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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포커스
서양 학계의 조선시대 한중관계 인식에 관한 소평
  • 계승범,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

The Chinese World Order 의 책 이미지


조선시대 한중관계에 대한 서양 학계의 관심은 대개 개항(1876) 시기에 집중하였다.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대한 관심의 출발 지점이 서세동점의 19세기였기 때문이다. 전근대에 대한 관심은 2차 대전 이후에 본격화하여, 1969중국적 세계질서(The Chinese World Order)라는 책이 그 초석을 놓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 조청관계를 다룬 장의 집필자는 한국인 학자 전해종(全海宗)으로, 그의 견해가 서양 학계의 전근대 한중관계 인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반세기 동안 조선시대(·청 시기) 한중관계를 다룬 논저가 많지는 않아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이들 연구가 공유하는 인식 가운데 국내 학계에서 관심을 둘 만한 세 가지를 간략히 소개한다.

 

 

조선은 모범적 조공국이었나

조청관계를 전형적관계로 본 전해종의 견해는 서양 학계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조선을 가리켜 ‘model’이나 ‘good example’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사례가 적지 않다. 조공과 책봉 및 정치·외교·무역·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이상적인 호혜관계를 유지했다는 이해의 소산이다. 조선은 명·청에 조공을 바치고 사대함으로써, 국가안보와 자주권(autonomy) 및 왕조의 정통성을 국제무대에서 확보할 수 있었다. 문물의 수입도 주요 이득이었다. ·청 입장에서는 조선을 충실한 속국으로 둠으로써 동쪽 방면의 군사적 위협을 방지하고자 했다. 만주 일대와 일본열도를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다만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하는지에 따라 조선은 ‘model’이라기보다는 예외적 사례일 수도 있다. 이러한 기준 문제는 중국적 세계질서출간 당시에도 논란이 되었다. 대개 서양 학계는 무역에 큰 관심이 있고, 책봉 자체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조공·책봉 프레임을 강조할수록 그 바깥에서 벌어진 다양한 무역 행위를 설명할 틀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 주도한 국제질서를 조공체제(tribute system)라 부르되, 책봉(investiture)이라는 용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 까닭이다. 따라서 황제·제후 관계를 잘 유지한 조선을 이상적 모델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매우 예외적인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이 명·청과 맺은 관계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관계였기 때문이다. 특히, 명이 망한 후에도 여전히 대명(對明) 의리에 집착한 조선의 태도를 보면, ·명 관계는 매우 예외적 사례라 해야 합당하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당시 위안스카이의 모습

 

조선은 자주국이었는가

서양 학계는 국제무대에서 조선이 누린 정치적 권한을 흔히 ‘autonomy’로 이해한다. 이 단어에 ‘independence’의 의미가 없지는 않으나, 대체적으로는 자치의 의미로 쓰인다. 국제정치나 외교 용어로서는 더욱더 그렇다. 만국공법에서 사용한 ‘sovereign’의 의미와도 크게 다르다. , 조선은 명·청의 외국이되 스스로 사대함으로써 간섭받지 않는 자치국이라는 것이다. 당시 용어로 표현하자면 속국이다. 조선을 가리켜 명·청의 ‘vassal’ 또는 ‘tributary’라 표현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조공·책봉 관계를 되도록 형식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는 데 익숙한 국내 학계에서 신중히 다루어야 할 대목이다. 관계의 속성은 시대마다 다르기 마련인데, 중원제국이 도읍을 북경에 둔 원--청 시기의 한중관계에서는 북경을 향한 구심력이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작동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중 강화협상 테이블에 조선이 앉지 못한 사실이나, 개항 후 조선의 외교관계 수립에 청이 늘 후견인처럼 개입한 점은 과연 조선이 독자적 외교권을 행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청은 조선에게 제국주의자였나

개항 시기 조청관계의 성격을 다룬 연구를 관통하는 공통 관심은 조선에 노골적으로 개입한 청 정책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이다. 초기에는 서구식 제국주의를 수용하여 조선에 적용했다는 이해가 주를 이루었다. 최근에는 당시 청이 조선을 식민지화할 힘도 의도도 없었음에 주목하여 비공식 제국주의(informal imperialism)로 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전통적인 관계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려는 움직임도 있으나 아직은 소수 견해일 뿐이다. 이런 논의는 오히려 국내 학계에서 더 활발하다. 특히, 전통적 조공·책봉관계가 왜란이나 개항이라는 비상시국을 만나 조선에 대한 직접 간섭이 심해지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견해가 서양 학계보다는 다소나마 활발한 편이다. 이에 비해, 비공식 제국주의라는 견해에 대한 반응은 아직 수면 위로 크게 대두하지 않은 상태다.


전근대 조청관계에 대해서도 영어권의 일부 논문이 있으나, 대개 기존의 자장 안에 머무는 경향이 짙다. ·청 교체 시기의 조청관계를 다룬 글도 있지만, 홍타이지(皇太極)가 인조에게 보낸 편지 등의 특정 자료를 소개하거나 일반적 개설에 그친 수준이다. 이는 서양 학계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가 최근에 크게 부상한 데 비해, 병자호란 연구가 거의 없다시피 한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뒤흔들 뻔한 왜란과는 달리, 병자호란은 서양 학자가 보기에 만주(Manchu)의 중원 정복이라는 장기 전쟁에 포함된 하나의 군사작전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여적(餘滴)

겉으로 보면 조명관계와 조청관계의 속성은 거의 같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사뭇 달랐다. 명의 북경을 다녀온 사행록 이름이 거의 다 조천록(朝天錄)인 데 비해, 청의 북경을 다녀온 사행록은 대개 연행록(燕行錄)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천자를 배알(拜謁)한 기록연경에 다녀온 기록의 차이만큼이나 조선인의 북경 인식은 천양지차였기 때문이다. ·청 교체를 계기로 북경을 부르는 명칭이 천조(天朝)에서 연경으로 확연히 바뀐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다. 한국사 전공자라면 이런 차이를 크게 보지만, 서양 학자로서는 알기 힘든 내용이다. 겉으로 드러난 관계만 거시적으로 살피는 서양 학계의 한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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