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유행은 위기인가, 기회인가. 문명은 질병을 만들고, 질병은 문명을 만든다. 에볼라, 사스, 메르스, 지카와 같은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 팬데믹의 선언은 현재를 이끌어온 문명과 공공 보건, 산업 체계 전반이 전환점에 이르렀음을 시사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국가나 조직은 도태될 것이고, 위기를 기회 삼아 이겨내는 국가와 조직은 새로운 문명을 이끌게 될 것이다.
코로나19가 장악한 2020년 지구촌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2020년 5월 18일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확진자 466만 명, 사망자는 31만 명에 달하고 있으며, 치명률(확진자 대비 사망자 비율)이 6.7%에 이른다. 그중에서 동아시아 3국의 현황을 살펴보면 중국은 확진 82,954명·사망 4,634명(치명률 5.6%)이고, 일본은 확진 16,305명·사망 749명(치명률 4.6%), 한국은 확진 11,078명·사망 263명(치명률 2.4%)에 이르고 있다. 이는 전 세계 평균 및 유럽과 북미 대륙과 비교해 볼 때 동아시아 3국은 상대적으로 낮은 감염률과 치명률을 보이지만, 각국의 통계 집계 방식 차이와 투명하지 않은 통계 수치 등을 고려할 때 동아시아 3국이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한 곳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전 세계 확진자가 500여만 명을 향해가는 가운데 유럽, 미국, 중동, 러시아, 브라질 등에서 신규 확진자가 치솟으며 우려 지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당분간 백신이나 치료제의 개발이 어려운 상황에서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추세이기에 장기적으로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코로나19 집단 감염이 중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국, 일본, 러시아, 북한 등 주변국뿐만 아니라 동남아 각국까지 방역의 긴장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한·중·일은 사실상 일일생활권으로 인적 교류와 물적 이동이 활발하여 감염병에 대한 정보 교류와 공동 대처가 긴밀하게 요구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코로나19의 대응 과정을 보면 상호 협력과 지원보다는 개별 국가 단위로 장벽을 쌓고 독자적인 방역을 진행하고 있으며, 각국의 대응 양상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낳고 있다.
콜레라의 습격과 근대적 방역의 시작
동아시아 각국에서 근대적 방역이 시작된 것은 콜레라의 대유행에 따른 것이었다. 가장 먼저 근대적 방역 체계 정비에 나선 것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1822년 콜레라 발생 시에는 무방비 상태에서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하다가,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에서야 방역 체계를 정비했다. 그러나 1879년에도 콜레라로 인해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으며 큰 위기를 맞는다. 이를 계기로 1879년 <호열자병예방규칙>과 1880년 <전염병예방규칙>을 제정하고 위생경찰 중심의 방역 체계를 수립한 것이 일본 방역 체계의 특징이 되었다. 일본의 방역 법령과 방역 체계는 동아시아 각국에 표준으로 자리 잡아 갔다.
조선 정부는 1880년대 콜레라의 유행에 대응하며 국가 검역 체계를 강화하였고, 1885년 선교사 알렌을 해관 총세무사 부속 의사로 임명하여 검역을 담당하게 했다. 1886년에는 <온역장정>을 반포하여 국가 검역을 강화하고자 했으나, 구미 열강의 반대에 부딪혀 제대로 된 방역을 실시할 수 없었다. 조선이 <전염병예방규칙>을 반포하며 방역 체계를 정비한 것은 1899년의 일이었다.
중국도 1873년 콜레라 유행에 대비하여 검역 체계를 정비했지만, 이는 개항지 중심의 방역에 불과했다. 1894년 홍콩 페스트가 중국 및 동아시아 각국의 방역 행정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하였으나, 중국은 1910년 만주 페스트 유행 이후에야 국가 방역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처럼 감염병의 전 세계적 유행은 동아시아 각국이 근대국가 건설과 근대적 방역 체계를 수립하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919년 콜레라 예방접종(인천)
두 명의 공의가 콜레라 예방접종을 실시하고 있고,
중앙의 경찰 복장을 입은 위생경찰이 손가락을 가리키며 통제하고 있는 모습이다.
1920년 콜레라 사체 운반과 소독(전남 장흥)
콜레라 사망자가 발생하면 공의, 위생경찰이 동원되어 콜레라 사체를 소독하고 화장하였다.
1921 페스트 방역대(하얼빈)
페스트 방역대 의료진들이 감염 예방을 위해 마스크 등 보호 장비를 갖추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의 동아시아, 감염병의 총공세에 맞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0년을 전후하여 동아시아에는 각종 감염병의 총공세가 이어졌다. 스페인 독감, 두창(痘瘡), 콜레라, 페스트, 장티푸스 등이 동시에 창궐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주목할만한 감염병은 스페인 독감, 두창, 콜레라, 페스트였다. 바이러스성 감염병인 스페인 독감은 1918년 9월부터 1919년 1월까지 유행했다. 스페인 독감은 낮은 치명률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2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최악의 감염병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750만 명 이상이 감염되었고, 14만 명이 사망하여 치명률은 1.86%에 불과했다. 그러나 스페인 독감은 국가가 질병의 예방, 전염 방지, 치료를 위해 방역 대상으로 지정한 법정전염병이 아니었다. 개별 병원에서 환자가 발견된다 해도 방역 당국에 보고 의무가 없었다. 진단, 예방백신, 치료 등에 대한 대처 방안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염병의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독감이 감염 경로를 알 수 없고 예방도, 치료도 불가능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류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감염병은 두창이었다. 이는 우두법(牛痘法)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 후기 정약용이 인두법과 우두법을 소개했고, 한말에는 지석영이 우두법 보급에 힘썼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대한제국 시기와 일제 식민지 초기에 우두 접종 사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그 결과 일제 식민지 초기 두창 환자는 매년 50명 이하로 억제될 수 있었다. 그런데 1919년에는 2,140명의 환자와 7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1920년에는 11,532명의 환자와 3,614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조선 총독부는 두창의 급증 원인이 3·1운동 때문이라고 변명하였다. 방역 업무에 나서야 할 위생경찰이 만세시위 진압 업무에 동원되다 보니 업무량이 늘어 방역 활동에 나설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만세시위가 잦아든 1922년과 1923년에도 두창 환자는 3천 명이 넘었고, 사망자는 각각 1천 명 이상이 발생했다.
식민 당국은 우두 접종 횟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국면을 전환해 보고자 했지만, 식민지 시기 동안 끝내 두창을 근절시키지 못했다. 식민 당국이 두창을 근절하지 못한 데는 인력, 재정, 기술적 요인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했다. 무엇보다 방역 업무가 총체적으로 부실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불신을 해소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식민지 조선인들은 방역 당국에 협조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콜레라는 1919년과 1920년 여름에 크게 유행했다. 괴질(怪疾) 또는 호열자로 불린 콜레라는 수인성 전염병으로 빠른 전파력과 높은 치명률을 특징으로 한다. 1919년 일본에서는 환자 407명(사망 356명), 조선에서는 환자 16,991명(사망 11,084명), 대만에서는 환자 3,836명(사망 2,693명)이 발생했다. 1920년에는 일본 환자 4,969명(사망 3,417명), 조선 환자 24,229명(사망 13,568명), 대만 환자 2,700명(사망 1,675명)이 발생하여 대만을 제외한 한·일 환자와 사망자는 물론 피해 규모도 대폭 증가했다.
대만은 상대적으로 피해 규모가 작고, 전년 대비 콜레라 환자가 줄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만은 해항 검역을 강화하여 외부로부터의 감염을 차단하는 국경 검역을 중시했고, 결과적으로 감염을 차단하는 효과를 보았다. 반면 식민지 조선에서는 경제적 봉쇄를 우려하여 해항 검역을 비롯한 기차 검역, 육로 검역 등을 거의 실시하지 않았다. 방역 행정에서 국경 검역의 비중은 1%에 불과했고, 국경 검역 실패로 위생경찰 중심의 지역사회 방역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방역을 빌미로 위생경찰이라는 공권력을 동원한 가택 수색 및 인권 침해가 일상화됐다. 이에 따라 조선 민중의 반발은 더욱 커졌고, 희생자도 적지 않게 발생하였다.
페스트는 1920년 10월부터 1921년 10월까지 유행했다. 이 시기의 페스트는 비말을 흡입함으로써 발생하는 폐페스트로, 빠른 전파력과 높은 치명률이 특징인 예후가 대단히 나쁜 질환이다. 일본은 1894년 홍콩 페스트 이후 페스트 방역에 관한 정보를 축적하였고, 중국은 1910년 만주 페스트 이후 이에 관한 임상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페스트와 1920년 콜레라 방역의 실패를 교훈 삼아 해항 검역, 기차 검역, 육로 검역 등을 강화했다. 그 결과 국경 검역 단계에서 환자 대부분을 색출할 수 있었고, 이로써 동북 지역에서 페스트가 유행하는 동안에도 조선에서의 유행을 막을 수 있었다.
이처럼 100년 전 동아시아에는 각종 감염병이 발병했다. 독감을 앓다가 장티푸스로 변증되어 사망하기도 했고, 여러 가지 감염병에 동시에 노출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감염병의 동시다발적 공세는 생명에 대한 위협과 의료 위기를 가중시켰다. 그래도 제국주의 시대의 동아시아는 감염병 정보를 공유하고, 공동의 방역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였다.
서울 송파구 잠실종합운동장에 설치된 코로나19 드라이브스루 검사센터에서
의료진이 환자의 체온을 확인하고 있다. ⓒ연합뉴스
달라진 방역, 그리고 동아시아 방역 네트워크
지난 100년간 일본은 콜레라와 페스트 등의 세균 연구와 백신 개발 분야에서 최고 수준의 의학 지식을 축적해 나가고자 했고, 동아시아 방역 정보망 구축에도 적극적이었다. 통계 조작과 연구 윤리 위반 등의 과오도 많았지만, 동아시아 방역 모델의 선도자적 입장에 서 있었다.
중국은 조계지를 중심으로 선구적 방역 조치를 실행하는 지역이 일부 있었으나, 중앙정부 차원의 통일적 방역은 실행되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방역 행정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은 것은 1910~11년 만주 페스트를 통해서였다. 서양 의학이 중국 의학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몇몇 페스트 연구 성과는 일본을 압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방 군벌들의 견제와 반식민지의 압박 속에서 통일적인 방역 체계를 가동하기 어려웠다.
또한, 냉전 체제 하에서 한·일과의 교류와 협력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한국은 개항 이후 감염병에 노출되면서 국가 검역 및 방역 체계를 구축해야 했다. 그러나 외세의 간섭과 미약한 국력으로 강력한 방역 체계를 구축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식민지와 분단 체제를 경험하면서 감염병에 관한 정보마저도 권력의 입맛대로 은폐되거나 조작되는 상황을 겪었다.
그렇다면 100년 방역의 교훈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제국주의와 냉전 시기를 거치는 동안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감염병에 대한 방역을 주도한 국가가 근대 문명을 주도했다는 점, 그리고 감염병에 맞서기 위해서는 국제적 연대와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적 유행 감염병에 대한 방역의 주도권을 한 번도 쥐어본 적 없던 한국이 코로나19 국면에서 방역의 선도국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역사상 국가 권력은 감염병의 유행에 맞서 질병을 통제하기보다는 국민과 언론을 통제하는 데 더 큰 노력을 쏟았고, 사회 안정을 빌미로 정보의 은폐와 조작을 합리화했다. 특히 제국주의와 냉전 시기의 방역이 격리와 봉쇄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다면, 21세기에는 기존에는 경험하지 못한 투명하고 개방적인 차원의 방역이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국의 이익 우선을 내세우며 감염병 정보를 조작·은폐하거나 선제적 입국 금지와 과잉 통제로 국제적 연대에 장벽을 쌓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도 보인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제 살길을 찾아야 할지, 바이러스라는 보이지 않는 공적(公敵)에 맞서 연대와 협력의 길을 모색해야 할지 답은 이미 나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