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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
활 잘 쏘는 사람 주몽(朱蒙), 나라를 세우다
  • 김현숙(한중관계연구소 연구위원)

활 잘 쏘는 사람 주몽(朱蒙), 나라를 세우다

 

몇 년 전 고구려와 주몽을 소재로 한 TV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을 때 사람들이 고구려 전공자인 내게 물었다. “<주몽>에 나오는 이야기 사실 맞아?”, “주몽이 정말 그랬어?” 물론 드라마에 나오는 <주몽>은 역사책 속 주몽과 다르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서에 나오는 주몽은 어떤 존재였을까?

 

고난 속에서도 빛난 능력

잘 알려져 있듯 그의 아버지는 하늘 님이자 태양신인 해모수, 어머니는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부인이었다. 그러나 영웅의 인생은 고난으로 시작되었다. 친아버지는 임신만 시키고 떠났고, 홀로 남은 어머니는 부여왕의 후궁으로 살게 되었다. 주몽은 금와의 일곱 아들과 함께 동부여의 궁궐에서 자랐지만, 부여의 왕자들은 능력 있는 그를 시기했다. 그래도 왕자였으므로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았다. 교육받을 기회, 자신의 세력을 키울 기회도 가질 수 있었다. 의붓형제들의 압박을 견디어 내는 과정에서 굳건한 의지력도 생겨 주변 사람들을 규합하고 조직할 필요성도 느꼈을 것이다.

고대의 왕들, 특히 창업군주에게 군사적 능력은 필수였다. 주몽이라는 이름 자체가 활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부여말이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주몽의 활솜씨는 뛰어났다. 나이 일곱 살에 제 손으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눈앞에 날아다니는 파리를 백발백중 맞혔다고 한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고구려 사람들은 말을 타고 높은 산을 작은 언덕 뛰어다니듯 했다. 말을 탄 채 몸을 뒤로 돌려 맥궁에 화살을 대고 활시위를 당겨 쏘는 고구려 무사들의 모습, 그것이 바로 주몽의 모습이었다.

 

뛰어난 전략가로서의 면모

주몽이 머리가 좋아 전략전술에 뛰어났다는 것은 건국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부여를 탈출한 주몽이 우여곡절 끝에 비류수 부근에 이르러 나라를 세운 다음,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주변 지역 탐사에 나섰다가 비류국 송양왕을 만나게 된다. 송양왕이 주몽을 보고 과인이 해우(海隅)에 치우쳐있어 일찍이 군자를 만나지 못하다가 오늘 의외에 서로 만나니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니냐. 그런데 그대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구나.”했다. 이에 주몽이 나는 천제의 아들로 모처에 와서 도읍을 하였다.”고 했다. 그러자 송양왕은 우리는 여기서 여러 대 동안 왕 노릇을 했다. 땅이 작아 두 임금을 용납하기 어렵고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 며칠 안 되니 나의 부용이 되어라.”라고 했다. 주몽이 이에 분노하여 그와 시비를 가리다가 서로 활쏘기를 하여 재주를 시험해 보니 송양이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선주 토착세력으로 오래된 비류국에 명분상 뒤질 수밖에 없었던 주몽의 고민을 알아차린 시종 부분노가 비류국의 북을 비롯한 악기들을 훔쳐왔다. 송양왕은 당장 그것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주몽이 악기들을 변색시켜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했고, 이에 비류국에서도 자기 나라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다. 주몽은 또 궁실을 지을 때 약간 썩은 나무로 기둥을 세워 마치 지은 지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에 송양왕이 고구려 궁실을 보고는 감히 나라의 선후를 따지지 못했다고 한다.

주몽의 지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송양왕이 항복하지 않자 비류국을 직접 공격하기로 한 주몽은 서쪽 지방을 순시하다가 잡은 큰 흰 사슴을 들판에 거꾸로 달아맨 뒤 만일 하늘이 비를 내려 비류국의 도읍을 물에 잠기게 하지 않으면 너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 하늘에 간절히 호소하여 큰 비가 내리게 하라.”고 겁을 주었다. 흰 사슴은 하늘에 들릴 만큼 슬피 울었고, 하늘이 그에 응답하여 마침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레 동안 퍼부은 비로 마침내 송양국의 수도가 물에 잠겼고, 이때 주몽이 나타나 채찍으로 강물을 그으니 물이 줄어들고 홍수가 끝났다. 이로써 주몽과 송양왕의 경쟁은 끝이 났다.

이 설화를 역사학적으로 본다면, 주몽이 비류수 강가에 자리 잡은 송양국을 공격할 때 비가 많이 오는 시점을 파악해 공격에 성공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된다. 지형지물과 기상상태를 잘 파악하여 효과적인 전술전략을 구사했던 것이다.

 

화합형 군주였던 주몽

아무리 개인의 능력이 뛰어나도 혼자서는 나라를 세우지 못한다. 그래서 창업군주들은 누구나 건국 과정에서 주변 세력과 통합하거나 다른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영토와 인적자원, 경제적 자원을 넓혀나간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강한 무력을 앞세우는 유형과 전쟁보다 통합을 우선으로 하는 유형으로 나뉘는데, 주몽은 후자였다.

주몽에게는 부여에서부터 그를 따라 온 오이, 마리, 협보라는 친구들과 재사 등 귀부집단이 고구려 건국에 필요한 인적, 물적 기반을 제공한 사람들이었다. 또 주몽이 압록강 중류유역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울 때 가장 도움을 많이 준 여인 소서노가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낳았다고 되어 있는데, 그 뒤에 주석을 달아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즉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자 우태의 미망인인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를 키우며 살고 있었는데, 주몽이 졸본부여에서 오자 그와 결혼하여 모든 것을 기울여 고구려 건국을 도왔다는 것이다.

주몽은 통합의 귀재였다. 졸본부여에 와서 권력을 잡고 압록강 중류유역에 살던 고구려족 전체를 이끄는 왕이 된 데에는 소서노의 힘이 절대적으로 작용했지만, 주몽 자신의 인품과 실력, 통합력이 없으면 불가능했다. 엄리대수를 건넌 후 모둔곡에 도착했을 때 자진해서 귀부해온 세 사람, 즉 삼베옷을 입은 재사, 납의를 입은 무골, 수조의를 입은 묵거에게 각기 대실씨, 중실씨, 소실씨라는 성을 내리고 받아들인 것도 그 지역 세력과 통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착세력과 연합하여 리더의 자리에 올라서고 지역의 기득권을 인정해주면서 자발적으로 귀부하도록 하는 과정을 볼 때, 주몽이 기본적으로 조정, 통합, 인적 네트워크를 중시하는 화합형 리더였음을 알 수 있다.

스물 둘에 고구려를 건국하고, 마흔에 훌륭한 후계자 유리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황룡의 머리를 딛고 하늘로 올라간 주몽. 그가 오늘날 이십대를 훌쩍 넘어도 취업을 못하고, 마흔이 넘어서도 앞날을 읽지 못하는 후손들에게 힘과 기를 팍팍 불어넣어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