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도시대 일본 사회에 조선인이 정주하게 된 발단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연행된 조선인 전쟁포로, 즉 피로인(被虜人)의 존재에서 유래한다. 피로인이란 본래 조선 문헌에 사용된 사료용어인데, ‘임란 중 일본군에 의해 납치된 민간인 전쟁포로’라는 성격을 표현한다는 측면에서 현재 한·일 양국 학계에서 역사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임진왜란이 낳은 피로인(被虜人)
1990년대 일본학계 일각에서 이들 피로인을 ‘조선초기도래조선인(近世初期渡來朝鮮人)’으로 표현한 예가 있었다. 그러나 일본학계 특히 고대사 분야에서 사용하는 도래인(渡來人)이란 자주적 의지로 집단 도래한 사람들을 의미하므로, 임진왜란으로 발생한 피로인을 근세의 도래인으로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학계에서 피로인에 관한 선행 연구로는 사츠마번(薩摩藩)의 집단거주 정책 하에서 생활하던 조선인 도공(陶工)연구(현재 가고시마현 나에시로가와 마을)가 가장 선구적이다. 이후 주로 조선통신사의 피로인 쇄환활동을 다룬 논고 속에서 일본 근세사회에 정착한 조선인이 언급되거나, 그들의 사회적 존재 형태를 규명한 연구 성과 등이 최근 나오는데 대개 개개인의 사례를 개별적으로 소개하는 형태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조선 침략에 참가한 다이묘들이 많았던 서일본 지역, 예를 들어 규슈(九州), 주고쿠(中國), 시코쿠(四國)일수록 다수의 조선인을 납치했다. 따라서 서일본 지역은 일본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로인의 숫자도 많았고, 일본에서의 정주 내지 집단거주의 길을 택한 조선인 숫자도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서일본 지역에는 조선인 마을 즉 ‘唐人町’(또는 高麗町)이 곳곳에 존재했다. 그렇다면 이른바 조선계 주민들에 대한 일본 공권력(藩權力 또는 幕府)의 지배 정책, 조선계 주민의 사회적 지위 등은 어떠했을까.
일본 인신매매상에 의해 타 지역으로 전매된 조선인
현재 일본학계에서는 근세 일본 사회에서 이민족의 일본 정주와 관련하여 ‘非크리스트 교도이면서 일본의 풍속, 습관에 동화되면 인종, 민족을 문제시하지 않는 것이 막번 권력의 기본적 태도였다’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특수한 업종에의 종사를 강요받았던 일부 도공들과 달리 일반 조선인이 집단거주를 하게 된 데에는 각기 고유한 유래가 있었을 테고, 이민족 집단거주지 특유의 존재 양상을 띠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이 일본에 연행된 형태는 일본군에 의해 각 다이묘의 영국(領國)으로 이송되는 경우, 인신매매를 목적으로 하는 일본 상인에게 납치 또는 매입되어 가는 경우를 들 수 있다. 임진왜란 중에는 여러 일본 상인들이 일본군을 따라 조선에 건너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인신매매 상인들도 많았다. 일본군은 때로 납치한 주민을 진지에 후속 세력으로 따라온 인신매매 상인에게 팔아넘기기도 했다. 인신매매 상인은 조총(鳥銃)이나 백사(白絲)를 대가로 받고 조선인을 포르투갈 상인에게 넘겼고, 포르투갈 상인은 조선인을 아시아 지역이나 포르투갈 식민지에 다시 팔아넘기곤 했다. 문자 그대로 노예 사냥의 구조를 연상케 하는 상황이다.
1983년 런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17세기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가 그린 ‘한복을 입은 남자’라는 그림이 당시 경매 사상 최고가인 32만 4,000파운드(6억 6,000만원)에 팔렸다.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상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필리핀, 일본, 인도 등을 여행한 후 남긴 여행록 《나의 세계 여행기》(1701년 간행)에는 ‘일본군은 수많은 코레아의 남녀를 잡아다 헐값으로 팔았는데 나도 다섯 명을 산 후 인도의 고아까지 데리고 갔다가 풀어 주었다. 한 명을 피렌체까지 데려갔는데 지금 안토니오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한복을 입은 남자’에 묘사된 조선인과, 카를레티가 일본군으로부터 구입한 조선인 안토니오가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7세기 조선이 유럽의 그 어떤 국가와도 직접적인 통교관계를 갖지 않았음에도, 조선인을 모델로 한 루벤스의 인물화가 존재한다는 것은 임진왜란 때 일본인의 손을 거쳐 유럽 등 타 지역으로 전매된 조선인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에 귀국한 피로인과 잔류한 피로인
이처럼 일본에 연행된 피로인은 일본국내 뿐 아니라 마닐라, 마카오, 인도, 유럽 등지에 노예로 전매(轉賣)된 사람들이 있기에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일본의 도호쿠(東北)지방에서 오키나와(沖縄)까지 광범위하게 분산된 피로인은 현재까지도 그 정확한 총인원을 산정할 수 없는 상태지만 일본 측은 대략 수 만 명, 한국에서는 최고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중에서 조선으로 쇄환된 피로인의 총수는 7,500명 이상, 혹은 6,100명 정도라는 의견이 제시되었으니, 결국 수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일본에 잔류한 셈이다.
임진왜란 종료 후 피로인이 귀국한 경위는 크게 세 가지였다.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서두르던 쓰시마번의 노력에 의해, 또는 피로인의 자력에 의해, 또는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에 의해 쇄환이 이루어졌다. 구체적인 쇄환 사례는 1599년부터 시작되어 1607년, 1617년, 1624년, 1636년, 1643년 통신사행까지 약 반세기에 걸쳐 확인되며, 특히 1610년까지의 기간에 집중되어 있다.
쇄환이 시작되자 초반에는 귀국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1607년 통신사는 남녀 합해 1,418명의 조선인을 쇄환하였다. 귀환자 수는 그 후 점차 감소해 갔다. 1643년 통신사에 의해 쇄환된 자는 겨우 14명이었고 이로써 피로인의 쇄환은 사실상 일단락되었다. 처음에는 통신사 일행에게 귀환 의사를 보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귀국을 포기하거나 귀국 권유에 응하지 않는 경우가 후반으로 갈수록 증가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우선 일본에서의 생활이 장기화되면서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경제 기반을 확보한 사람들이 증가했다. 또 너무 유년기에 일본에 연행된 사람들은 고향과 가족에 관한 기억이 없어 조선에 돌아가더라도 연고 부재의 상태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부담이 따랐을 것이다. 일본 사회에의 정주를 선택하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다. 또 귀국 후 조선 정부의 피로인 대우 문제가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피로인 중에 ‘본토로 돌아가도 전혀 이득이 없다’면서 동료 피로인의 송환을 방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또한 귀국한 피로인에 대한 조선 정부의 대응에 주목한 연구결과도 있다.
당초 그들에게 약속된 면죄(일본 측의 포로가 된 죄를 용서하는 것), 免役, 免賤, 復戶(충신, 효자, 열녀에 대한 면세) 등의 특전 여부가 실제로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지 의심스러우며, 통신사가 송환한 피로인들을 부산 근처에 놔두고 가버린 사례가 있기 때문에 귀국 후 피로인 개개의 추적 조사가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피로인 송환제도와 더불어 귀국 후 피로인의 실태에 관한 좀 더 구체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피로인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피로인의 연령대 내지 남녀 비율은 어떠했을까. 피로인은 청장년층 남성과 여성, 그리고 미성년자가 주를 이루었다. 청장년층 남성과 여성, 미성년자는 노동력으로써 상품가치가 높고 장기적으로 활용 가능한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일본 지역은 아니지만 가가번(加賀藩, 현 이시가와현) 지역에서 피로인으로 보이는 조선계 주민 13명 가운데 적어도 5명이 10세 이하였다. 이처럼 피로인에서 어린이가 차지하는 수적 비율이 높은 이유는 성인에 비해 물리적 반항이 취약하고 도주할 줄 모르며 잘 성장하면 성별 관계없이 장기간 노동력이나 기술노예로 활용가치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 여성의 경우 납치와 연행이 남성보다는 상대적으로 용이했을 테고, 일본에서는 주로 가내 노예인력에 충당되었다.
피로인을 출신 지역별로 보았을 때, 태반이 경상도와 전라도 출신이었다. 이는 일본군의 민간인 생포, 일본 상인들의 조선인 납치 등이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주로 행해졌기 때문이다. 한성을 함락시킨 후 그곳에 체류하는 기간 중에도 일본군은 비전투원인 양반층 인사나 여성을 약탈 대상으로 삼았고, 사행록에 의하면 특히 여성의 경우 양반 가문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일본에 연행된 조선인들은 인신매매에 의한 永代奉公(종신 하인)이나 유모와 같은 피고용인으로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승려, 醫者, 儒者, 상인, 다이묘의 부하(家來)나 侍從, 도공으로 자립 생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비록 조선인의 상당수가 노예로 끌려와 일본인 주인의 감시 하에 있기는 했지만 비교적 조기에 노예의 지위에서 자립하는 예가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이 일본 사회에서 다양한 지위를 획득하며 자립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로 당시 일본 사회의 노예 개념이 지적되기도 한다. 즉 일본의 인신매매는 그 인신에 대한 지배권의 종신(또는 有期的) 양도의 형식으로, 실질적인 奉公관계를 설정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일본인은 그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여겨서 서민층에서는 그들을 양자로 삼거나 자신의 자식이나 친척과 결혼시키기도 했다. 또한 노예가 획득한 모든 물건은 노예 본인의 소유가 되며 그것을 자유롭게 처분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 과정에서 조선인은 일본인과 통혼하거나 주인의 양자가 됨으로써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여성의 경우는 도요토미(豊臣), 도쿠가와(德川) 가문을 비롯한 다이묘 가문, 하타모토(旗本), 번사(藩士)의 아내가 되거나 시녀가 되는 사례가 많았다.
피로인 연구와 관련해 남은 과제
일각에서는 농업 노동력으로 투입되기보다는 농업 이외에 전문적인 능력을 요하는 업종에 종사하는 조선인들의 예가 다수 확인되고 있는 점에 근거하여, 피로 조선인의 대부분이 직능적인 집단으로 조카마치(城下町) 등의 도시적 환경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설령 농촌의 대체 노동력으로서 경작에 투입된 경우에도 村請制度(모든 과역을 촌 단위로 부담하는 제도)의 일단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일시적, 보조적인 노동력으로 기능했다고 보는 주장이다. 다만 이같은 견해는 일본에 연행된 많은 조선인들이 각각의 다이묘 영국에서 사역되었다는 내용의 사료가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점을 근거로 한다. 한편 피로인의 납치 원인과 관련하여 조선 침략에 참가한 각 다이묘들이 조선인을 납치하여 결손된 군사력을 보강하려 했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 일본 측이 군사력 확보를 목적으로 조선인을 납치했다는 주장이다.
사츠마번의 조선인 집주촌과 같은 특수한 예를 제외하고 피로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조선인 집단거주지는 시간이 경과하면서 현지 일본 사회에 동화되어 집단거주지의 민족적 특성을 추출해내기 어렵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이러한 연구 상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조선인이 거주한 지역의 번정(藩政) 사료를 면밀하게 검토하여 그들에 대한 번 권력의 정책을 추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