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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만주 독립운동의 영웅 백야 김좌진
  • 이성우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

백야 김좌진. 그는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민족운동가요, 교육가요, 항일혁명가였다. 조국의 독립은 그가 세운 가장 큰 가치였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민족을 가장 우선시했다. 1920년대 만주 독립운동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에게 전쟁을 통해 독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이도 그였다. 김좌진을 언급하지 않고 만주 항일무장투쟁을 말할 수 없는 이유다.

   


김좌진 생가 

김좌진 생가 -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서다


김좌진은 18891124()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金衡圭)와 한산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그의 집안은 홍성의 명문가로 부호였다. 그의 가문은 10대조 김광현(金光炫)이 이조참판을 역임한 후 홍성에 거주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했고, 이후 후손들은 그의 호를 따서 안동김씨 수북공파(水北公派)라 했다. 김광현의 부친은 병자호란 당시 왕족을 호종하고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순절한 김상용(金尙容)이다. 절의와 척화는 그의 문중 전통이었다. 홍주의병장을 역임하고 파리장서운동을 주도한 김복한(金福漢)이 수북공파 대종손이었던 것도 이러한 전통이 계승된 것이다.


김좌진은 안락한 삶을 영위하며 일생을 편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험난한 독립운동가의 길을 선택한다. 그는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워 교육 구국운동을 펼치며 민족운동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기호흥학회 홍주지회에 참여하고 서울에서 신민회 인물들과 교류하며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김좌진은 1910년 한일강제병탄 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려 했다. 이를 위해 1910년 서울에 이창양행(怡昌洋行), 신의주에 염직회사(染織會社)를 설립한다. 이창양행과 염직회사는 상점으로 위장한 독립운동 근거지였다. 김좌진은 이를 기반으로 서울의 부호를 대상으로 자금모집을 벌이던 중 체포되어 191162년 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19139월 풀려난 후 고향인 홍성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다시 홍성헌병대에 투옥되기도 했다. 이후 김좌진은 19157월음 대구에서 조직되는 광복회에 참여했다. 광복회는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해 독립전쟁을 벌인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비밀단체였다. 광복회는 만주에 부사령을 상주시켜 국내와의 연계를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했다. 만주 부사령은 황해도 의병장 이진룡(李鎭龍)이 맡았으나 이진룡이 체포되면서 광복회에서 자금모집 활동을 벌이던 김좌진이 부사령으로 파견되었다. 이는 만주 항일무장투쟁의 출발점이 되었다.

     


만주 독립전쟁의 중심에 선 김좌진


김좌진은 1919년 만주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로 서명하며 만주 항일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서간도에 설립된 길림군정사, 북간도에 설립된 대한군정서에 참여한다. 대한군정서는 1911년 대종교도들이 조직한 중광단에서 출발한 독립운동단체다. 중광단은 19193.1운동 후 대한정의단으로 발전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명칭을 대한군정서로 바꾸고 임시정부 군사기관에 소속되었다. 김좌진은 대한군정서 사령부를 맡아 사관연성소를 설치하고 대한군정서군 양성에 주력한다. 대한군정서군은 정예부대로 육성되었고, 김좌진은 이들을 이끌고 192010월 백운평·천수평·어랑촌·맹개골·만기구·쉬구·천보산전투에서 일본군을 연파하고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김좌진은 19228월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해 군사부위원장을 맡았으며, 19253월에는 북만주 지역에서 신민부를 조직한다. 신민부는 북만지역 한인들의 자치활동과 생활향상에 주력하며 무장투장을 준비했다. 김좌진은 신민부를 조직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무장투쟁의 선구자로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192812월에는 혁신의회를 결성해 민족유일당 운동을 벌였고, 다음해 7월에는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한족총연합회를 결성 북만지역 독립운동계를 이끌었다.


이처럼 김좌진은 1920년대 만주항일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어 상해로 떠날 수도 있었지만, 만주를 고집했다. 조국의 독립은 일제와의 전쟁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으며, 독립군을 양성해 국내로 진격할 수 있는 최적지가 만주라 여겼기 때문이다. 김좌진이 독립군 양성과 항일무장투쟁을 최고의 목표로 삼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무장투쟁론은 갈등을 빚기도 했다. 대한군정서가 1920년 일본군의 간도출병으로 근거지를 이동해야 했을 때, 총재 서일은 아직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일 시기가 아니며, 북만 오지(奧地)로 이동해 후일을 도모하자고 했다. 하지만 김좌진은 독립전쟁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았고 사령부를 이끌고 청산리로 이동해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일제와 중국 경찰에 의해 신민부 간부들이 체포되었을 때도 적극적인 무장투쟁을 주장하며 군정파를 이끌었다.

     

김좌진 장례식 

김좌진 장례식 - 1930년 3월 25일




만주지역 한인자치에 주력한 유연한 사상가


김좌진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추진하며 한인사회 안정화에도 주력했다. 김좌진은 신민부와 한족총연합회 시기 재만 동포들의 생활기반 마련을 위해 생활개선, 영농방법 개선, 실업 장려 등 동포들의 경제적 부흥을 위한 활동을 지속해서 추진했다. 항일무장투쟁의 기반은 재만 한인사회였기에 한인사회의 안정 없이는 무장투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인 동포들에게 자치조직을 결성케 하고 공동판매, 공동구매, 상호금고 설치·운영 등을 실시해 경제적 이익을 증진하고자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인자제들에게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교육사업에도 매진했다.


김좌진은 항일무장투쟁을 고집했지만, 사상적으로는 유연했다. 그 어느 곳보다도 보수적 성격이 강한 홍성, 척사론과 절의론이 집안의 전통인 안동김씨 문중에서 태어났지만, 계몽사상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만주 망명 이후에는 대종교적 민족주의를 받아들였고, 공화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복벽주의를 주장했던 단체들과 연합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기도 했고, 민족유일당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조국의 독립과 항일투쟁을 위해서는 이념이나 사상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19297월 아나키즘을 받아들여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김좌진은 1930124일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을 맞고 순국한다.


청산리대첩은 일제 식민지배로 신음하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전쟁을 통해 독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대표적인 전투였고, 김좌진이라는 영웅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청산리대첩이 김좌진의 항일투쟁 대명사로 인식되다 보니, 그 외의 독립운동은 주목받지 못했다. 2020년은 청산리대첩 100주년, 김좌진 순국 90주년이 되는 해이다. 안동김씨 명문가 부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삼천리 금수강산을 짓밟고 있는 왜놈을 몰아내겠다며 평생을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그의 삶을 되새겨보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