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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와
인터뷰
태항산맥 속에 깃든 항일 투사들의 열정과 사랑
  • 서재호 휘경여자고등학교 교사

한여름의 태양보다도 더 우리들의 가슴을 끓어오르게 했던 3 4일간의 재단 주관 교원 연수에 참여했다. 이번 연수는 중국 북경, 한단, 섭현 일대의 주요 항일 유적지를 답사하는 내용으로 이뤄졌다. ·일전쟁이 발발한 노구교에서의 답사를 시작으로 조선의용대의 발자쥐를 따라 걸으며 이육사 순국지에 이르러 연수의 여정을 끝맺었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조국 광복의 꿈을 좇아 머나먼 중국에서 자신들을 불태운 독립 운동가들.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듣게 된 풍부한 해설과 현지인들과의 대화는 뜨거운 공감을 끌어냈고, 이는 더욱 큰 여운과 의미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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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산 조선의용군구지 전경


조선의용대의 발자취를 따라서


 

조선의용대가 화북으로 건너와 주둔하게 된 한단(邯鄲)은 태항산 지역으로, 연 강수량이 600mm밖에 되지 않고 여름은 40℃, 겨울은 영하 9℃로 매우 척박한 환경을 지닌 곳이다. 조선의용대는 1941 3월경 낙양에서 모여 황하를 건너 태항산(太行山)까지 걸어서 올라왔다고 한다. 이들은 현지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사원에 본부를 차렸는데 그곳이 바로 흥복사(興福寺)이다. 이곳은 지금도 주민들이 마을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당시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진 후 그 모습이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발걸음을 옮겨 운두저촌(雲頭底村)으로 향했다. 운두저촌은 조선의용대 대장이었던 무정의 주거지와 함께 조선의용대가 항일 선전 활동을 하기 위해 쓴 한글표어가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마을 남문 3면에는강제병 끌려 나온 동포들, 팔로군이 있는 곳마다 조선의용군이 있으니 총을 하늘로 향하여 쏘시오!”,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왜놈의 상관 놈들을 쏘아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시오!”라는 한글 선전 문구가 쓰여 있다. 몇 해 전 건물 화재로 타 없어진 글씨를 예전 사진을 보고 그대로 다시 써 놓은 것이라고 한다.

 


 

조선의용군으로 발전하다


 

뜨거운 공기를 뒤로하고 우리는 바쁘게 석문촌(石門村)으로 향했다. 그곳은 1942년 일본의 소탕작전(5월 소탕 작전)에 맞서 반 소탕전을 맹렬히 치르다 태항산에서 전사한 윤세주 열사, 진광화 열사의 묘(1950년 한단 시내 진기로예 열사능원으로 이장함)와 조선의용군 열사 기념관이 함께 위치해 있다. 이곳은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의 아주 좋은 위치로서 당시 팔로군 현지 최고 지휘관이었던 좌권 장군 초장지와 함께 두 열사의 초장지가 잘 관리되고 있었다. 두 열사의 전사는 중국 공산당 팔로군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고 한다. 두 열사의 전사 소식은 한인들의 독자적인 항일 조직인 화북 조선청년연합회(1941 1) 1942 7월 제2차 대표대회를 열어 화북 조선독립연맹을 결성하게 했고, 그 무장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는 계기가 됐다. 화북 조선독립연맹은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설립(1942 11 1)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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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촌 열사초장묘 (왼쪽: 진광화, 오른쪽: 윤세주)


 

1943 4월에 이르러 중원촌(中原村)에서 남장촌(南庄村)으로 이전한 조선의용군과 조선독립동맹은 1944 1월 주력 부대가 연안으로 떠난 이후에도 한인 청년들이 계속 태항산으로 모여들자 작은 절을 개조해 화북 조선청년 군사정치간부학교(혁명군정학교)를 설립한다. 학교 주변에는 당시 조선의용군 무정 사령원이 1945년까지 학교장으로 있으면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 터와 숙소가 있었지만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1942년부터 이어진 극심한 가뭄과 기근으로 인해 식량을 자급자족해야 했던 조선의용군은 오지산(五指山)에 올라 개간을 하며 식량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우리는 그곳에 당시 조선의용군과 함께 생활했다는 분이 생존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분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확인한 현지 가이드가 그분께 전화를 드려 어렵사리 만남을 성사시켰다. 91세의 왕교진(王巧珍) 할머니는 고령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고 고왔다. 오지산 산자락에 위치한 마을에 시집을 와 생활했고, 조선의용대 용사들을오빠, 오빠하며 따랐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들에게 음식를 대접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앳된 그 시절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하니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한국에서 손님들이 오면 너무나 반갑다는 할머니의 말에 오래도록 그 반가움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할머니의 건강을 기원하며 발걸음을 옮긴 곳은 오지산 산자락에 위치한 조선의용군 주거지. 그곳에는 개간한 땅을 일구며 잠시 쉬던 토굴과 숙소를 이용해 만들어 놓은 정율성 기념관이 있었다. 정율성은 전라남도 광주 태생으로 중국 인민해방군가당시 팔로군 행진곡를 작곡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항일 투쟁에 바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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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산 왕교진 할머니와 함께

 

 


 


 

북경에서 만난 신채호, 이회영, 이육사


 

조선의용대의 발자취를 따라나선 우리의 답사는 마지막 여정으로 들어섰다. 늦은 밤 도착한 북경, 버스 안에서 천안문의 야경을 바라보며 다음 날 아침 만나게 될 신채호, 이회영, 이육사를 생각했다. 김원봉의 부탁으로 의열단 선언문인조선혁명선언을 쓴 단재 신채호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거주지 인근을 돌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그의 정신을 기렸다. 한국의노블레스 오블리즈를 실천하며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밝혔던 이회영의 거주지와 이육사의 순국지에서는 쓸쓸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태항산 깊은 산골에서 조국 광복의 꿈을 그리며 젊음을 불태우고, 열렬히 조국을 사랑했던 그 젊은이들이 그리던 광야가 지금의 분단된 한반도는 아닐 것이다. 답사의 마지막을 이육사와 함께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마음이 많이 복잡해졌다. 우리의 친구, 우리의 후세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 조국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선조들에게 우리는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꼈고, 그 빚을 갚기 위해 우리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품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