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세기 이후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 활약상이 뛰어나 중국 정사(正史) 열전에 수록된 사람 가운데 이정기(李正己, 732~781)가 있다. 중국 본토에 고구려를 다시 세웠다고 평가받는 그의 본명은 회옥(懷玉)이다. 그는 고구려 유민과 거란족, 선비족 등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기미주인 영주(營州)의 평로(平盧)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조양지역이다. 고구려 당시 그 집안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귀족가문 출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무예실력이 뛰어나 평로군의 비장(裨將)이 되었다.
안록산에 맞선 이회옥
건원 원년(758년)에 평로군수 왕현지(王玄志)가 죽자 당 조정에서 그의 아들을 평로절도사로 임명하려 했다. 이들은 평로 지역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이회옥이 주동하여 그를 죽이고 고종사촌 형이었던 후희일(侯希逸)을 추대해 군수로 삼았다. 이때 회옥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양귀비와 모종의 관계로 유명했던 안록산도 절도사 중의 한 명이었는데 평로지역은 안록산의 근거지와 가까웠다.
그러나 평로군은 시종 반(反) 안록산 노선에 서서 당 조정을 옹위했다. 그 때문에 당 조정과의 연결이 차단된 상태에서 서쪽으로는 안록산군, 북쪽으로는 해족(奚族)의 침공을 받는 난처한 상황이 되었다. 후희일과 회옥은 고민 끝에 평로군 2만 명을 이끌고 산동반도의 등주(登州)로 옮긴 후 청주(靑州)에서 관군과 합류했다. 당 조정에서는 반란군과 합세하지 않고 바다를 건너 온 것을 높이 평가해 후희일을 평로치청절도사(平盧淄靑節度使)로 정식 임명했다. 하지만 후희일은 뒤에 불교에 심취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아 민심을 잃었고, 회옥의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이에 후희일이 회옥을 해임하니, 군중에서 “죄가 없는데 폐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들고 일어나 그를 내쫓고 회옥을 세웠다.
그러자 당 조정에서도 그를 인정하고 평로치청 절도관찰사로 임명한 다음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海運押渤海新羅兩蕃使)·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어사대부(御史大夫)·청주자사(靑州刺史)를 겸하게 했다. ‘정기’라는 이름도 이때 하사했다. 이정기에 대한 당의 신임은 갈수록 더해 얼마 후 요양군왕에 봉하고 관작을 더 올려주었다. 이정기의 세력이 확대되자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려는 예방 차원의 조치였다.
중원에서 통일신라보다 더 넓은 땅을 차지하다
이정기는 이후 승승장구하여 치주·청주·제주·해주·등주·내주·기주·밀주·덕주·체주 등 10개주를 확보했고, 다시 조주·복주·서주·연주·운주를 얻어 모두 15개 주를 아우르게 되었다. 관작도 더욱 높아졌다. 당시 이정기는 평로치청절도사란 지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관직과 군대, 세금, 형벌을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반독립세력이었고, 그가 다스리던 지역에서는 세금이 가볍고 공평하며 법령이 안정되었다고 호평이 자자했다. 이에 당 조정과 이웃 번진세력들은 위협을 느끼고 견제하려 했다.
당 조정의 분위기가 변하자 이정기는 거점을 청주에서 운주로 옮기고, 제음에 병사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서주에 병사를 증파하여 양자강과 회하유역을 점거하여 운하를 장악해버렸다. 황제가 있는 장안의 지근거리에 강력한 군대와 경제력을 가진 세력이 자리 잡고 수도로 물자를 옮기는 조운 길을 막아버린 것이다. 이제 조정에서도 더 이상 이정기의 세력 확대를 두고 볼 수 없었고, 이정기도 주변의 절도사들과 손잡고 자신을 압박해오는 조정으로부터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고구려 멸망 후 113년이 지난 781년, 당 본토에서 당과 고구려 유민 후손이 대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낙양과 장안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정기가 갑작스레 사망하고 말았다. 49세의 이정기를 죽음으로 이끈 것은 조선 세조를 그렇게도 괴롭혔던 등창이었다.
한편 당 조정은 이정기의 돌연사로 한숨을 돌렸지만 그 세력을 일거에 제압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도리어 이정기를 태위(太尉)로 추증하고 애도를 표했다. 이정기의 아들 이납(李納)은 백성들이 동요할까 우려하여 몇 달간 이정기의 죽음을 비밀에 붙였다. 이후 다시 세력을 정비한 뒤 제(齊)나라를 선포하고 왕을 칭했고, 그 아들인 이사고와 이사도에 이르기까지 중국 안의 독립국가로 존립하다가 원화 14년(819년) 2월 당 조정과 여러 번진세력의 총공격에 무너졌다.
고구려 멸망 후 태어났지만 그는 “고구려 사람”
이정기는 날래고 건장하며 용력이 대단했음에도 성격은 침착하고 의연했다고 전한다. 진중한 성격의 이정기가 후희일을 세운 뒤 평로군을 집단적으로 이끌고 바다를 건너 산동반도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당시 고구려의 옛 땅에는 발해가 있었다. 《구당서》 이정기 열전 첫머리에 “고구려 사람이다”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보면, 멸망 후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가 고구려 후손임을 모두가 알 정도로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고구려 계승국임을 대내외에 표방하던 발해로 가지 않고 산동지역으로 들어간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 내지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다. 당은 평양성을 함락시킨 후 고구려의 재기를 막기 위해 호강(豪强)한 자 38,200호를 강회의 남쪽과 산남, 경서 제주의 광활한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아마도 이정기 세력은 청주와 서주 지역에 고구려 유민들이 거주하는 것을 알고 건너왔고, 그들을 세력 기반으로 급속도로 세를 불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정기 세력이 팽창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든든한 경제적 기반이었다. 이정기는 발해와 당, 발해와 신라 사이의 무역을 관장하는 해운압발해신라양번사로 임명되었는데, 실은 조정으로부터 이 관직을 받기 전부터 이미 그 일을 맡고 있었다. 등주는 요동이나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갈 때 가장 가까운 지점이어서 고구려 유민뿐 아니라 백제 유민, 신라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정기는 이런 인적자원과 군사력을 이용해 해상무역을 관장함으로써 부를 축적했고, 그것을 기반으로 더욱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이정기와 그 자손들은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춰 50여 년간 독립국가를 유지하다가 멸망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제나라가 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멸망할 때, 신라인 장보고가 이사도를 친 무령군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 세운 나라가 신라인에 의해 또 다시 멸망한 것이다. 신라에서 혈혈단신 당으로 건너간 청년 장보고가 젊은 나이에 산동지역에서 세력을 키우고 이후 청해진을 중심으로 신라와 중국, 일본을 잇는 해상무역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정기 일가가 일구어놓은 경제적 기반과 조직, 항로 등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애증의 역사는 무대와 시간을 달리하여 훗날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