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위안부’의 역사는 1990년대 초부터 새롭게 쓰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관점, 새로운 언어, 새로운 미래를 지향하며 세계 평화와 인권 회복을 이끌어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위안부’ 피해 생존자가 있었다. 동시에 이들과 함께하며 자료를 찾고 언어를 만들고 의미를 부여한 활동가, 연구자, 시민들이 있었다. 그 순간들을 기록하며 우리의 역사를 미래 세대에도 이어가고자 한다. |
윈난 송산 전투의 끝: 일본군의 전멸과 ‘위안부’ 여성들
1944년 9월 7일 중국 윈난성 송산(松山) 일대에서 중국 원정군과 일본군이 약 100일간 벌인 치열한 전투는 끝이 났다. 9월 14일에는 텅충(騰衝) 지역 일본군이 전멸했다. 격전 현장에서는 죽임을 당하거나 자결한 일본군 사이에 섞여 있던 일본군‘위안부’의 사체가 발견되었다. 물론, 현장에서 도망치거나 중국군에 구조되어 살아남은 ‘위안부’도 있었다. 중국-버마-인도(CBI) 군사전략지역의 미군이 읽는 신문 『라운드업』은 1944년 11월 30일 윈난 전투 과정에서 발견한 ‘위안부’에 대해 보도했다.
『중국군은 … 10명의 일본인과 조선인 여성을 포획했다. 이 여성들은 3개월간 송산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든 살벌한 포격전과 생사를 건 접근전을 반복하며 적군과 함께 살았다. … 24명의 여성 중 14명은 포격으로 사망하였다. [일본 병사들이 말하길] ‘중국군에게 잡히면 고문을 당할 것’이라 하였고 여성들은 모두 그 이야기를 믿었다고 했다. 그들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본명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이전까지 일본인 지배자에게 가지고 있었던 막연한 신뢰는 지난 2년 동안 산산이 부서졌다고 했다.』
탈출 직전의 위안부들
살아남아 포획된 ‘위안부’ 중에는 22세의 박영심이 있었다. 만삭의 몸으로 송산의 마지막 일본군 진지(陣地)에 남아 있다가 패전을 예감한 일본군들이 자결하기 직전에 동료 4명과 함께 빠져나왔다.
『몇 번이나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이런 곳에서 무참히 죽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지옥과 같은 공포였습니다. … 일본군이 군기軍旗를 태웠다는 말을 듣고 ‘일본이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일본인 여성이 함께 도망가자고 말해서 우리는 즉각 참호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2000년 5월 박영심의 구술, 니시노 루미코 청취)』
박영심 일행은 산에서 강 쪽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들은 허기진 상태에서 남의 밭 옥수수를 따 먹다가 중국군에게 발견됐다. 중국군을 보고 공포에 휩싸인 경상도 출신의 여성은 강으로 뛰어들어 죽고 말았다. 그 순간 극심한 출혈이 시작된 만삭의 박영심은 중국인 의사에게 실려 가 수술을 받았다. 아이는 사산되었다.
송산전투의 마지막 순간 일본군의 요코마타(横股) 진지에서 박영심 일행 5명이 탈출했다가 중국군에게 발견되었다.
최후의 진지에는 자결한 일본군들 사이에 '위안부' 2명의 시신이 섞여 있었다. 맨 오른쪽 여성이 박영심.
소장: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쿤밍 수용소에서
박영심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바오산(保山) 수용소와 추슝(楚雄) 수용소를 거쳐 쿤밍(昆明)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에는 조선인‘위안부’가 23명, 일본인‘위안부’가 4명, 일본군 포로 77명이 있었다. 그중에는 박영심이 있던 위안소를 찾았던 군인 하야미 마사노리도 있었는데, 2005년 9월 6일 자신을 인터뷰한 연구자 엔도 미유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쿤밍 수용소에 있을 때에도 와카하루상(박영심의 위안부 이름)은 잘 챙겨주고 세탁을 할 때도 잘 와주었습니다. … 와카하루상은 일본어를 잘했고, 일본 유행가도 자주 불러주었죠. 명랑하고 기분 좋은 사람이었지. 정말 잘 해주었습니다.』
포로로 감금됐던 수용소에서도 ‘위안부’에게 ‘위안’을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명랑함’을 넘어 박영심이 인간으로서 품고 있는 고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일까. 1995년 북한에서 발간된 증언집에서 박영심은 쿤밍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한 마디로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그들은 일본병, 우리들은 피해자. 왜 같은 감옥에 밀어 넣은 것일까?” 2003년 자신의 과거와 직면하기 위해 북한과 중국, 일본의 지원자들과 함께 송산에 방문했을 때에도 박영심은 다시 한 번 되물었다.
『겨우 살아남은 조선 여성들은 일본군 패잔병들과 함께 전쟁 포로가 되어 중국 곤명 수용소에 약 7개월가량 잡혀 있었다. 짐승 같은 놈들과 포로 생활까지 함께하게 되었으니 기가 막히는 일이었다.(박영심 구술, 『짓밟힌 인생의 외침』, 1995, 80쪽)』
일본계 미군인 코지 아리요시가 1945년 5월 쿤밍 수용소를 찾았을 때, 수용소 밖에는 목을 쭉 뺀 채 조선인 ‘위안부’를 보기 위해 몰려든 중국인이 수백 명 서 있었다. 여성들은 이러한 시선에 분개했다. 1945년 5월 6일 연합군과, 광복군이자 전략첩보국(OSS) 객원 요원이었던 한국인이 심문에 참여하여 작성한 「쿤밍 보고서–쿤밍의 조선인과 전쟁 포로」는 “이들은 명백한 강요와 사기로 위안부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충칭에서 집으로, 다시 전쟁터로
쿤밍 수용소의 ‘위안부’ 여성들은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송되었다. 임시정부의 선전부원 방순희는 이들을 돌봐주고 교육하는 일을 했다. 정정화는 이들이 술에 젖어 있었고, 타이르거나 꾸짖어도 여전했다고 떠올렸다. “사람이 저질러 놓았으되 사람이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위안부’여성들은 1946년 1월 하순에 충칭을 출발해서 3월과 4월 사이 인천항을 통해 고국에 돌아왔다. 모두 함께 왔는지, 어느 순간 흩어져 각자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윤경애(황해도 재령)와 박영심(평남 남포)은 고향으로 돌아가 살다가 1990년대 초반 ‘위안부’ 피해자임을 밝혔다. 윤경애는 자신이 끌려간 곳을 싱가포르로 알고 있다가 1999년 작고했다. 박영심은 2000년 5월 평양에서 일본인 활동가 니시노 루미코와 면담하다 1944년 9월 연합군이 송산에서 찍은 사진 속 ‘위안부’였음이 확인됐다. 또한, 위안소의 ‘마담’ 역할을 했던 평양 출신 황남숙은 1946년 5월 남한 군정청 경무부에 의해 간부급 여자경찰관으로 특채되어 활동하다가 1950년 10월 숙청되었다. 그 외 20명의 소식은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2006년 8월 21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기관지 『조선신보』는 동년 8월 7일 작고한 박영심이 남긴 이야기를 실었다.
『포탄의 소용돌이 중에 굴욕으로 가득한 생활을 보내고, 행운인지 비운인지 나는 사선을 빠져나가 생을 지속해버렸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당시의 기억에 내리눌려 마치 죄인과 같은 기분을 안고 살아왔다. 악몽에 휩싸여 사람들에게 과거의 일을 알리지 않으려고 숨었고,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안고 살아온 나의 일생은 대체 무엇인가.』
박영심은 분노와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자신이 겪은 일을 전하고자 애썼고, 삶에 대한 의지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일생은 대체 무엇인가’라고 질문했다. 이는 피해자 대부분이 생을 마감한 현재, 일본군'위안부' 피해의 역사를 부정하는 시선에 맞서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돌아오는 질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