ‘본래 속말말갈’이고 ‘고려에 붙어 있던 자’라고 한다.
대조영은 어떤 사람인가. 건국자 논란에서 가장 핵심은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인지 아니면 말갈인지에 대한 해석이다. 고구려 유민설은 『구당서』의 기록을 중시하고, 말갈인설은 『신당서』 에 무게를 두는 주장이다. 그리고 절충설은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을 상호 보완적으로 해석하는 입장이지만, 결국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주장의 하나로 귀결된다. 건국자 사료에서 우리는 ‘발해말갈’, ‘고려별종’, ‘속말말갈’, 그리고 고구려인이라는 의미가 중요한 키워드임을 알 수 있다. 이 용어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바로 발해 건국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서로 다른 목소리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발해말갈’과 ‘고려별종’의 의미
『구당서』 발해 기사의 맨 앞에는 ‘발해말갈’이란 단어가 있어, 종래 열전의 명칭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발해말갈’은 ‘발해’와 ‘말갈’이라는 두 단어의 결합으로 읽어야 한다. 북송의 구양수(歐陽修, 1007 – 1072)가 편찬한 『신오대사(新五代史)』(1036 – 1053년간 완성)에서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 불렸는데 고려의 별종이다(渤海 本號靺鞨 高麗之別種也)”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발해말갈’은 ‘발해의 원래 호칭이 말갈’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신오대사』는 발해가 고려별종이고, 대조영의 아버지인 대걸걸중상(大乞乞仲象)이 고려별종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신당서』 발해전의 서술이 『구당서』의 ‘고려별종’의 설명에 다름 아님이 분명해 진다. 『구당서』의 기록도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 불렸고 대조영은 고려별종이다”가 정확한 의미이고, 열전 명칭도 「발해말갈전」이 아니라 『신당서』와 마찬가지로 「발해전」이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본디 ‘별종’이 ‘특별하고 이상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고려별종’은 ‘특별하고 이상한 고구려 사람’이 된다. 이들이 『신당서』에서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려에 붙어있던 자’에 해당된다. 아마도 ‘고려별종’이라는 명칭은 발해 건국에 참여한 속말말갈이 자신들이 동아시아의 강국인 고구려 주민의 일원이었다는 자부심을 드러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말갈은 고구려의 주민
고구려의 주민은 주몽을 비롯한 부여로부터의 일파와 예맥족이 5부의 주요 구성원이었다. 건국 이후 영역을 확대하면서 흡수된 사람들도 점차 고구려인이 되었다. 광개토왕릉비문의 ‘새로 복속한 한과 예(新來韓穢)’도 이러한 부류의 하나일 것이다. 말갈족은 그 이전 시기 물길(勿吉), 읍루(挹婁), 숙신(肅愼)으로 불리었고, 563년 처음 중국 기록에 등장한다.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에는 고구려의 군사 행동에 여러 번 함께 하였다. 오늘날 중국 길림성 훈춘 지역으로 비정되는 고구려의 책성 지역 도독(柵州都督)이었던 이타인(李他仁, 609-675)은 12 개 주(州)의 고려를 관할하고 37개 부部의 말갈을 통솔했다. 이곳의 말갈은 주가 아닌 부락 단위로 통제를 받았으나, 고구려 지방 장관인 책주 도독의 지배 대상인 고구려 주민이었다.
발해, 고구려, 그리고 부여의 관계
고구려 주민은 예맥족만이 아니고, 후기에는 말갈족도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건국 과정이나 그 이후 발해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의 고구려 유민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말갈은 고려별종인 속말말갈 이외에도 또 다른 말갈(가령 발해 건국에 참여한 걸사비우 집단은 ‘말갈’이라 불림)도 건국에 참여하였다. 나아가 발해 건국 집단은 고구려 주민이면서, 동시에 부여(扶餘)와도 연결된다. 고구려가 ‘부여별종(扶餘別種’『구당서』와 『신당서』의 고려전)이니, 발해는 ‘부여별종’의 ‘별종’이 되기 때문이다. 발해를 알기 위해서는 고구려와 그 이전의 부여도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 역사가 계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