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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포커스
혁명가 김구의 파란곡절 가족사
  • 김형오(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회장, 전 국회의장)

독립을 위해 죽기를 무릅쓴 삶

높은 지위와 업적을 쌓은 사람이라도 사생활에 문제가 있거나 공사가 불분명하고 속물근성을 내비칠 때면 적잖이 실망하기 마련이다. 가치관이 혼란스럽고 주장이 세련되지 못한 요즘 세상에선 흔히 보는 현상이다. 이런 세태에 경종을 울리고 각성제로 삼을 만한 인물이 바로 백범 김구가 아닐까 한다. 그는 아호 백범(白凡)이 뜻하는 그대로 가장 낮고 구차한 일을 마다않고 나라와 동포를 섬기고 사랑하며 평생을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과 말과 행동이 궤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파란과 곡절로 점철된 그의 인생극장이 감동을 주는 것도 시대와 어정쩡 타협하지 않은 확고한 사생관(死生觀)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김구 곁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아끼는 이들,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수없이 지켜보았다. 약관(18세)에 동학에 가입하여 접주로, 또 선봉장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시작된 그의 일생은 늘 죽음과 한 짝을 이뤘다. 국모(명성황후)가 무참히 살해당한 데 대한 울분으로 한 일본인을 죽였고(국모보수: 國母報讎), 자살 기도로 스스로를 죽이려 했다. 1911년 안악 사건(안명근 사건) 때는 혹독한 고문으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기를 일곱 번이나 거듭했다. 그럴수록 김구는 “육체는 죽일 수 있어도 정신은 빼앗지 못한다!” 감옥이 떠나갈 듯이 소리를 질러 옥중 동지들을 격려하는 한편 지독한 ‘뭉우리돌’(잡것이 없는 단단한 돌)이 되기를 다짐한다. 결국 아무 관련 없는 이 사건에서 ‘주범’ 안명근 다음으로 중한 15년형을 선고받게 된다. 평범한 삶을 살고자 했던 범인(凡人: 백범)에게 강포한 권력과 암담한 시대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처절한 투쟁으로 독립·광복을 지고(至高)의 사명으로 삼는 혁명가의 길로 안내한다.


윤봉길·이봉창 등 사지(死地)로 내보낸 숱한 애국 동지들도 있었다. 지옥 같은 전쟁터와 폭격, 산더미를 이룬 시신 곁에서 살아났다.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려다 중국 창사(長沙)의 난무팅(楠木廳)에서 반대파 청년이 쏜 권총에 맞아 사경을 헤맨 적도 있고, 끝내는 귀국 이후 서울 경교장에서 흉탄에 서거했다. 1948년 9월 1일, 파인(巴人) 김동환과의 회견에서 한 말이 독립을 위해 죽기를 무릅쓴 김구의 사생관을 보여준다. “나는 생명을 홍모(鴻毛)같이 봅니다. 기러기 날개 깃털처럼 가볍고도 가벼운 것. 큰일을 당했을 때 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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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척의 아픔, 상처의 슬픔

김구는 자식을 넷이나 먼저 저승길에 보내는 참척(慘慽)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첫째 딸(1908년 말~1909년 초 출생)은 엄동설한에 갓난아기를 가마에 태워 황해도 신천에서 안악으로 이사한 것이 화근이었다. 찬바람을 맞은 아기는 며칠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김구 33세) 둘째 딸(화경)은 그가 안악 사건으로 수감 생활을 할 때 감옥 밖에서 걸음마를 배우고 옹알이를 하다가 가석방되기 몇 달 전에 죽고 말았다.(1915년, 김구 40세) “제 죽음을 옥에 계신 아버지께는 알리지 마세요. 오죽이나 마음 상하시겠어요.” 여섯 살짜리의 해맑은 웃음 대신 당찬 ‘유언’을 할머니로부터 듣는 ‘못난 애비’ 김구였다. 둘째 딸을 여읜 슬픔 속에서 얻은 셋째 딸은경 역시도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부모 곁을 떠났다.(1917년, 김구 42세)


김구는 이 모든 불행을 뒤로 하고 태어난 첫 아들 인(仁)의 백일이 갓 지난 1919년 3월 말, 어머니 환갑잔치도 못해 드린 채 비밀리에 상하이(上海) 망명길에 올랐다.(44세) 그 이듬해 8월 아내최준례가 인을 데리고 상하이로 왔다. 2년 후엔 둘째 아들 신(信)도 태어난다. 비록 이국에서 셋방살이지만 실로 오랜만에 전 가족이 한데 모이는 살가움을 맛본다. 그러나 혁명가에게 가정은 사치 인가, 사별은 망명지에서도 이어졌다.


아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신(信)의 목욕물을 버리려고 2층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뎌 낙상을 입었다. 그러나 심한 늑막염과 폐렴으로 프랑스 조계(租界)의 보륭의 원에서 조계 밖 폐 전문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그것이 마지막 생이별이 될 줄이야. 다리외백도교 하나를 지나면 아내를 만날 수 있었지만 백범은 감시의 눈초리가 살벌해 1년이 넘도록 출입 금지 구역인 조계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다.


“정월 초하룻날 최준례 여사가 있는 병원으로 문병을 갔다. 환자가 운명 직전이라 해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최 여사는 핏기 없는 얼굴로 탈진해 누워 있었다. 말도하지 못했지만 정신만은 또렷해 우리를 알아보았다. 결국 백범은 홍커우(虹口) 지역으로 못 나왔고, 어머니 곽낙원 여사만 병원으로 왔다. 그러나 이미 숨져 시신이 영안실로 옮겨진 후였다. 최 여사는 그렇게 병상에서 남편과 시어머니의 따뜻한 체온 한 번 느껴보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정정화 회고록『 장강일기』)



그림자를 벗 삼은 거지 중의 상거지

아내가 투병할 무렵 장남 인도 병세가 심각해 다른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난 다음에야 퇴원했다. 인은 생후 5년 2개월, 신은 1년 4개월 만인 1924년 새해 첫 날에 엄마를 잃었다. 문제는 막내 신이었다. 엄마를 여의었을 때 신은 겨우 걸음마를 뗀 젖먹이였다. 우유를 먹였지만 밤엔 꼭 할머니의 말라붙은 빈 젖이라도 물고서야 잠이 들었다.


그 시절 백범은 아기 보기, 우는 아이 달래기에 선수였다. 동포 집을 떠돌며 숙식을 해결하는 일이 많다 보니 자연스레 터득한 요령이었다. 엄항섭의 부인은 그런 그가 안쓰러웠던지 아기신 사탕이나 사주라면서 은전 한 두 닢을 손에 쥐어주곤 했다. 보다 못한 곽낙원 여사는 1925년 11월 막내 손자 신을 데리고 귀국했다. 2년 뒤엔 맏손자 인마저 본국으로 불러들였다. “입이라도 줄여주기 위해서”였다.


백범 스스로 “내 일생 가족을 모아 가정생활을 한 시간은 짧다. 18세에 붓을 던진 후 시종 유랑생활을 했다. 가장 오래 가족과 함께한 기간이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보낸 4년이다”라고 술회했듯이 망명 이후 김구는 거처가 일정하지 않았다. 평생을 집도 없이 살았다.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은 그에게 숙명이었다. 아내를 잃은 후엔 10년 가까이 홀로 떠돌며 동포들 집에 몸을 맡기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 생활을 이어갔다. 윤봉길 의거 이후의 도피와 은둔 생활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거액의 현상금이 붙은 채 늘 쫓기는 몸으로 이집 저곳으로 떠돌며 더부살이를 계속했다.


스스로 표현했듯이 ‘거지 중의 상거지’, ‘그림자를 벗 삼는 외톨이’가 망명기 백범 김구의 자화상이었다. 입에 풀칠하기조차 버거워 아내의 생전에는 삯바느질 수입으로 끼니를 때웠다. 귀국을 앞둔 어머니가 시장 쓰레기을 뒤져 골라낸 배추 껍질로 담가주고 간 우거지를 거의 유일한 사철 반찬으로 삼을 만큼 궁색한 살림이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를 꾸려갈 때도 청사 집세를 못 내 집주인의 독촉에 시달리던 ‘상거지 국무령’ 신세였다. 김구를 돌보던 어머니가 두 아들을 고국으로 데려간 뒤로는 사무치는 외로움을 그림자를 벗 삼아 동포 자녀들을 돌보며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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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아버지, 무심한 남편, 불효자식

결혼생활 17년(1906년 12월~1924년 1월 1일) 동안 김구가 아내와 함께 살았던 기간은 10년이 되지 않는다. 아내는 국내에선 옥바라지와 뒷바라지로 영일(寧日)이 없었고, 상하이 생활 3년 반 중 1년 이상은 병상에서 어린 두 아들을 애타게 찾다가 쓸쓸히 생을 마쳤다. 3녀 2남에겐 엄마 노릇 한 번 제대로 할 시간과 기회가 없었다. 세 딸은 아주 일찍 엄마를 떠났고, 두 아들은 너무나도 빨리 엄마를 잃었기 때문이다. 막내 신은 ‘엄마’란 말은 배우지도 써보지도 못하고 대신에 ‘할머니’란 말을 맨 먼저 알았다.


장남 인이 아버지와 함께한 세월은 26년 4개월(1918년 11월~1945년 3월) 중 고작 7년이었다. 차남 신도 출생 후 3년 2개월과 귀국 후 경교장에서의 1년 9개월, 그렇게 5년 못 미치는 기간을 아버지와 같이 있었을 뿐이다. 신은 학창 시절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큰 외투 하나로 사계절을 버텼다. 방학이 되면 버스비를 아껴 도중에 고기를 사 먹으려고 충칭(重慶)까지 험한 길을 걸어서 갔다.” 김구도 그런 사정을 헤아렸는지 『백범일지』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자식들에게 아비 된 의무를 조금도 못한 터라 내가 아비라 하여 자식 된 의무를 해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어린 자식과 살가운 대화 몇 마디 나눠보지 못한 가장으로서의 회한이 『백범일지』를 탄생시켰는지도 모른다. 일지는 “인과 신 두 아들 보아라”라고 시작되고 있다.


어머니(곽낙원)는 5,000km가 넘는 험난한 대가족 피난길에서 인후염이 도지고 풍토병에 시달렸다. 의사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되자 급히 충칭으로 후송되어 81세로 생을 마감했다.(1939년, 김구 64세) “하루 빨리 독립을 이루도록 노력하게. 귀국할 때는 내 유골과 상하이에 묻힌 인이 어미 유골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땅에 묻어주게나”라는 유언을 남겼다. 생신상을 차려 드리려고 준비한 돈에 당신 돈을 보태 권총을 구입해서는 “왜놈을 처단하라!”고 내놓으시던 강단 있는 어머니였다.

 

“할머니(곽낙원)가 돌아가실 때 직감적으로 마지막 순간임을 안 아버지(김구)는 울음을 터뜨리셨다. ‘이 불효자 때문에 어머니가 평생 고생만 하시다 여기서 이렇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강인한 아버지도 모친의 죽음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한 인간이었다.”(김신 회고록 『조국의 하늘을 날다』)


 

 

 

 

 

 

맏아들 인도 해방을 불과 5개월 앞둔 1945년 3월, 스물 여덟 살 청년의 나이에 젊은 아내(안미생)와 외동딸(효자)을 남긴 채 공기가 불결한 충칭에서 폐병으로 요절했다.(김구 70세) “쓰촨성 개는 해를 보면 짖는다(촉견폐일: 蜀犬吠日)”란 말이 있다. 쓰촨성에 속한 충칭은 두 강 사이의 분지에 있어 비구름과 안개가 많고 기압이 낮아 악취가 고약했다. 게다가 임시수도가 되어 인구는 급격히 팽창하고 공장 굴뚝에서 내뿜는 석탄 연기로 눈 뜨고 숨 쉬기조차 힘들었다. 대가족이 충칭에 거주한 6~7년 동안 폐병으로 숨진 동포만도 열 명 중 두 명꼴이었다. 병상을 지키던 며느리가 마지막 실낱같은 기대를 품고 페니실린을 구해 달라 했지만 백범은 고개를 저었다. “그 병을 앓다가 죽은 동지들이 많은데 어떻게 내 아들만….” 아무리 선공후사(先公後私)에 철두철미한 백범이라지만 죽어가는 자식에게까지 꼭 그렇게 비정해야만 했을까.



지금 이 나라는 제대로 가고 있는가

김구는 결혼 과정 또한 순탄치 않았다. 가족사만큼이나 우여곡절이 깊었다. 예기치 않았던 파혼의 연속이었다. 1895년 스무 살 때 일생의 스승인 유학자 고능선의 맏손녀와 약혼했지만, 아버지가 김구의 유년기에 얼떨결에 약속했던 김치경의 훼방으로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 뒤로 오랫동안 여성과의 인연은 공백기로 남았다.


김구의 결혼 조건은 그 당시 시대상에 비춰보면 신선하고 파격적이었다. 첫째, 재산을 따지지 않는다. 둘째, 신부가 학식이 있어야 한다. 셋째, 직접 만나 서로 마음이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다른 무엇보다 세 번째 조건이 관례에서 벗어나 있던 시대였다. 1902년(27세) 김구는 그런 까다로운 조건 아래 만난 여옥과 약혼을 했지만 이듬해 정월, 혼례를 코앞에 두고 여옥은 그만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도산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와의 인연 또한 기구하고 애틋하다. 여옥을 잃은 다음해 여름, 두 사람은 신교육 운동을 함께 하던 최광옥의 주선으로 만나 첫눈에 서로 마음이 맞았지만 혼약은 하룻밤 사이에 물거품이 돼버렸다. 천생의 배필 최준례와의 결혼 과정에도 풍파가 많았다. 준례 역시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혼인의 자유’를 주장하며 관습의 벽을 뛰어넘어 필생의 동지 백범을 만난 것이다. 김구는 31세, 준례는 18세이던 1906년의 일이었다. 결혼하자마자 김구는 신부를 서울 경신학교로 유학 보냈다.


한편 젊은 날 애틋했던 안신호와의 인연은 44년 뒤에 극적으로 이어진다. 해방 이후 북한에 남아 진남포 기독교여맹위원장으로 활동한 안신호는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김구를 다시 만나 평양 일대 여러 곳을 함께 다녔다. 당시 안신호는 목사였던 남편과 사별한 상태였고, 말끝마다 김일성을 추켜세우는 공산당원이 돼있었다. “젊은 날 인연이 될 뻔했던 두 분이 백발이 되어 다시 만났다. 한 분은 남쪽에, 또 한 분은 북쪽에 적을 두고 있어 언제 또 다시 만날지 모를 상황이었다. 교회에서 안 여사는 찬송가를 목청을 돋우어 불렀다. 나란히 앉은 두 분 모습이 다정스레 보였다.”(평양 방문길을 수행했던 선우진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한 나날들』)


김구는 누구보다 많은 죽음을 겪었다. 그것도 제 피붙이·살붙이, 형제나 다름없는 동지들이었다. 죽음이라는 비통함과 애절함을 몸소 겪었기에 더욱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동시에 죽음 너머 광명의 길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일어난 일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영화 같은 장면들로 가득 찬 고독한 혁명가의 쓸쓸한 생애를 그린 졸저 『백범 묻다 김구 답하다』를 쓸 때 순간순간 울컥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특히 올해는 3·1운동과 임시정부100주년의 뜻깊은 해였다. 요란한 기념식은 끝났다. 지난 세월을 밑거름으로 하는 감동과 여운은 흔적이 없고, 새로운 100년을 맞이할 각오와 비전은 보이지 않는다. 100여 년 전 나라를 잃었을 때의 무기력과 나라를 되찾기 위한 피눈물 나는 희생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이래도 되는 건가? 이 나라는 제대로 가고 있는가? 이런 물음 앞에 떳떳하게 답할 수가 없어 안타깝고 부끄러워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