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에서 문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학회 활동으로는 한국사 연구자들의 최대 모임인 한국역사연구회의 회장을 지냈다.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하였으며, 그밖의 다양한 강연을 통해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 『전쟁과 동북아의 국제질서』(공저),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의 한중관계사』(공저), 『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공저), 『이색의 삶과 생각』 등이 있으며, 고려 후기 정치사와 고려-몽골(원) 관계사를 연구한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800년 전, 고려는 몽골과 정식 외교를 시작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자로 대두하고 있던 몽골은 1218년(고종 5년) 강동성 전투를 계기로 고려사에 등장했고 이후 1356년(공민왕 5년) 고려의 반원운동이 성공할 때까지 약 140년간 고려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되짚어 보고, 고려의 외교정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이익주 교수를 만났다.
Q
한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변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고려사에서 몽골은 빼놓을 수 없죠. 보통 몽골 제국이라고 하면 호전적 단어들만 떠오르는데 세계사적 측면에서 몽골 제국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A
몽골제국은 13세기부터 200년 정도 존속한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나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복 과정에서 있었던 전쟁과 약탈의 이미지가 강하죠.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대제국이 만들어지면서 동서 교류의 역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겁니다. 또한, 넓은 영토를 통치해야 했기 때문에 통신망, 교통망이 발달하는데 이는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들이 빠른 속도로 교류되는 공간이 됐습니다. 몽골은 자신들의 문화를 강요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자신들이 점령한 지역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융합, 발전시킵니다. 한 예로 청화백자는 중국 남쪽의 고령토와 중동 지역의 코발트 안료가 만나서 만들어진 거예요. 중국의 흙과 중동의 물감이 만나기 위해서는 이 두 지역을 아우르는 국가가 있어야 되는데 몽골제국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합니다.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융합하는, 마치 스펀지 같다고 할까요?
Q
최근 재단에서 발간한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중 「고려편」의 집필에 참여하셨는데요. 지금으로부터 800년 전에 시작된 고려와 몽골의 공식적 외교관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A
고려와 몽골이 처음으로 관계를 맺은 게 1219년 ‘형제맹약’입니다. 맹약 이전에는 서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어요. 그러다 거란 퇴치를 통해 두 나라가 협력하게 되고 몽골이 먼저 고려에 형제 관계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각자 자신들의 경험으로 이 형제 관계를 해석하죠. 이는 같은 점도 있지만 다른 점도 있었습니다. 같은 점은 두 나라가 동등하지 않다는 것과, 고려가 몽골에 공물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서로 동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몽골이 자신들의 원칙에 따라서 추가로 요구한 것이 있습니다. 공물을 자신들이 요구하는 만큼 보내야 한다는 것과 ‘친조'라고 해서 국왕이 몽골에 직접 와서 조회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형제 관계를 맺고도 몽골은 고려가 자신들에게 ‘투배(投排)’했다고 하고,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었다고 생각했어요. 고려의 입장에서는 강화를 맺은 것이기 때문에 국왕의 친조는 있을 수 없다며 거부했지만 몽골은 투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친조를 해야 된다고 요구했던 거죠. 그런데 고려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니까 몽골이 한 걸음 물러섭니다. 결국은 공물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전쟁을 하긴 하지만 그래도 고려의 주장을 일정 정도 받아들인 걸 보면 그 시절 몽골이 맺은 차별적인 관계 가운데 가장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Q
여몽관계에서 ‘왕실 혼인’도 아주 중요한 부분일 것 같아요. 몽골 공주의 혼인이 몽골 밖으로 이뤄지는 사례가 없었는데 충렬왕 때 새로운 사례가 생겼습니다. 여몽 간의 왕실 혼인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는지요?
A
제국대장공주는 쿠빌라이 칸의 친딸입니다. 먼 친척이 아닌, 친딸을 시집보냈다는 건 몽골이 고려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계속해서 고려국왕들은 몽골 공주와 혼인을 해서 몽골황실의 부마가 됩니다. 그렇다면 쿠빌라이가 왜 고려와 왕실혼인을 맺었느냐를 봐야 하는데, 고려가 몽골에 청혼할 당시 삼별초가 몽골과 항전을 막 시작할 때였고, 미지의 적인 일본에 대해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을 때였습니다. 쿠빌라이로서는 고려 왕실과의 관계를 빨리 안정시키고 고려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해야 삼별초의 위협과 일본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고려국왕이 몽골황실의 부마가 된다는 건 고려와 몽골의 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몽골에서 볼 때 ‘우리가 점령한 지역의 국왕이냐, 우리 황실의 부마냐?’는 전혀 다른 문제거든요. 혼인 전에는 고려국왕과 몽골 사신이 대등하게 마주앉았지만 부마가 된 후에는 국왕이 상석에 앉게 되고, 국왕의 발언권 역시 강해졌습니다. 최근 여기에 문제 제기를 하는 연구자들이 있습니다. 고려의 왕이 고려국왕이냐, 원 황실의 부마냐 하는 정체성 논란이죠. 만약 부마가 국왕을 겸한 거라면 고려는 몽골이 여러 부마들에게 나누어준 영지 가운데 하나가 된다는 겁니다. 하지만 저는 고려국왕이 부마가 된 것으로 봅니다. 몽골에는 여러 부마들이 있었지만 고려국왕처럼 독자적인 역사가 있는 국가를 분봉지로 갖는 경우가 없었거든요. 1310년 몽골의 카이샨 칸이 고려에 보낸 국서를 보면 “짐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 백성과 사직이 있어 왕노릇을 하는 것은 오직 삼한뿐이다.”라는 말을 해요. 또 몽골에서 고려국왕을 ‘외국의 군주’라고도 합니다. 고려가 외국이었던 거죠.
Q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이야기할 때 ‘책봉’과 ‘조공’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책봉과 조공은 사대외교를 유지시키는 발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몽골과 고려 사이에 책봉-조공 시스템은 어떻게 작동했는지 궁금합니다.
A
책봉과 조공은 전통적으로 중국 왕조가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만드는 방식입니다. 강대국 주변에 있는 약소국의 입장에서는 책봉을 받고 조공을 함으로써 국가의 지위를 인정받는다는 의미가 있어요. 그러다 보니 이것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어 왔죠. 고려는 건국 초부터 중국 왕조와 책봉-조공 관계를 맺어 왔습니다. 몽골이 등장했을 때도 고려는 당연히 책봉-조공 관계를 맺고 평화를 지키려고 해요. 강화 직후에 쿠빌라이가 중통(中統) 이라는 연호를 만들고 고려에도 이 연호를 쓰라고 하는데 이건 이전에도 책봉-조공 관계 아래서 있던 일이에요. 그러니 고려는 당연히 이를 책봉-조공 관계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몽골은 여기에 자기들의 전통에 따른 6사(事)를 더 요구합니다. 이 때문에 고려는 원종대 14년 동안 외교전을 계속 펼칩니다. 고려는 여섯 개 조항 중 ‘호구조사 결과 보고’와 ‘다루가치 설치’를 하지 않겠다고 버팁니다. 왜냐하면 이 두 조항은 책봉-조공 관계와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죠. 결국 충렬왕이 쿠빌라이와 담판을 벌여 이 두 가지를 철회하게 합니다. 고려 입장에서는 “6사 중에 핵심적인 요소 두 가지가 빠지니 이건 책봉, 조공 관계다”라고 생각하죠. 저는 책봉-조공 관계는 국가 간의 타협과 합의에 따르는 것이지 정해진 전형이 있는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Q
고려는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민족으로부터 끊임없는 침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켜냈는데요. 북방민족의 침입을 극복할 수 있었던 고려의 저력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A
흔히들 고려가 군사력으로 나라를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생각이 좀 달라요.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대륙의 정세가 유동적일 때라 전쟁이 빈번했는데 이에 반해 고려는 전쟁을 비교적 적게 한 편입니다. 이는 고려의 외교적 성과가 아닐까 싶어요. 고려는 다른 나라가 침략해오면 일단 군대를 동원해 방어를 합니다. 그런데 이 방어는 적을 괴멸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라 침략해온 군대를 일단 군사적으로 막고, 지속적인 외교를 통해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갑니다. 대표적인 게 거란의 침략 때에요. 거란이 고려를 세차례 공격했고, 개경이 함락돼서 왕이 나주까지 피난을 가지만 결국 거란을 물리치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귀주대첩 이후 거란에 먼저 사신을 보내 책봉-조공 관계의 회복을 요청하죠. 전쟁과 협상 두 가지를 같이 진행한 겁니다. 이 협상 이후 11세기 100년 동안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12세기 초에 여진이 금을 세우고 고려에 사대를 요구해 왔을 때도 전쟁을 피할 수 있다면 금에 대한 사대를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이에 반대해서 묘청이 일으킨 서경천도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묘청을 진압한 김부식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때 금에 사대하지 않았다면 12세기 100년의 평화는 없었을 겁니다. 고려는 ‘사대’를 외교정책의 하나로 본 거죠.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해서 평화를 지키는 외교 정책이 ‘사대’였고, 책봉-조공 관계가 그 방법이 되었던 겁니다.
Q
고려는 몽골 황제의 부마가 있으며 몽골과 가장 가까운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고려 31대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칩니다.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치게 만들었던 배경과 결과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A
고려는 몽골과 밀접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몽골과 관계가 100년 정도 유지되다 보니 고려 내에 친몽 세력이 강화되고, 특히 기황후의 일족이 국왕을 인정하지 않는 지경이 됩니다. 또 몽골의 지속적인 간섭을 받다 보니 국가 질서가 흐트러지고, 민생이 어려워집니다. 이런 상황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공민왕이죠. 공민왕이 가장 먼저 한 일이 개혁을 통해 고려를 새로운 나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기황후를 중심으로 하는 친몽 세력의 반대에 부딪힙니다. 마침 공민왕은 왕이 되기 전 10년 동안 몽골에서 생활하면서 몽골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목표를 바꿉니다. 고려 내에서 몽골 세력을 전부 몰아내는 걸로요. 그래서 1356년 반원정책을 펴서 성공을 거두죠. 반원정책은 단순히 몽골이 고려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어찌보면 몽골 황실과 가장 가까웠던 고려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몽골이 이를 제압하지 못한거죠. 이건 몽골제국의 약체를 드러낸 거거든요. 그래서 몽골에 대한 반대 운동이 더 심하게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몽골제국이 붕괴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민왕의 반원운동은 세계사적 의미가 있어요.
Q
여몽관계사를 연구하실 때 어려운 점이 무엇인가요? 몽골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아 여몽관계사의 복원이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A
사실 모든 관계사 연구는 다 어렵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여몽관계사의 복원에서 겪는 어려움은 몽골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해놓은 자료가 없다는 겁니다. 관계사라고 하는 것은 두 나라의 입장을 동시에 봐야 하는데 몽골의 입장을 보기가 어려워요. 또 하나, 고려와 관계되는 몽골의 역사는 한문으로 된 ‘원사(元史)’가 거의 유일한데, 한문으로 쓰이는 과정에서 왜곡이 생겼습니다. 이 책을 쓴 한족의 입장이 투영된 거죠. 그러다 보니 몽골의 입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료가 없어요. 몽골의 입장을 추론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연구가 더 어렵습니다.
Q
재단은 작년 북방사연구소를 신설해 중화주의적 세계관이 아닌 우리 시각으로 몽골 등 북방 민족의 역사를 연구하고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여몽관계사 혹은 몽골사 연구가 우리 역사의 복원에 어떤 기여를 할 것으로 생각하시는지요? 북방사연구소에 대한 제언도 부탁드립니다.
A
과거 국제관계사를 연구할 때 중국 왕조를 중심에 놓고 하는 경향이 있던 것이 사실이에요. 이런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북방사연구소에 기대가 큽니다. 몽골에 대해서도 중국 중심의 역사 해석에서 벗어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최근 고려-몽골의 관계사 연구에서 몽골의 입장을 강조하는 흐름이 있어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관계란 상호적인 것이어서 관계사 연구가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어디까지나 고려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북방사 연구가 한국사의 관점을 포기하고 북방사의 관점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건 여러 색이 모여 무지개를 만드는 자리에서 ‘나는 무슨 색’이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무지개색’이라고 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 싶어요. 제 색깔을 뚜렷이 드러내는 연구를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