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윤현주 작가
신주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사학과에서 문학박사를 취득하였다.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책임연구원,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중국 연변대와 일본 도쿄대, 교토대, 대만중앙연구원에서 초빙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 분과위원,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심의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고, 용산공원조성추진위원회 위원이다. 한국독립운동사, 동아시아 역사교육사, 한국근현대 학술사 분야에서 140여 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고, 주요 저서로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 『역사화해와 동아시아형 미래만들기』, 『한국 역사학의 기원』,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1.2』(공저) 등 다수가 있다.
3·1운동으로 시작된 독립에 대한 염원은 조선 전역을 애국열로 물들이며 조선을 넘어 해외로까지 번져갔다. 그중 독립군을 편성해 일본군과 싸워 독립을 이루려고 한 ‘항일 무장투쟁’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을 맞아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항일 무장투쟁의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신주백 연구소장을 만났다.
Q
지난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매우 바쁜 한 해를 보내셨을 것 같습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 대해 간략한 소개와 더불어 올해의 계획에 관해 이야기해 주셨으면 합니다.
A
우선 독립기념관과 우리 연구소에 대한 소개를 잠깐 드리자면 1982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사건으로 한일 간의 역사 갈등이 최초로 일어나게 됩니다. 독립기념관은 그러한 역사 갈등에 대응하기 위해 1987년에 세워졌고, 그때 연구소도 함께 설립되었습니다. 3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세 개 부서에 두 개의 TF 팀 그리고 저를 포함한 47명의 연구원이 연구소의 설립 이념에 걸맞은 연구와 자료 수집, 출판 활동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올해 연구소는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맞아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과 관련해 두 차례 국내외 학술회의 등을,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을 기념하여 국제 학술회의 등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3월부터 매해 3·1운동에 대한 심포지엄을 개최하려고 합니다. 3·1운동은 한반도에서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한반도의 대다수 구성원이 특정한 하나의 이슈를 놓고 공감대를 형성한 최초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3·1운동은 우리 역사의 화수분이기에 그 의미를 단발성 이벤트처럼 처리하지 않고 다양한 각도에서 꾸준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연구소는 독립운동가 열전 집필과 대중 강좌를 개최하여 연구와 소통을 함께해 나가고자 합니다.
Q
아주 바쁜 2020년이 되실 듯합니다. 계획에서 언급해 주셨듯 올해는 봉오동·청산리전투 100주년입니다. 무장투쟁을 이야기할 때 의열단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죠. 더구나 2019년은 의열단 창립 100주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3·1운동 100주년과는 달리 '색깔론'이 일었는데요. 역사학자로서 이를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A
의열단은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단체이고, 그 활동 또한 독립운동사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두고 색깔론 논란이 일고 있는 건, 한국 사회가 여전히 냉전의 산물인 분단 체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실을 드러냈다고 봅니다. 세계적인 차원의 냉전은 해체되었지만, 한국 사회가 여전히 이념에 의해 편가르기를 하고 있다는 방증이죠. 물론 현재의 법규에 대입한다면 김원봉 선생은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독립운동사 맥락에 현재의 법규를 적용하는 게 맞는지는 가히 의문입니다. 이른바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1945년 김원봉 선생이 귀국할 때까지 활약했던 일련의 단체들이 내건 강령은 공산당의 강령과는 명확하게 다릅니다. 김원봉을 좌익으로 보는 것 자체가 이념의 과잉이라는 것이죠. 보훈의 문제와 독립운동사의 맥락에서 김원봉 선생을 이해하는 부분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Q
무장투쟁을 위해 활약했던 단체들이 꽤 많습니다. 눈여겨 보아야 하는 단체가 있을까요?
A
무장투쟁과 관련해서 대표적인 단체를 꼽으라고 하면 한국광복군과 동북항일연군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두 단체는 이념과 활동 공간이 완전히 다르기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불가능해서 두 단체를 다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서안 등지의 한국광복군은 민족주의 성향의 무장부대라면,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은 중국공산당이 지휘하는 부대로 한인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들어간 사회주의 무장단체였습니다. 활동 시기 또한 한국광복군은 40년대, 동북항일연군은 30년대 중, 후반으로 다르지만 둘 다 구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군과 무장투쟁을 벌였습니다.
Q
3·1운동 이후 급속히 고양된 애국열이 무장투쟁이라는 방법으로 표출되었습니다. 독립운동의 방법이 무장투쟁으로 이어지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A
무장투쟁의 사회적 배경을 저는 일본 제국주의가 가진 속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절대 스스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그걸 인지했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그들과 싸워 이기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걸 스스로 깨달았다고 봅니다. 여기서 싸워 이긴다는 건 파업이나 소작쟁의의 수준이 아닙니다. 총을 들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거죠. 그게 바로 무장투쟁인 겁니다. 설명을 좀 덧붙이자면 당시에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독립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1907년 군대가 해산된 이후 신문에 ‘일본과 싸워가야 하는 우리 활동을 어떻게 이름 지을 거냐’를 고민하는 글이 게재되었는데요. 그 과정에 두 개의 대안이 나옵니다. 프랑스의 사회대혁명과 미국의 독립전쟁이 바로 그것인데 이중 독립전쟁을 지지하는 이들이 더 많았습니다.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총을 들고 싸워 독립을 쟁취했듯 우리도 전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독립전쟁이라고 네이밍을 했던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독립전쟁은 두 가지 의미였습니다. 하나는 투쟁의 방법으로써 독립전쟁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이보다 더 광범위하고 높은 수준인 전략론으로서의 독립전쟁론이었습니다.
Q
무장투쟁이라는 것이 하자고 마음을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잘 훈련받은 전투원과 무기가 있어야 전투를 할 수 있잖아요. 이를 어떻게 준비했는지 궁금합니다.
A
앞서 일본과 맞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방법은 싸워 이기는 것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요. 이러한 인식이 생기면서부터 차츰 독립전쟁을 위한 준비가 시작됩니다. 1910년대에 제일 먼저 한 게 인재 양성인데 신흥무관학교가 그 대표적 기관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독립군의 숫자는 만 명을 넘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에 상설적으로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2개 사단 규모였습니다. 기본이 2만 명입니다. 만약 만 명의 독립군이 있다 해도 일본군을 이긴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통치력이 직접 닿지 않는 곳에서 군사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지역인 만주에 주목하게 되는 거죠.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병력을 조달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알아서 찾아오는 젊은이들과 일본군에 징병을 당했다가 탈출해서 온 사람들이 주로 독립군에 합류했는데요. 이들을 중심으로 병력이 충원되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기는 기본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구매를 하거나 혹은 누군가로부터 제공받아야 했습니다. 중국국민당 군대가 한국광복군에 무기를 제공했습니다. 군복, 기초적인 보급품을 다 중국국민당이 제공했죠. 1919년, 20년은 시베리아 내전 중이었기 때문에 시베리아 내전에 참가한 조선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내전에 참가한 조선인들을 통해 무기를 조달하거나 러시아인 등을 통해 구입했고요. 30년대 만주의 독립군들은 한쪽에서는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샀고, 다른 한쪽에서는 중국 군벌들이 여기저기 있었잖습니까. 군벌들로부터 지원을 받은 경우가 있었습니다. 무기의 구매 방식은 시대에 따라서 굉장히 다양했습니다.
Q
한국의 독립운동사는 널리 알려진 독립투사의 역할도 컸지만, 무장투쟁에서는 무엇보다 민초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영화 『봉오동전투』를 보면 수많은 민초가 독립군이 되어 싸우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실제 무장투쟁에서 우리 민초들은 어떤 역할을 수행했나요?
A
특정 인물 중심의 영웅 사관으로 역사가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 역사를 만들기 위해 동참했던 이름 없는 사람들은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 봉오동전투는 역사 연구에 있어 하나의 시사점을 제공한다 생각합니다. 독립운동에 있어 민초들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했습니다. 우선 의병으로 전쟁에 직접 참여했던 이들의 상당수가 민초였습니다. 대규모 일본군보다 독립군의 수는 턱없이 적었습니다. 무기 또한 비교가 안 됐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수호하겠다는 의지 하나로 민초들은 독립전쟁에 참여했고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독립전쟁에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을 해결해준 이들 또한 민초였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대는 이들이 있었고,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군의 동향을 알려주는 이도 있었습니다. 독립군의 옷과 먹을거리 등을 마련해 준 것도 민초들이었습니다. 전쟁에 참여하는 독립군은 장정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먹고, 입고 생활할 수 있게 뒤에서 활동을 도와준 것이 바로 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민초들의 자발적인 협조와 지원이 없었더라면 독립전쟁은 지속할 수 없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다만 그들이 그런 노력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을 위한 민초들의 노력, 그 역사를 찾아내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Q
무장투쟁에서 민초들의 역할에 대해 아직 조사된 부분이 없다는 이야긴가요?
A
지금까지 진행된 봉오동·청산리전투에 관한 연구의 맹점을 하나 꼽자면 이 점일 겁니다. 봉오동·청산리전투 시기에 민초의 역할을 제대로 주목한 논문이 없다는 겁니다. 이는 그동안의 연구가 영웅 사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정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하다 보니 그 역사를 만들기 위해 동참했던 이름 없는 사람들을 기억하려는 노력에 소홀했던 거죠. 그래서 21세기 봉오동·청산리전투를 기억하는 방향은 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투에 참여했거나, 지원했거나, 응원했던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할 것이냐를 고민해야 한다는 겁니다. 봉오동·청산리전투 연구에 있어 또 다른 맹점 중의 하나는 이게 군대가 움직인 거잖아요. 그래서 군사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군사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민간인이 이해할 수 없는 군대만의 독특한 배치 방식, 이동 방식, 전술, 지형을 활용하는 방식에 대한 해명이 본격적으로 이뤄질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래야 그걸 바탕으로 역사학적인 재해석이 이뤄질 수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 연구소에서는 올해 5월과 10월 이 두 가지 측면을 두 차례의 심포지엄에서 집중적으로 다뤄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Q
여전히 사회 일각에서 식민지 근대화론 같은 역사 수정주의 주장이 제기되는 것을 보면, 독립기념관과 동북아역사재단이 여러모로 해야 할 일이 많은 듯합니다. 혹시 재단과 협업이 가능한 부분이 있는지, 이미 하고 있다면 어떤 것을 진행 중인지 살짝 알려주십시오.
A
재단에서 올해 일제 침탈사 총서를 내겠다고 공모를 했고 우리 연구소에서도 총서 시리즈 편집위원으로 한 사람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주로 저항사 중심으로, 재단은 침탈사 중심으로 암묵적인 역할 분담을 통해 협업을 하는 상황입니다. 우선 가시적인 협력은 그렇게 이뤄질 것 같고요. 그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함께 일을 해야 하는 기관이라 생각합니다. 독립운동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해외 여러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있었다는 겁니다. 일본, 중국 본토, 만주는 물론이고 미주, 러시아에서도 독립운동이 일어났잖아요. 이것은 독립운동이 그 나라 혹은 그 지역의 정세에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동북아시아 지역 전체의 역사에 대한 해명과 그걸 통한 우리의 역사 인식의 강화잖습니까? 다시 말하자면 동북아역사재단은 지역에 주목할 수밖에 없어요. 저희도 마찬가집니다. 지역에 주목하지 않으면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해명할 수 없어요. 그래서 지역이라는 역사공간에서, 내지는 지역사라는 측면에서 재단과 협업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두 재단이 국가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고, 동시에 역사를 중심축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역사의 문제는 곧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도 재단과 연구소가 협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그동안에는 협업에 대한 고민이 좀 약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이 세 가지 차원에서 동북아역사재단과 함께할 수 있는 협업을 해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