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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포커스
서양 학계의 고구려사 인식
  • 정병준, 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염입본(閻立本) 作 보련도(步辇圖)

당 태종이 가마를 타고 토번(티베트)과 접견하는 그림

(북경 고궁박물관 소장)

 

 

당대사에 대한 기본 시각

당대사를 바라보는 서양 학계의 기본 인식은 1973년에 출간된 아서 라이트(Arthur F. Wright)·데니스 트위체트(Denis Twitchett) , 당대사의 조명(아르케, 1999년 번역)의 서문에 잘 설명되어 있다.

 

중화제국 수천 년의 역사 가운데 당대는 위대했던 시대 중 하나이다. 이러한 엄청난 활력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첫째는 당 왕조의 절충주의로, 바로 당이 이전 400년의 혼란스러운 역사로부터 다양한 문화의 흐름들을 한 데 끌어모은 방식이었다. 둘째는 당의 국제성, 즉 모든 종류의 외국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개방성이었다. 이러한 특성들로 인하여 당 문명은 보편적인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 절충주의와 개방성이 당을 위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2012년에 출간된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Mark Edward Lewis) , 하버드 중국사 당: 열린 세계 제국(너머북스, 2017년 번역)에서도 이어진다.

 

당 왕조의 활력을 상징하는 두 가지 핵심 요소는 절충주의(앞선 시대의 역사를 구성하는 모든 문화적 전통을 활용하는 능력)와 세계주의(외국인과 그들의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개방성)를 들 수 있다(328).

 

이러한 이해는 당대의 국제관계 서술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특히, 서양 학계의 학술을 대표하는 케임브리지 중국사·당 편(1979년 출간, 이하 ·당 편’)에 잘 드러난다.

 

 

동북공정 이전의 고구려 인식

·당 편에서는 시기별 국제관계를 비교적 자세히 서술한다. 그 국가 명칭으로는 동돌궐, 서돌궐, 티베트, 토욕혼, 일본, 고구려, 신라, 백제, 발해, 위구르, 남조 등이 있다. ‘국제관계에서 이들을 서술한 것은 그 모두를 독립국가로 인식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자 중국에서 출간된 ·당 편중국어 번역본의 번역 서문(1990)은 티베트와 발해가 일본·신라와 동등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이는 티베트와 발해가 독립국가였다는 서양 학계의 인식을 부각시키는 효과가 있다. 반면 고구려에 대해서는 아무런 논평이 없는데, 고구려는 중국사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 편1장 제4·당과 외부 세계는 수·당 시대 대외관계를 총괄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581년 중국의 이웃 나라 가운데 고구려만이 정착 인구가 많고 조직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그 외의 나라들은 모두 중국보다 뒤처져 있어 상대하기가 비교적 용이하였다고 한 점이다. 중국 주변의 독립국가 가운데 고구려의 국가적 위상을 매우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고구려에 관한 서술은 비교적 상세하다. 예컨대 제5장 제4대외관계에서는 당과 고구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는데, 이로 보아도 고구려를 중국사의 범주로 보지 않는 것은 명확하다.

 

당 태종은 649년의 대전투가 고구려에 대한 최종 정복전쟁이 되길 바랐으나 죽음에 임해 직접 이 공격을 취소하였다. 678년 고종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는 설득을 받아들였는데, 그 이유는 토번 방어가 한반도보다 더 시급하였기 때문이다. 당은 대량의 병력을 서방의 토번에 대한 전투에 투입하였기 때문에 더 많은 군대를 한반도로 보내 예전 동맹국의 침략적 확장을 억제할 수 없게 되자, 한반도를 점령하고 통치하려던 계획을 취소하였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 벽화 행렬도    

 

 

동북공정 이후의 고구려 인식

서양 학계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은 동북공정 이후에도 거의 변함이 없다. 하버드 중국사 당의 제6외부 세계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보인다.

 

이러한 외국(즉 고구려, 백제, 일본) 지도자들의 굴복은 형식적이어서 직위를 받은 인물들조차도 종종 적극적으로 중국의 영향력과 군대들에 반대하였다. 당나라는 티베트로부터의 증가하는 위협에 집중하여 더 이상 한반도 정복사업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은 여전히 명목상 중국의 국가체제를 모방한 당나라의 종속국가로 남아 있었다. 신라의 한반도 통일은 당나라의 한반도 병합의 의도를 종식시켰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역사적 귀속 문제의 핵심으로 책립(책봉)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 고구려 등이 책립을 받은 것은 종속적이지만, 그것은 실질이 아닌 순전히 형식적이고 명목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앞선 ·당 편에서 신라와 발해는 당으로부터 정치적 독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구히 중국 문화권 안에 편입되었다.”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렇게 볼 때 고구려가 중국사에 포함되지 않는 독립국가라는 것은 서양 학계의 일반적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유용태 저, 동아시아사를 보는 눈(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7)에서 미국 학계를 소개한 문장에서도 미국 학계에서는고구려를 중국사에 귀속시키려는 중국의 기도를 비판하고, 고구려는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국가이며 한국사에 속한다고 명시하고 있다.”(186)라고 하면서 관련 저술을 들고 있다. 이에 반해 2017년 당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시진핑 주석으로부터 한국은 실제 중국의 일부였다. 그것도 북한이 아니라 한국 전체가 그렇다.”라고 들었다고 한 발언이 알려져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서양 학계의 일반 견해와는 다른 것이라고 하겠다. 서양 학계의 고구려에 관한 인식은 한국 학계의 그것과 거의 같다. 걸핏하면 중국 학계가 책립이 실질적 의미를 지녔다고 하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형식적 또는 명분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보는 것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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