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11일 아침 7시, 2019학년도 동아시아사 교원 연수를 이수한 교원 16명은 3박 4일간의 타이완 현장 연수를 떠났다. 이번 현장 연수의 주된 일정은 조명하 의사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조명하 의사는 1928년 타이완 타이중에서 일본 천황의 장인인 ‘구니노미야’를 처단하려는 의거를 일으킨 분이다. 타이완의 날씨는 그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게 도와주려는 듯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처럼 화창해 답사를 떠나기에 최적이었다.
타이베이 한국학교에 있는 조명하 의사의 동상 앞에서 그분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살피고 묵념하는 것으로 우리의 연수는 시작되었다. 이후 우리는 조명하 의사가 의거 이후 사형을 선고받았던 타이베이 고등법원 청사와, 그가 순국한 타이베이 형무소 터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의 타이완 내 연락거점이었던 고려물산공사 자리를 찾아갔다. 타이베이 고등법원 청사는 식민지 시기에 사용하던 건물을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형무소 터는 담벼락만 일부 남아있고, 고려물산공사 자리는 현재 창고공장로 사용하고 있어서 그 흔적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첫째 날의 일정은 2·28 평화공원에서 마무리됐다. 이곳에는 타이완의 자연 지리적 환경을 소개하는 ‘국립타이완박물관’이 있었지만, 우리의 관심을 더 끄는 곳은 ‘2·28 기념관’이었다. 우리가 기념관에 닿았을 때는 폐관 시간이 넘었지만, 한국에서 역사 교사들이 왔다는 말에 배려를 해주셔서 잠시 관람할 수 있었다. 때마침 이곳에는 ‘제주 4·3 특별전’이 개최되고 있었다. ‘타이완 2·28’과 ‘제주 4·3’은 ‘국가권력에 의한 제노사이드’라는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사건으로, 이 슬픈 역사를 우리가 어떻게 교육하면 좋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했다.
둘째 날 우리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설립된 기념관인 ‘AMA House’를 방문했다. 한국과 타이완은 일본군‘위안부’ 피해를 본 공통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를 고백하면서 타이완에서도 피해 사실 고백이 이어졌다. 이곳에서 타이완과 한국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서로 교류하는 모습을 보면서 동북아 역사 갈등 해결을 위한 방법은 당사국들이 함께 협의해야 한다는 점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AMA House’를 떠나 중정기념당과 국부기념관을 차례로 방문했다. 중정기념당은 중화민국의 총통 장제스를, 국부기념관은 대륙과 타이완에서 모두 국부로 존경받는 쑨원을 기념하는 곳이다. 이곳은 중화민국의 수립 및 발전에 대해서 잘 설명해놓고 있었으며, 한국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여러 전시물이 있었다.
중화민국의 역사를 통해 우리나라 독립운동과의 연관성을 살펴본 우리는 지룽으로 이동했다. 지룽은 타이완 북부의 항구도시로, 식민지 시절부터 타이완의 대외창구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조명하 의사가 오사카에서 타이완으로 들어온 곳이 지룽이며, 신채호 선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던 곳이 지룽 수상경찰서였다. 지룽에 닿으니 조명하 의사는 지룽에 발을 내디디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졌다.
지룽 수상경찰서 - 신채호 선생 체포·수감 장소
다음날 우리는 조명하 의사가 의거를 일으켰던 타이중으로 이동했다. 제일 먼저 조명하 의사가 일하던 부귀원 터를 찾아갔다. 당시 영정(榮町) 2정목 10번지에 있던 부귀원은 현재 계광가(繼光街) 10호의 ‘OK마트’와 10-1호의 미용실이 있는 주상복합건물에 해당하였다. 부귀원을 출발한 우리는 조명하 의사가 의거를 일으킨 직후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던 ‘타이중 경찰서’를 거쳐 조명하 의사의 의거가 일어났던 ‘타이중 주 도서관’ 앞으로 이동했다.
조명하 의사가 1차 의거를 일으킨 도서관 앞 사거리는 쉽게 찾았지만, 2차 의거를 일으킨 장소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을 현재의 모습들과 대조하면서 2차 의거를 일으킨 장소를 찾아다녔다. 타이중에서 우리가 기존 자료를 바탕으로 더 정확한 고증을 해낸 것이다. 그렇기에 조명하 의사의 흔적을 찾아간 타이중에서의 일정은 더욱 의미가 있었다.
타이베이로 돌아온 우리는 과거 타이완총독부로 사용되던 총통부 건물을 살펴보았다. 정면에서 바라본 총통부는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조선총독부의 모습과 매우 유사했다. 우리는 조선총독부를 철거했지만, 타이완은 총통부로 활용하는 모습을 통해 식민체제의 유산들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우리는 중산당을 방문한 후 호텔로 돌아와 조명하 의사를 10년 넘게 연구 중인 김상호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김상호 교수는 조명하 의거 사건을 조명하 의사가 큰 뜻을 품고 의거를 일으켜, 천황의 장인인 구니노미야가 당시의 후유증으로 사망하는 데 이르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했다. 일본 측 사료에 집중해 조명하 의거를 단순히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평가하는 다른 연구자의 견해와는 달리 사료비판을 통해 의거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더불어 사료와 연구자의 부족으로 인해 조명하 의사에 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밀려들었다.
마지막 날, 우리는 ‘충렬사’와 ‘국립고궁박물원’을 다녀왔다. 충렬사는 우리나라의 현충원과 비슷한 중화민국을 위해 순국하신 분들을 모신 곳이다. 현충원과의 차이점을 찾자면 현충원은 유해가 모셔져 있지만, 충렬사에는 위패만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충렬사보다 더 이목을 끄는 곳은 국립고궁박물원이었다. 국립고궁박물원은 국공내전 시기에 타이완으로 옮겨놓은 베이징 고궁박물원의 진귀한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다.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이 너무 많아 3개월마다 순환전시를 한다고 했다. 직접 살펴본 고궁박물원은 중국 역사의 진귀한 유물들을 다 모아놓은 곳으로, 그 명성이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장기간 전쟁을 겪으면서도 유물들을 보존해 오늘날까지 접할 수 있게 한 것에서 그들의 역사인식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고궁박물원을 끝으로 3박 4일의 일정이 끝났다. 이번 현장 연수는 조명하 의사에 대한 시각의 전환을 가져옴은 물론이고 중화민국의 역사와 양안 관계까지도 깊게 바라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타이완에서 살펴본 조명하 의거는 처단 대상이었던 구니노미야가 ‘천황의 장인’이었다는 점과 조선에 비해 다소 안정된 식민지였던 ‘타이완’에서 의거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 역사적 상징성은 이봉창·윤봉길 의거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이완에서 살펴본 조명하 의사는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잊힐 것이라는 위기감을 불러오게 했다. 조명하 의사를 비롯해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던 분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샘솟게 했고, 그분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앞으로 학교 현장에서 어떻게 역사교육을 해야 할지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연구해보게 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조명하 의사 의거지 앞 - 타이중 주 도서관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