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발고도 806m의 산 아래 옛 비류수로 추정되는 훈장강(渾江)과 굽이굽이 강을 따라 발달한 평원이 내려다보인다. 버스를 타고 20여 분 비탈길을 오른 뒤에도 서문에서 999계단, 깎아지른 듯한 산길을 따라 오른 이 곳은 기원전 37년경 부여에서 내려온 주몽(동명성왕)이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우고 첫 도읍지로 삼은 중국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의 오녀산성이다.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 환런 지역의 고구려 유적
오녀산성은 고구려의 초기 도성인 흘승골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가파르게 수직으로 솟은 험준한 형세 때문에 난공불락이었을 천혜의 요새지. 산 정상부에 오르면 훈장강 연안의 환런분지가 한 눈에 들어와 적의 침입을 감지하는 데도 최적이었을 것이다. 경사가 완만한 동벽 남반부를 따라 인공성벽 일부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덕분에 하단에 장대벽을 쌓아 기초를 다지고 그 위에 쐐기형 돌을 얹은 다음 사이사이 돌을 끼워 넣는 고구려 당시 고도의 성 축조 기술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산 아래 고구려 초기 평지토성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찾아 나설 차례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지역은 오녀산성에서 서남쪽으로 10여 km 떨어진 하고성자. 하고성자는 둘레 0.8km에 이르는 장방형의 토성이 자리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170m 가량 남은 서벽을 제외하고 대부분 유실됐다. 그나마 남은 성곽 토대 위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성터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다.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당시 고구려 역사 지구임을 알리기 위해 세워둔 표지석은 어느새 슬레이트 벽 뒤로 밀려나 일부러 살피지 않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하고성자촌에서 1.5km 남짓 떨어진 상고성자촌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200여 기의 고분이 자리해 고구려 초기 도성의 위치는 물론 당시 생활상을 가늠해볼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대부분 파헤쳐진 후 평지로 개간됐고 지금은 겨우 20여 기만 남았다. 국가 지정 보존구역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입구에 없었더라면 이 돌무지무덤군은 한갓 돌 무더기로만 여겼을 것이다. 무덤을 둘러싸고 지역 주민들이 각종 작물을 재배하는 데다 대부분의 무덤이 무너진 상태 그대로 방치된 탓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수몰된 지역에 비하면 형편이 낫다.
환런댐 건설 이후 오녀산성과 훈장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던 대다수의 고분군과 마을은 수몰됐고 현재로서는 그 터조차 찾아볼 수 없다. 특히 이 지역은 광개토대왕비에서 첫 도성터로 지목하고 있는 오녀산성의 서쪽으로 고구려 초기 평지성일 가능성이 열려 있는 지역이다. 게다가 수몰 전에도 건국 전후부터 4~5세기까지 고구려 유적이 많이 발견된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지만 지금은 물 아래로 자취를 감춰 제대로 된 발굴과 연구 기회조차 사라져 버렸다.
‘관리’를 빙자해 훼손당하는 국내성 유적들
환런 지역의 고구려 유적이 무관심 속에 방치·훼손되고 있다면 약 40년의 졸본시대를 마감하고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 국내성이 자리했던 도읍으로 추정되는 지린(吉林)성 지안(集安) 지역에 남은 고구려의 발자취는 중국 정부의 교묘한 관리 속에 또 다른 의미로 훼손되고 있었다.
물론 겉은 화려하다. 환런에서 차로 3시간을 달려 도착한 지안은 잘 정비된 계획도시 같은 인상을 풍겼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만포와 마주하고 있는데 지안시 쪽 강변은 화려한 상점가와 공원로가 조성되어 건너편 북한과 더욱 대조를 이룬다. 중국 정부가 2000년대 초 동북공정을 시작하며 공들인 지역은 환런보다 지안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에 앞서 고속도로, 철로 등 교통 인프라를 갖추는 데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고 유적지 인근 민가 수백 채와 담벼락을 일제히 허물고 복원공사를 집중적으로 실시, 지안시 일대가 관광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지안 지역의 주요 고구려 유적지를 방문하다 보면 한·중 간 역사 분쟁이 여전하다는 사실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장소가 지안시박물관이다. 이곳에서는 중국인 안내원의 설명을 듣는 것 말고는 잡담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현지 가이드 자격증을 보유한 조선족 가이드마저 중국인 안내원의 설명을 그대로 통역·전달만 하도록 했다. 현지 관광업계에 따르면 이러한 방침은 올 초 정해졌는데 문서상 지침은 없지만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을 이끌고 이 일대 박물관과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등 주요 유적지를 방문할 때마다 자체 설명을 제지했다는 것이다.
이날 박물관에서 지정한 중국인 해설사의 설명 역시 편파적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가령 “고구려가 구석기 시대에 머물던 당시 중원은 철기시대였고 고구려는 자체 화폐가 없었다” 던가 “출토된 유물 상당수는 중원 지역에서 전해진 것이며 고구려에는 제작 기술이 없었다”는 식으로 대부분의 설명이 고구려 문명이 중원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시사했다. 물론 이 같은 내용은 구두상으로만 전해질 뿐 안내문이나 팸플릿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 박물관은 왜곡된 역사를 중국인들에게 주입하는 일종의 발전소 역할을 하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 같은 철저한 관리 속에서도 일부 유적지에서는 빠르게 훼손이 진행 중이었다. 광개토대왕의 무덤인 태왕릉은 장군총처럼 피라미드 형식의 돌무덤이었다는데 겉을 감쌌던 돌계단이 모두 무너져 옛 영광을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대왕의 주검이 안치되어 있었던 무덤 꼭대기의 묘실은 철저한 고증에 따른 복원은커녕 시멘트로 마무리한 흔적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귀족들의 무덤 중 하나인 오회분 5호묘의 무덤 벽화 훼손 상태는 심각했다. 높은 습도와 관광 인파에 노출되면서 결로와 백화현상이 두드러졌고 어두운 실내 공간을 비추기 위해 설치된 전등 아랫부분에서는 이끼가 피어올랐다. 당장 외부 공개를 중단하고 복원 작업을 서둘러야 하지만 현재의 한·중 관계에서는 이를 요구하거나 제안할 창구도 마땅치 않다는 게 문제다.
인류 공통의 역사적 자산이어야 할 고구려 유적
지난 7월 6~9일 나흘간 이어진 이번 탐방 기간 내내 복잡한 심정이 이어졌다. 유적지마다 보기 좋게 둘러친 철제 울타리가 보존과 포용보다는 배척과 은폐의 상징물로 느껴진 탓이다. 현 수준에서 시급한 것은 중국만의 역사, 한국만의 역사도 아닌 인류 공통의 역사이자 자산으로서 고구려 역사 복원의 중요성을 한·중이 공유하고 학술 교류에 적극 나서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고구려 역사 연구에 대한 위상을 재정립하는 일이다. 10여 년 전 중국의 동북공정 추진 소식에 모두가 비분강개하며 우리 역사를 지키자고 들고 일어섰지만 막상 중국 정부가 쏟아 부은 천문학적 자금에 비하면 한국 정부의 대응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대학이나 연구소에선 여전히 고구려 역사 전공자가 극소수고 졸업 후에도 마땅한 자리가 없어 고구려 역사 전공을 권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가야사 복원을 국정과제화하는 방안을 지시하면서 가야사 연구 논의가 재점화된 것은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정부 차원에서 교육·연구가 소홀했던 역사 분야에 힘을 실어주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과 지원이 우리 역사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 역사에도 미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