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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포커스
서양 학계의 발해사 인식
  • 이동훈,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영안 상경성 궁성지(최희준 제공)



발해와 중국의 관계는 국제관계

21세기가 시작되던 무렵 한국사에 대한 중국 학자들의 인식은 우리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다. 케임브리지 중국사는 중국과는 다른 차원에서 한국사에 대해 접근한다. 본서를 통해 서양 학계의 중국사 및 한국사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역사상 중국과 발해 관계를 중국 국내의 민족관계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신라, 고려, 동남아 제국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국가 사이의 국제관계로 인식한다.

    

 

발해 시대의연꽃무늬 수막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중국에 버금가는 높은 문명을 가진 나라

서양 학계는 외국 민족을 다루는 중국 전통 사학의 문제점의 하나로, 변하지 않는 이론과 끊임없이 진화하는 현실을 일치시키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오복제(五服制)는 선진 시기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중국과 주변 민족과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개념인데, () 천자가 거주하고 있는 도성을 중심으로 원근에 따라 5개의 동심원을 구획하고, 각 구역별로 조근(朝覲)하는 횟수와 진헌(進獻)하는 공물을 차등적으로 규정한 제도이다. 도성 주위에는 문명화된 제하(諸夏)가 거주하고, 외곽에는 교화가 필요한 이민족이 거주한다는 중국 중심적 천하관의 산물이다.



돈화 육정산 고분군, 정혜공주묘(최희준 제공)


본서는 오복제가 중국이 다소 낮은 수준의 문화 발전과 느슨하고 비합리적인 정치 조직을 가진 민족들에 의해 사방에 포위되어 있을 때, 먼 옛날에는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이론이지만 당대(唐代)에 이르러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는 정주 인구와 안정적 제도를 가진 국가라고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중국의 이웃 국가였다. 그리고 8세기 중반의 신라와 발해는 중국보다 현저하게 낮은 발달 수준의 민족도 아니고, 완전히 이질적인 삶의 스타일과 사회 조직을 가진 유목 제국도 아니며, 중국 자체와 마찬가지로 중앙 집권적 관료 왕국으로 조직화된 정주사회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 왕조는 이들 국가와 함께 과거의 어떠한 이웃의 경우보다 훨씬 더 큰 수준의 평등과 공동 문화를 받아들이는 새로운 유형의 관계를 고안해야 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그렇지 못했고, 중국인과 야만인을 극명하게 분열시킨 전통적인 상상의 세계가 중국과 주변 민족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위와 같은 논조를 통해 중국 주변 국가 중 유독 한국 고대 국가들의 발전 수준을 높이 평가하는 서양 학계의 관점도 확인된다. 사실 한반도에서 고대국가의 성립은 이른 편이다. 4세기가 되면 대부분 고대국가에 진입하거나 완성하였다. 주변 민족을 야만시했던 전통적인 중국의 사이관(四夷觀)과는 달리, 현실의 발해는 중국에 버금가는 높은 수준의 문명국이었다.

    



영안 흥륭사 (최희준 제공)

    


발해사는 한국의 역사에 귀속

본서는 중국 학계의 주장과는 달리 발해의 역사가 한국의 역사에 귀속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발해 건국자 대조영이 전 고구려 장군이고, 그가 세운 진국은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에 의해 건국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했으며, 영문 표기에 있어서도 한국어 발음인 ‘parhae’를 사용했다. 집필자에 따라 ‘parhae’를 먼저 표기하고 다음에 ‘po-hai’라는 중국어 발음을 병기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는데, 대체적으로 발해에 관해서는 한국의 견해를 우선하면서도 중국의 견해도 완전히 무시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발해의 역사를 한국과 결부시킨 것이 본서의 기본적인 논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발해 멸망 이후 고려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



영광탑(최희준 제공)

    

“926년에 한국은 삼국으로 분열되어 있어, 발해를 지키고 싶어도 발해 방어에 나설 수 없었다. 발해 그 자체는 잔류한 고구려 통치 엘리트에 의해 세워졌으므로 북방을 지향하는 고려 왕조를 먼 친척이나 잠재적 동맹으로 간주했다.”

    

발해가 고구려 엘리트에 의해 건국된 국가이고, 혈연적으로도 고려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 것이다. ‘발해를 지키고 싶어도 발해 방어에 나설 수 없었다는 서술은 발해와 한반도의 국가들이 협력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포하고 있는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것은 발해가 확실히 한국의 역사에 귀속된다는 본서의 논조가 은근히 표현된 것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발해에 대한 본서의 입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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