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관계사 관련 국역사업은 조선후기 외교문서를 모은 《동문휘고(同文彙考)》 국역본(강계[疆界] 1권, 범월[犯越] 3권) 간행에 이어 2012년 말부터 청말(淸末) 외교문서를 모은 《청계중일한관계사료(淸季中日韓關係史料)》 국역본 간행이 시작되었다. 2011년부터 국역사업에 착수한 《청계중일한관계사료》는 대만의 중앙연구원 근대사 연구소에서 1972년에 출간한, 40년이나 지난 케케묵은 자료집이다. 그렇지만 출간직후부터 주목을 받았으며, 지금도 근대 한중관계사 연구나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연구에서 중요한 자료집으로 활용되고 있다. 발간 직후 이 자료집은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당안관(檔案館 : 문서보관소)에서 소장하고 있는 《총리각국사무아문당안(總理各國事務衙門檔案)》가운데 조선 관련 문서의 거의 전부가 수록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동아시아 국제관계사 연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또한 90년대 이후 중국에서 동북지역 변경문제 연구가 활발하게 추진되었고, 그 결과 동북변경에 관련된 자료집이 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료집을 대신할 정도의 위상과 비중을 가진 자료집이 없다는 점에서 지금도 《청계중일한관계사료》의 중요성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동아시아 정세와 관련한 주요사안 총망라
《청계중일한관계사료》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대만의 중앙연구원 근대사연구소 당안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말의 외교문서 가운데 한ㆍ중ㆍ일 3국 관련 외교문서를 주제별로 골라서 편집한 것이다. 즉, 1864년부터 1912년까지 청의 외교담당 부서인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 1901년 외무부[外務部]로 개편)에서 발송 또는 접수한 문서를 8개의 주제, 즉 ① 조ㆍ청(朝淸) 통상 및 외교 교섭 ② 조ㆍ청 국경교섭 ③ 청일전쟁 이전 조선과 각국의 외교 교섭 ④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⑤ 청일전쟁 ⑥ 청ㆍ일 통상 및 외교 교섭 ⑦ 러ㆍ일전쟁과 청의 입장 ⑧ 일본의 중국 동북지역 침략 같은 주제로 구분하여 수록하고 있다. 이 자료집은 모두 11권 7,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여기에 수록된 4,300여 건의 문서에는 당시 동아시아 정세와 관련된 주요한 사안들이 망라되어 있으며, 사안별로 청조(淸朝)의 정책적 입장과 처리과정이 상세하게 담겨 있다.
《청계중일한관계사료》는 근대 한중관계사 연구에 많이 활용되고 있지만, 아직 한중국경문제 연구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편이다. 이번에 발간하는 국역본 첫 번째 권은 8개의 주제 중 첫 번째 주제인 '중국과 한국의 변경 방어와 경계 문제(中韓邊防界務)' 전반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한중 국경문제에 관련된 문서들이 집중적으로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수록된 문서들은 1864년부터 1872년까지 총리각국사무아문과 다른 부서 또는 총리각국사무아문과 길림장군 사이의 왕복문서로서, '월경벌목(越界伐木)' 항목에서는 함경도 경원의 교역사무소 수리에 필요한 목재를 두만강 건너 중국 경내에서 벌목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한국인의 월경(韓民越界)' 항목에서는 국경을 넘어 중국 경내 및 러시아 경내로 들어간 한국인의 월경사건을 다루고 있다. 당시 청측은 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식하고 두만강을 넘어 중국 경내로 넘어간 한국인들을 체포, 송환하는 한편 한국측에 월경 단속을 요구하였으며, 한국에서 바로 가거나 중국을 거쳐 러시아 경내로 들어간 한국인의 송환을 요구 하였지만 러시아의 반발로 국경에서 월경하는 한국인을 단속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월경사건 관련 문서들을 통하여 1883년 〈중강무역장정(中江貿易章程)〉, 〈회령통상장정(會嶺通商章程)〉 체결로 압록강, 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정하기 이전부터 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국 측의 송환 요구에 대하여 러시아 측은 중러조약을 근거로 한국인의 송환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인의 월경사건이 동아시아에서 국제법체제로의 전환과 맞물려 제기되고 있음을 포착할 수 있다.
《청계중일한관계사료》 번역은 한국 관련 자료 중심의 협소한 시야 보완의 계기
이처럼 《청계중일한관계사료》는 청조의 관점에서 국경문제를 바라보는 시야를 제공해 주며, 한중관계를 넘어 러시아, 일본으로 시야가 확장되도록 인도한다. 이 자료집이 이제서야 국역되는 이유는 청대(淸代)의 한문과 외교문서 양식에 정통한 전문가가 드문 실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관이나 대학에서 수집, 발간하는 자료의 대부분이 한국 관련 자료 중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 관련 자료의 수집, 발간이 방기되는 것은 문제이지만, 이미 한국 관련 자료의 수집이 상당 부분 이루어진 상황에서 한국 관련 자료만 선별적으로 공급되는 폐해도 적지 않다. 특히 19세기 이후의 외교관계, 영토문제는 당사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열강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마련인데, 한국 관련 자료만을 선별한다면 당사국을 규정하고 있는 서구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거두절미되고 한국의 처지만을 강조하는 모양새가 되기 쉽다. 이러한 점에서 《청계중일한관계사료》는 한국 관련 자료 중심의 협소한 시야를 보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청계중일한관계사료》를 통한 시야의 확대는 또다른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자료 수집과 자료집 발간의 범위를 동아시아로 확장할 경우 부딪히는 문제는 대상의 광범위함이라는 문제이다. 한중일이라는 편의적인 범위를 넘어서면 동아시아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를 자료 수집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인지, 근현대사라고 할 경우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인지 모호해 진다. 통상 동아시아 근대사를 러일전쟁에서 제2차 세계대전까지로 잡지만 출발점은 1895년 청일전쟁 또는 1823년 영국동인도회사의 싱가포르 할양까지 내려갈 수 있다. 또한 동아시아라는 지역 범위도 동남아시아는 물론이고 몽골과 인도까지 확대해야 할 것인지 어려워진다. 한국 관련 자료 중심의 협소한 시야를 비판하고 동아시아 관련 자료로 시야를 넓히는 것은 인식론적으로나 방법론상으로 중요한 문제이지만 곧바로 방대한 시기와 범위라는 문제에 부딪힌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는 것이 일본의 '아시아역사자료센터'이다. 2001년에 문을 연 '아시아역사자료센터'는 국립공문서관, 외무성 외교사료관, 방위성 방위연구소 전사자료센터에서 소장하고 있는 공문서를 대상으로, 1868년 메이지정부 수립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일본과 아시아 근린제국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온라인으로 서비스하고 있다. '아시아역사자료센터'의 사례는 일본 정부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공문서를 종합하였다는 점, 공문서를 디지털 자료로 가공하여 온라인으로 서비스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동아시아의 범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사건을 둘러싼 연쇄고리를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방법론적인 문제인 동시에 동아시아연구의 현 단계와 직결되어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