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1536-1584)는 엄밀하고 체계적인 성리학 이론을 탐구하고 은병정사를 세워 후학들을 가르쳤던 유교학자이자 교육자였다. 동시에 그는 사람들의 힘겨운 세상살이를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을까 고민했던 정치가요 행정가였다.
학자이자 교육가, 정치가이자 행정가였던 삶
율곡이 호조좌랑으로 출사(1564년, 정육품)한 이래 내직으로 호조판서(1581년, 정3품), 형조판서(1582년, 정2품), 이조판서(1582·1583년, 정2품), 의정부 우참찬(1582년, 정2품), 병조판서(1584년, 정2품)와 승정원 동부승지(1573년, 정3품)‧우부승지(1574년, 정3품), 예문관 대제학(1581년, 정2품) 등 중앙의 특수 요직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청주 목사,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다는 이력만 보면 의심할 바 없는 전형적인 관료형 인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율곡은 사간원의 정원(1566년, 정6품)‧대사간(1574·1578·1580년, 정3품), 사헌부의 지평(1568년, 정5품)‧대사헌(1581년, 종2품), 홍문관의 부교리(1568년, 종5품)‧교리(1569년, 정5품)‧직제학(1573년, 정3품)‧부제학(1575년, 정3품)‧대제학(1581년, 정2품)과 같은 청요직도 역임하였다.
삶과 정치 현실에서 분주했던 율곡은 많은 저술을 남기고 있다. 율곡이 저술한 대부분의 글은 《율곡전서》에 모아져 있는데, 부조리한 시대 현실에서 “나와 너,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하는 삶의 태도와 자세에 대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부끄러운 세상에서 구차하지 않게 살아가는 도리나 학문하는 바른 방법 혹은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말한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수기를 통한 치인의 대사회적 실천 방법들로 구성된다. 그러나 율곡은 통상적인 유학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불온하게 현실을 문제 삼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과 대안을 무실(務實)의 관점에서 모색한다. 시대 인식과 내용의 질적인 면에서, 고민의 깊이와 갈래에서 동시대 유교학자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알았던 선비
율곡의 사색과 성찰의 원천은 시대 현실과 그가 접하고 만났던 사람들이었다. 율곡은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로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에 아파하고, 고통 받는 삶의 현실에 분노하며 참담해하였다. 강직하면서도 연약해 보이기까지 한 율곡의 심성은 임영(臨瀛)의 땅에서 생장한 어머니 사임당 신 씨에게 비롯되었을 터이다. 너른 들을 가진 동해 바다에 인접한 마을 ‘임영’, 강릉이 그곳이다. 율곡은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죄스러움으로 번민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그러한 마음은 강릉의 외할머니에 대한 극진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율곡이 전통시대 기라성 같은 유교학자들과 다른 점은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의 마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단과 기개를 가진 정의로운 선비였지만,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 전전긍긍할 줄 아는 따뜻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기도 하였다. 그것이 율곡다울 수 있었던 사람 냄새나는 ‘율곡의 향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그 향기에 사람들은 감염되어 공감하였고, 그래서 연대감을 형성하는 동인이 되었다. 율곡이 ‘소통하는 사람이었다’는 정철의 평가는 그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낯선 자가 갖는 향기에 끌린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에게 이끌린다는 것은 자기에게 없는 무엇이 낯선 타인에게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히 지식의 힘만은 아니다. 해박한 지식과 냉철한 지성을 갖춘 사람은 부러움과 찬탄의 대상은 될 수 있지만 한계가 있다. 사람의 향기는 지적인 매력뿐 아니라 ‘사람다움’의 가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있기에 다른 사람을 매혹하고 감동을 준다. 율곡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삶의 향기는 자기로부터의 사색과 세상에 대한 연민의 감성적 층위에서 체득된 ‘온-경험’의 산물이다. 그 향기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면서 성찰하게 하고, 나와 타인이 함께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화해의 세계를 모색하게 한다. 그러한 성찰을 담고 있는 율곡의 저술이 《격몽요결》이다.
공존과 화해의 성찰을 담은 《격몽요결》
흔히 《격몽요결》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교육 입문서’로 알려져 있다. 《격몽요결》이 초학자들의 학문 지침서로 사용된다는 점에서는 ‘입문서’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학문하는 자라면 일생 동안 실천해야 할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성인기약이 그것이다. 성인을 기약하는 이 책이 담고 있는 핵심은 ‘용기’와 ‘진실함’에 있다. 율곡의 《격몽요결》은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삶을 현재적으로 조망하게 한다. 무한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의 시대에서 자기 성찰과 혁신, 연대의 가능성을 율곡의 《격몽요결》에서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산수몽괘(山水蒙卦)의 상구(上九) 효사(爻辭)에서 말하는 “몽을 치는 것”, 곧 ‘격몽(擊蒙)’의 참된 뜻이다.
우리는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하루하루를 허겁지겁 살아간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바쁘게 살아간다. 나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타인의 고통마저도 그저 타인의 일이라 외면하고, 인간의 가치를 말살하는 폭력과 잔혹함에 저항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현실을 직시할 때만이 부정의한 현실이 갖는 거짓과 위선을 폭로할 수 있으며, 저항하고 극복해낼 수 있다. 그것은 현실[此岸]이 너머[彼岸]에 있다는 믿음을 버리고, 차안과 피안의 불가분리성을 각성할 때, 우리는 피안의 차안을 ‘지금-여기’서 만나게 된다. 이것은 자기로부터 발견하는 ‘용기’와 그러한 용기를 추동하는 ‘진정성’의 재발견과 다르지 않다. 너와 더불어 조화롭게 공존하며 화해의 세상살이를 꿈꾸는 것, 우리는 그런 희망을 가꾸어야 가야 한다. 우리가 율곡을 통해 조제보합(調劑保合)의 현실을 다시금 살펴봐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