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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지나친 내셔널리즘을 경계하고
  • 한석정(동아대 총장)

한석정 동아대 총장

 

 

2016년 동북아역사재단이 설립 10주년을 맞았다. 동북아역사재단 뉴스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재단의 활동성과를 점검하고, 재단의 발전을 위한 고언을 듣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번 호에는 재단 자문위원이자 동아대 총장을 역임하고 있는 한석정 총장에게 만주 연구를 비롯해

한국과 일본의 정치 및 외교 관계를 전망하고, 향후 재단의 발전 방향에 관한 조언을 듣는다.

     

한석정 동아대 총장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풀브라이트 재단 지원으로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어바인대 강의교수, 교토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日文硏)와 싱가포르 국립대 아시아연구소(ARI)의 외국인 연구원을 지냈다.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교무처장과 부총장을 거쳐 현재 15대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만주국 건국의 재해석모던 만주등이, 옮긴 책으로 화려한 군주, 주권과 순수성이 있다.

     

     

Q. 총장 취임 이후 여러 가지로 바쁘시리라 생각됩니다만, 근황이 어떠신가요? 늦게 시작하신 취미활동이 권투라고 들었는데, 요즘도 하고 계신지요?

     

한석정 제가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고, 사실 저는 어릴 때 공부만 하는 약골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늘 강인한 육체에 대한 열망이 있었지요. 그러다가 나이 사십이 넘어 시작한 권투는 그만 둘 이유를 찾자면 100가지도 넘을 것 같아서 오늘 빠지면 끝이다라는 마음으로 계속 도장에 나가다 보니 오늘날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냥 나가서 운동만 한 건 아니고 시합도 세 차례, 그중 두 차례는 나이까지 속이고 나갔습니다. 웰터급으로 출전해 판정패했지만 KO 당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던 경험을 나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죠. 시니어대회 1차전에서는 산악가이드와 경기를 했는데, 체중 조절에 실패한 나머지 정신력으로 버티며 시합을 마쳤던 기억이 나네요. 가족들한테는 걱정할까봐 알리지도 않고, 시합 후 멍든 눈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쓰고 강의실에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1주일에 한 번쯤 도장에 나가는데, 총장 취임 후로는 그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30년 가까이 몸담아 온 동아대에서 올해 8월 총장에 취임했는데, 요즘 사립대 총장이라는 자리가 경영자 마인드가 필요한 때라 투자와 후원 유치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Q. 처음 국문학을 전공하셨다가 이후 사회학을 연구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회학 이후 특별히 만주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으신가요?

     

한석정 제가 스무 살 시절에 방황을 좀 했습니다. 맨 먼저 서울대 치의예과에 입학했다가 공부를 안 해서 낙제하고, 재수·삼수를 거쳐 다시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한 뒤로도 공부를 소홀히 해서 국문학과로 전과가 되었지요. 어떻게 들으면 암울한 이야기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 얼떨결에 문학을 공부하고 글을 쓴 것이 오늘날 내 학문 연구의 원천이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부를 졸업한 후에는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 생활을 잠깐 했는데, 마침 1980서울의 봄을 목격하게 되었죠. 이후에는 기자생활을 계속할 수 없을 것 같아 평소 관심을 가졌던 사회학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몇 년 후 시카고대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사회학 연구는 지나치게 수치적으로 계량화되어 있다는 생각에 고민하다가, 우연히 역사사회학 강의를 듣고 제 적성에 딱 맞는 연구 분야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사회학은 문학적 요소를 많이 가진 학문인데, 이후 졸업 논문 연구 주제로 근대 중국을 다뤄볼까 고민하다가 만주국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Q. 만주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연구가 쉽지 않으셨을 것 같은데, 어떤 점에 매력을 느끼셨나요? 혹 어려운 점은 없으셨는지요?

     

한석정 나는 만주가 그동안 학문 연구에서 가려졌던 이유를 두 가지로 보는데, 하나는 대부분의 학문이 국가를 기준으로 주제를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만주국은 아시다시피 1932~1945년 일본이 중국 둥베이 지방에 세웠다가 불과 10여 년 만에 망한 나라죠. 그래서 이미 사라져 버린, 그것도 존속 기간이 짧았던 나라에 대한 연구가 뭐 그리 필요하냐는 시선이 많았습니다. 일본사나 중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그저 학문적 변두리였던 것이죠. 또 하나는 만주국의 정체성 문제인데,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괴뢰국혹은 식민지라는 부정적·저항적 이미지가 컸기 때문에 관련 연구도 거의 없었지만, 있다 해도 다양한 시각과 관점에서 이루어진 연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사회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만주는 굉장히 흥미로운 나라였어요. ‘국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본다면, 만주는 메이지 유신과 타이완-조선의 식민지 건설을 경험한 일본 제국주의가 나름의 노하우를 갖고 만든 국가거든요. 아울러 하나의 국가가 세워지고 발전하면서, 멸망하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들여다 볼 수 있는 나라이기도 하고요.

연구를 하는 동안 특별히 어려웠던 건 아무래도 관련 자료를 구하는 일이었지만 그건 어느 연구나 마찬가지인 것이고, 개인적으로는 만주국을 연구하는 사람을 보는 주변의 내셔널리즘적 시선이랄까? 그런 게 어렵고 아쉬웠던 것 같네요.

     

Q. 최근 발간하신 책 만주 모던을 보면 196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이 1930년대 만주국 체제에 연원이 있다고 주장하셨는데, 어떤 면에서 그런 생각을 하셨는지요?

     

한석정  만주 모던은 제가 10년 전부터 기획하고 준비해서 쓴 책인데, 마침 작년이 안식년이어서 1년 정도 싱가폴과 일본에 체류하며 발간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 책에서도 언급했던 내용이지만, 만주는 전후 동아시아 체제의 블랙박스같은 나라예요. 중국 내 소수세력이던 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결정적으로 승리하기 시작한 전투가 만주지역에서부터 비롯되었고, 일본이 만주에 건설한 거대 중화학단지가 현대 중국 중화학공업의 기반이 되었거든요. 일본 입장에서 보면 만주를 경영하던 이른바 만주 파벌의 핵심 인물 중 하나가 현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인데, 이들이 결국 전후 일본의 보수세력을 일으킨 자민당의 기둥 역할을 했죠. 또 한국은 김일성과 박정희가 만주에서 크고 자랐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했고, 박정희는 만주국군장교로 있었는데 결국 두 사람이 이후 남북한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을 때, 젊은 시절 그들이 만주에서 보고 배운 것들을 다양한 경로로 실현시켜 나갔거든요. 만주국은 국민들의 충성을 유도하기 위해 당시 아시아에서는 거의 사라져 가던 유교를 숭상했고 연 4~50회씩 군중대회를 개최했는데, 이런 점은 김일성 체제에서도 나타났죠. 남한의 경우는 우선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해 관동군 청년장교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사건이 박정희 정권의 집권 과정과 비슷하고, 무엇보다 1960년대 국가가 주도한 통제 경제를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루어갔다는 점이 큰 영향이었다고 봅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던가, 울산 대규모 공단 조성, 사회동원 등은 다소 변형된 형태이기는 했으나 만주국을 모티브로 한 것이라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Q. 만주는 한반도에 인접한 지역으로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관련이 깊습니다. 만일 한반도가 통일이 된다면 중국의 동북지역은 우리나라에 어떻게 작용하고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한석정  1930~40년 만주는 조선인들에게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1945년 만주에 거주한 조선인이 200만이었는데, 이는 당시 전체 조선 인구의 1/10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특히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 중에는 가난한 농민과 조선에서 입신양명의 기회를 얻지 못한 고학력 엘리트가 많았는데, 이들 중엔 유진오, 백석, 유치환 같은 유명한 문인과 김성태 같은 음악가도 있었습니다. 흔히 만주가 항일운동의 성지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1910년대까지의 이야기고, 1930년대에는 사실상 항일운동이 쉽지 않았습니다. 1930년대에는 영남지방에 큰 물난리가 여러 번 나서 수십만 명의 이재민이 만주로 대규모 이민을 갔을 만큼 역사적으로 관련이 깊은 지역이죠.

·북통일이 언제 될지는 모르겠지만, 중국과 일본이 진정으로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는 않을 거라고 봅니다. 일본은 현재 인구가 12천만인데, ·북한이 통일되어 7천만 인구가 경제 성장을 해 나간다면 자신들에게 위협적 존재로 느낄 것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남북이 통일되려면 중·일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주변국의 우려를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는 현재 사드 배치 논란에서도 볼 수 있듯이, 통일 후 바로 미국과 군사적 대치가 가능한 상황이 오기에 우려가 클 것입니다. 또 중국 정부가 조선족의 정체성을 의심할 가능성도 있죠. 하지만 긴장보다는 공존과 화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삼성전자가 중국 시안에 반도체 공장을 세운 것처럼 우리가 연변지역에 경제적 투자를 확대해 양국 간 완충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한석정 동아대 총장


Q. 교토 국제일본문화센터 연구원으로도 계셨는데, 근대 일본의 내셔널리즘이 현대 일본 사회에 준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또 최근 한·일관계가 좋지 않은데, 역사갈등 해소를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한석정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자국의 근대화와 부국강병, 해외 팽창의 원천이었습니다. 하지만 패전 후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테크노내셔널리즘(Techno-nationalism)’, 즉 기술 개발을 통해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이른바 기술민족주의로 변형되어 나타나죠. 그러다가 최근 아베 정권이 일본을 전쟁 가능한 나라로 되돌리려 하면서, 본래의 내셔널리즘이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오는 중이라고 봐야합니다. 그러나 제가 한 2년 정도 일본에 있으면서 경험한 바로는, 전후 70년간 일본인들이 배운 민주주의·자유주의 교육과 두텁게 형성된 일본의 중산층이 어느 정도 일본 사회의 중심을 잡아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중산층이 두텁다는 것은 다시 말해 국민들이 정치인의 선동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거든요. 따라서 한·일관계도 이러한 점을 잘 인식해서 일본인 전체를 적()으로 몰기보다 지속적으로 교류와 협력을 해 나가야 합니다. 연구소 간 학술교류도 활발하게 확대하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관련 연구를 축적하도록 격려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Q. 재단이 설립 10주년을 맞았습니다. 2013년부터 자문위원으로 재단 활동에 참여하고 계신데, 그간 가장 인상적으로 보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울러 재단 발전을 위한 조언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석정 예전부터 중국의 중앙연구원이나 대만의 국립연구소 같은 기관이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토의 국제일본문화센터도 그런 분야별 박사급 전문 연구자들이 많은 곳이고요. ··일 모두 장기적으로 동아시아 전문 연구자들을 육성하고 연구를 축적하는 게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동북아역사재단도 처음에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되었지만, 그 설립 취지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현재 많은 동아시아 연구자들을 수용하는 기관이 되었다는 사실에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재단 같은 연구소가 더 생기고 연구 축적도 많아져야 국력이 커질 테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아직 재단의 연구가 양적인 측면에서 중국에 미치지 못하고 질적인 면에서 일본에 부족하다고 보는데, 이는 연구자들의 자율적 연구문화가 아직 활성화되지 못한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요즘 같은 글로벌시대에 지나치게 내셔널리즘을 강조하거나 국가가 역사 연구에 개입하는 일이 벌어져서는 곤란하겠죠. 학자·연구자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