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스스로 잘 안다고 여기는 것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확히 모를 때가 많다. 예를 들어서 맥아더(Douglas MacArthur)나 인천상륙작전같이, 많이 들어 익히 안다고 착각하는 것들에 대해 실제로는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지난해 개봉해 약 700만 관객을 모은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우리의 역사 인식 제고에 큰 기여를 했다는 면에서 매우 반가운 작품이지만, 한편으로는 부족한 역사 고증에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영화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만 보여준다면 재미가 없겠지만, 지나친 각색은 역사적 사실을 혼동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첫 장면 자막에 ‘본 영화는 실화에서 영감을 받아 새롭게 구성’한다고 명시했음에도, 이 영화의 역사 인식은 아쉬운 부분이 많다. 미국의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나 <퍼시픽> 같은 경우는 깐깐한 역사 고증을 통해 보는 사람에게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주지 않는가. 언젠가 우리 영화도 이런 수준에 이르게 되기를 기대하면서, 먼저 인천상륙작전의 전투사적 의의와 영화와 역사 현실 사이의 차이점을 살펴보자.
인천상륙작전의 전투사적 의의와 역사적 사실
인천상륙작전은 적의 의도를 교란하고 대규모 병력을 적의 후방에 상륙시켜 후방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킨 작전이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유엔군이 우회 기동함으로써 북한군의 병참선을 차단하였으며, 이로 인해 낙동강방어선에서 반격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또 인천의 항만시설과 서울에 이르는 제반 병참시설을 북진을 위해 사용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전세를 일거에 뒤집은 뛰어난 작전으로 평가된다.
그럼 영화와 역사적 사실의 차이점을 살펴보자. 영화에서 소개한 맥아더의 한국전선 방문은 6월 28일이 아니라 29일이었고, 전선 시찰에서 만났다는 소년병은 허구의 인물이다. 일부 언론에서 맥아더를 만난 소년병 이야기를 전하지만 당시 부대 배치와 증언이 상이해 그 신빙성이 의심된다. 맥아더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미군의 전쟁 개입을 구상하고 있었으므로 소년병과의 대화에서 참전을 결심했다는 것은 지나친 역사적 상상력으로 봐야한다.
맥아더와 관련해서는 여러 문제가 있다. 우선 인물에 대한 상황묘사에서 그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당시 맥아더는 70세의 나이로 50년이 넘는 군 경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작전에 대한 세부 내용보다는 커다란 정책적 의견을 제시하곤 했다. 영화에서처럼 그가 세세한 부분까지 시시콜콜 확인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또 인천상륙작전의 어려움을 이해시키고자 등장한 맥아더와 반덴버그(당시 미 공군참모총장)의 논쟁 역시 문제가 있다. 영화에서는 반덴버그가 작전 실행을 반대하고 있으나 이는 주로 콜린스(당시 미 육군참모총장)나 셔먼(미 해군참모총장)의 몫이었다. 상식적으로도 상륙작전을 왜 별 관련 없는 공군참모총장이 반대하겠는가?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한 나라도 영화에서는 1950년 9월 15일 16개국의 유엔군이 참전했다고 소개하지만, 당시 참전한 국가는 미국과 영국 두 나라뿐이었고, 이후 16개국이 차례로 참전하게 되었다.
사소하지만 또 하나 언급할 문제는 인천상륙작전 기간에 확인된 적의 기뢰가 고작 12개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적의 대비가 거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이 작전의 기습적인 특성을 잘 나타낸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사실들
마지막으로 영화를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적 사실은 바로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예비적으로 배후에서 진행된 엑스레이(X-Ray) 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던 맥아더는 1950년 8월 12일 대한민국 해군 고문관이었던 루시(Michael J. Lousey) 중령을 손원일(孫元一) 해군총참모장에게 보내 인천지역을 탐지하여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손원일 총장은 해군 정보국장 함명수(咸明洙) 소령을 불러 첩보수집 임무를 하달하였다. 함명수 소령이 이끄는 첩보부대가 영흥도에 상륙하여 활동을 개시한 후 켈로(KLO)부대와 함께 인천과 월미도를 중심으로 서해안 일대의 적정을 수집하였다. 이들이 수집한 정보는 이후 팔미도 등대를 밝히기 위해 영흥도로 상륙한 극동군사령부 클라크 첩보대에 전달되었다. 9월 14일 클라크 첩보대는 명령대로 팔미도에 상륙하여 지정된 시간에 등대에 점화하였고, 이를 발판으로 유엔군의 함대가 비어수로를 통해 상륙작전을 개시하여 성공하였다.
이렇게 인천상륙작전의 배후에는 이 작전의 성공을 위해 특수작전을 수행한 한국 해군 첩보부대와 켈로부대의 활약이 있었다. 또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동원된 약 75,000명의 상륙병력 가운데 작전 당일 피해는 불과 17명의 사상자뿐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동원된 연합군 약 133만 명 중 상륙 당일에만 1만여 명의 연합군이 희생된 데 비하면 이는 엄청난 성공이었다.
비록 여러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는 허구적 요소가 존재하지만, <인천상륙작전>은 나름 의미 있는 영화이다. 현재 우리나라 대다수 학생들이 한국전쟁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실정에서, 그나마 이 영화를 통해 한국현대사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던 한국전쟁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관객에게 소중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