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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포커스
17세기 돗토리 번(鳥取藩) 초닌의 울릉도 도항
  • 윤유숙 (한일관계연구소 연구위원)

돗토리 번 요나고(米子)에 거주하는 초닌(町人에도시대 상공 종사자) 오야(大谷) 씨와 무라카와(村川) 씨는 1620년대에 막부의 인가를 얻어 무려 70년 동안 울릉도에 도항하였다. 그들이 채획한 해륙의 산물은 수량도 적지 않았거니와 근세 일본사회에서 판매되거나 혹은 막번 권력자에게 바치는 헌상품으로 소비되었다. 1693년 안용복과 박어둔을 울릉도에서 돗토리 번으로 연행해 간 것도 바로 오야 가문의 선원들이었다. 헌데 그들은 애초에 어떤 경위로 울릉도에 도항하게 되었을까.

 

돗토리 번과 오야 가문, 울릉도의 연()

돗토리 번은 이나바노쿠니(因幡國)와 호키노쿠니(伯耆國)를 영유하는 번으로,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후 오카야마 번(岡山藩) 이케다 테루마사(池田輝政)의 동생 이케다 나가요시(長吉)6만 석으로 입번(立藩)한 곳이다. 이케다 씨 일족은 100만 석에 육박하는 거령을 영유했는데 돗토리 번은 적어도 근세 초기에는 막부의 정치적 판단과 필요에 따라 히메지 번 또는 오카야마 번과의 전봉(轉封)에 의해 번주가 서로 교체되는 특성을 갖고 있었다.

오야 씨의 선조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초기까지 와다(和田) ()을 칭하였다. 와다 가문은 이즈미노쿠니(오사카부)의 호족이었으나 1399년 오에이(應永)의 난에서 패배하여 일족의 대가 거의 끊어지고 어린 료세이(良淸) 혼자 살아남았다. 성인이 된 료세이는 1466년 기소(木曾) 후쿠시마(福島) 가문의 부름을 받아 3,000()의 식지(食地)를 받고 가신이 되었으나 후쿠시마 씨를 둘러싼 음모에 연루되어 사직하고, 다지마노쿠니(효고현) 오야타니(大屋谷)라는 곳에 칩거했다.

돗토리 번과 무라카와 가문그 사이에 호키노쿠니 오다카(요나고시 소재) 성주(城主) 스기하라(杉原) 가문에서 여러 번 출사(出仕)하도록 요청했으나 료세이는 두 명의 주군을 섬길 수 없다며 거절하고, 대신 손자 겐바(玄番)를 출사하도록 했다. 이전의 주군을 배려하여 본성인 와다를 사용하지 않고 칩거지의 명칭을 따 大谷玄番이라 칭하도록 했다. 그러나 스기하라 모리시게(杉原盛重)가 전사(戰死)하고 스기하라 가문의 혈맥이 단절되자 겐바는 무()를 버리기로 결의하고, 아들 두 명을 조카 진키치(甚吉)에게 맡겨 호키노쿠니 요나고(米子)로 이주하게 했다.

오야 가문 고문서에 의하면 오야 진키치는 처음으로 울릉도를 목격한 인물이자 후일 막부가 발급한 죽도 도해 면허에 울릉도 도해를 상신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요나고로 이주한 시기는 1558~1570년간으로, 요나고의 나다마치(灘町)에 거처를 정하고 회선업(廻船業)을 일으켜 산인 지방에서 호쿠리쿠(北陸) 오우(奥羽) 지역으로 쌀, 술 등의 물자를 운반하는 일에 종사했다. 지금의 동해 지역을 중심으로 회선을 운항하는 일에 뛰어든 것인데 1617년 에치고(니이가타 현)에서 돌아오는 길에 배가 폭풍을 만나 며칠을 표류하다가 울릉도에 표착했다. 섬의 곳곳을 둘러 본 그는 이 섬이 무인도이며 취할 만한 토산품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키치는 본거지인 요나고로 귀환한 후 울릉도 도해를 본격적으로 계획하게 되었다.

 

돗토리 번과 무라카와 가문

한편 村川氏舊記(무라카와 씨의 옛 기록)에 따르면 무라카와 씨의 조상은 원래 오와리세이와겐지(尾張淸和源氏) 야마다 타로(山田太郞)라는 인물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신 히사마쓰 씨(久松氏)의 가신으로 있던 야마다 마사나리(山田正齊)라는 인물이 15814월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오사카에서 셋푸쿠(切腹 : 할복)하였다. 마사나리의 아들 마사카즈(正員)는 유년기에 모친과 함께 요나고로 이주하여 모친의 성()인 무라카와(村川)를 자칭했다.

오야 진키치가 울릉도에 표착한 1617, 돗토리 번에서는 전봉으로 번주 및 요나고 성주의 교체라는 중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돗토리 번의 2대 번주 이케다 나가유키가 1617년 비추마쓰야마 번(備中松山藩)으로 전봉되고, 히메지 번 2대 번주 이케다 토시타카의 적남(嫡男) 이케다 미쓰마사(光政)32만 석을 부여받아 돗토리 번에 입봉한 것이다. 이케다 미쓰마사는 1616년 부친이 사망하자 7세의 나이로 유령(遺領)을 상속하여 42만 석의 히메지 번주가 되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돗토리 번 32만 석으로 감봉되어, 16183월 돗토리성에 입성했다. 전국 통치에 있어 이케다 씨가 지배하는 오카야마 번과 히메지 번을 주고쿠(中國) 지역의 전략적 요지로 인식하던 막부는 두 번에 어린 번주가 취임하는 것을 꺼려해서 같은 이케다 씨 일족이 지배하는 돗토리 번을 전봉지로 활용한 것이다. 그리고 요나고에서도 성주 가토 사다야스가 16178월 이요노쿠니(에히메현) 오즈(大洲)로 전봉되고, 이케다 미쓰마사의 가로(家老) 이케다 요시나리가 새로운 성주가 되었다.

막부는 돗토리 번에 하타모토 아베 마사유키(阿部正之)를 파견하여 전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지 감시하게 했다. 아베 마사유키는 2대 쇼군 히데타다, 3대 쇼군 이에미쓰를 거치는 동안 쇼인반, 쓰카이반, 메쓰케에 이른 인물로 주로 다이묘의 개역 . 전봉 시의 검사(檢使)나 대규모 토목공사의 부교(奉行)로 활약했다. 大谷家文書에 의하면, 당시 돗토리 번에 체재 중이던 아베에게 막부에의 알선을 청탁한 것은 오야 진키치의 조카 가쓰무네(勝宗)였다. 아베의 거처를 찾은 가쓰무네는 무라카와 씨와 함께 도해에 관해 상담했고 아베가 주도하여 진키치와 무라카와 이치베의 이름으로 막부에 청원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막부는 1625년 돗토리 번주 이케다 미쓰마사 앞으로 竹嶋(울릉도) 도해(渡海)를 허가하는 로주(老中)봉서(奉書)를 발급했다. 이 로주봉서를 통상 죽도 도해 면허(竹嶋渡海免許)’라 부르기도 한다.

죽도 도해 면허는 나가이 나오마사(永井尙政) 등 당시 막부의 로주들이 연서하였으며 쇼군이 요나고 초닌인 오야 . 무라카와 씨의 죽도(울릉도) 도해를 허가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후 두 가문은 이 로주봉서를 근거 삼아 매년 교대로 울릉도에 도항하게 되었다.

 

울릉도 도해 면허를 발급받은 두 가문

울릉도 도해 면허를 발급받은 두 가문산인지방에서 울릉도로 출어하는 사람들이 광역적으로 존재하는 가운데 막부가 발급한 위의 로주봉서는 두 가문의 울릉도 도항을 공적으로 보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두 가문은 유일하게 울릉도 도항을 허가받은 세력으로 그 이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막부에 청원했을 당시 무라카와 씨는 아베 마사유키와 오랜 지인(知人) 사이였고, 로주봉서에 연서한 막부의 로주 이노우에 마사나리(井上正就)는 아베의 친척이었다. 결국 도해 면허는 무라카와-아베 마사유키-이노우에 마사나리라는 인맥으로 인한 특별 배려로 교부된 것이었다. 이러한 인맥은 두 가문이 전국(戰國)시대에 무사로 존재했었다는 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추정된다. 두 가문은 막부 배신(陪臣)의 중개로 로주에게서 봉서를 얻어냈을 뿐 아니라 쇼군 단독 알현을 허가받았으며, 울릉도 도항이 금지된 이후에도 돗토리 번과 요나고 측은 두 가문의 경제적인 존속을 위해 배려해 주었다. 따라서 도해 면허를 교부받았을 당시 두 가문은 단순한 초닌이 아닌 일종의 무사적인존재였을 가능성이 크며, 후일에 이루어진 번청의 경제적인 배려도 초기의 무사적인 존재로서의 두 가문에 대한 지속적인 배려의 성격을 지녔을 것이다.

이후 오야 . 무라카와 두 가문은 매년 교대로 울릉도에 도항하였고, 45년에 한 번씩 에도로 가서 쇼군을 직접 알현하였다. 아베 씨와 두 가문은 울릉도 도항의 건을 계기로 친교가 깊어져 두 가문의 쇼군 알현도 45년에 한 번씩 아베 씨가 지샤부교(寺社奉行)에게 신청함으로써 실현되었다. 막부와 두 가문의 관계는 공적, 지속적 관계라기보다 아베 씨가 대대로 중개를 해줌으로써 유지되는 사적이고 부정기적인 관계였다.

돗토리 번도 두 가문을 경제적으로 지원했다. 울릉도 도항에 소요되는 자금을 대부해주고 후일 울릉도 전복으로 대부금을 정산하기도 했으며, 그들로부터 사들인 전복을 쇼군 가문과 막부 요인들에게 헌상하기도 했다. 울릉도산 전복은 일본 내에서 별미로 유명하여 돗토리 번의 대표 산물로 인식되었을 정도다. 두 가문이 운영하는 울릉도 도항선에는 쇼군 가문의 가문(家紋)인 접시꽃 문양 깃발 사용이 허용되었으며, 접시꽃 문양의 예복을 쇼군으로부터 하사받기도 했다. 울릉도 도해가 금지되는 17세기 말까지 약 70년 동안 도항을 계속한 결과, 그들은 돗토리 번 내에서 특권상인의 지위를 구축하게 되었다.

그들은 통상 2, 3월 경 돗토리 번 요나고를 출발하여 일단 시마네 현의 구모즈(雲津), 오키(隱岐)의 도젠(島前)을 경유, 도고(島後)의 후쿠우라(福浦)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얼마간 머물면서 도항체제를 정비하고 4월에 출항하여 때론 울릉도로 가서 채획한 후 7, 8월 무렵 귀항하곤 했다.

 

전복, 바다사자, 목재 등 다양한 산물을 채획하다

전복, 바다사자, 목재 등 다양한 산물을 채획하다다음은 돗토리현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울릉도 . 독도와 관련된 회도(繪圖) 중 하나다. 17세기 말 조 . 일 간에 울릉도 쟁계가 진행되던 시기 돗토리 번이 막부에 제출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의 시마네 현, 오키, 독도, 울릉도, 조선을 한 장에 표현한 것이다.

회도의 중앙에 松嶋(송도)’라 기재된 두 개의 섬이 독도이고 왼편에 磯竹嶋(이소타케시마)’라 쓰인 큰 섬이 울릉도다. 울릉도에서 더 좌측으로 상단 구석에 거꾸로 かうらい(고려)’라고 기재된 부분이 조선이다. 각 포구마다 명칭도 쓰여 있는데 이것은 울릉도에 도항하던 두 가문의 선원들이 붙인 이름일 것이다. 상단 우측에 각 포구의 용도를 구체적으로 별기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두 가문이 울릉도에서 획득한 산물은 전복, 해삼, 버섯, 목재, 바다사자(海驢강치)의 기름과 간 등인데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한 것이 전복과 바다사자였다. 울릉도 해역에는 생선과 조개류가 풍부했고 해변에 전복이 충만했다고 한다. 채취한 전복은 현지에서 통째로 말리거나 꼬챙이에 꿰거나(쿠시아와비串鮑) 또는 소금절이 젓갈로 가공하였고, 해삼과 목이버섯도 채집하여 돌아가 팔았다. 쇼군을 비롯하여 막부의 요직에 있는 인물들, 돗토리 번의 요인들에게 막대한 양의 전복을 헌상하였고 주문에 응하여 매매하기도 했다. 일례를 들면 무라카와 마사즈미가 1626년 교토에서 쇼군 이에미쓰를 알현했을 때 쇼군에게 오동나무와 전복 500개 들이, 막부 요직 인사들에게는 전복 300개 들이를 각각 진상했다.

울릉도와 독도는 해류관계상 바다사자가 서식하는 섬이었다. 매년 6월 무렵이 되면 바다사자(강치)가 새끼를 낳으러 대거 이 섬에 건너왔다. 그들은 바닷가에 구멍을 파 두었다가 그곳으로 기어들어간 바다사자를 조총으로 사살한 후 가죽을 벗겨 나무통()에 넣어 갖고 돌아갔다. 바다사자의 간은 강정제(强精劑)로 중시되기도 했다. 1637년 무라카와 씨의 선박이 울릉도에 갔다가 울산에 표착했을 때 그들의 선박에는 바다사자 기름 314, 말린 전복 406, 환간포(丸干鮑) 4, 반염포(半塩鮑) 2, 바다사자 가죽 253, 목이버섯 8, 바다사자 고기 60가 적재되어 있었다. 전복의 수량도 적지 않지만 바다사자의 가공을 통해 얻은 물품의 양도 대단히 많았다. 그들은 이 물품을 나가사키로 싣고 가서 견직물, 호피(虎皮), 사당(砂糖)과 같은 당물(唐物)과 교환하여 각 지역을 돌며 판매했는데 매우 높은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 또한 울릉도산 단향목이나 오동나무는 질 좋은 목재로 알려져 있었고 특히 백단향은 고급 건축 재료로 정평이 높았다. 1638년에는 에도성 니시노마루(세자 또는 쇼군의 거처) 수리 때에는 그들이 헌상한 목재가 니시노마루 고쇼인(御書院)의 마루 . 책꽂이 등에 쓰였다. 조선이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사이 울릉도의 목재가 정상적인 교역 통로가 아닌 경로를 통해 쇼군의 거처인 에도성의 일각을 장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