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2월 11일, 차가운 새벽 공기를 가르고 가마 두 대가 분주히 정동 고개를 향했다. 모두 잠든 고요한 시각, 경복궁을 빠져나온 가마에는 궁녀 두 명과 그 뒤에 숨은 고종, 세자가 타고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가마가 도착한 곳은 정동의 언덕 위 러시아공사관 건물이었다. 그때부터 1년을 넘게 그곳에서 지내리라는 것을, 당시 고종은 짐작하고 있었을까.
1895년 을미사변을 겪은 고종은 신변을 위협받으며 불안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당시 친일파 김홍집 내각은 태양력 사용, 군제 개혁, 단발령 실시 등 급진 개혁을 진행하는 상황이었고, 이에 반일감정이 극에 달한 국민들은 의병항쟁을 일으켰다. 결국 고종은 이범진, 이완용 등 당시 조선 내 친러파 세력을 비롯해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은밀히 협의한 끝에, 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에서 지내기로 하였다.
아관파천. 러시아공사관을 뜻하는 '아관(俄館)'에 임금이 난리를 피해 도성을 떠난다는 '파천(播遷)'이 더해진 말이다. 한 나라 임금이 자국 내 외국 공사관에서 지내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현실이 되면서 당장 일본과 친일세력이 커지는 것은 막는 듯했다. 하지만 내정이 러시아 고문들 손에 좌우되고, 삼림과 광산 채벌권, 철도부설권 등 여러 국책사업의 이권이 러시아와 미국, 프랑스 등에 헐값으로 넘어간 상황을 볼 때 이는 외세 침탈이 또 다른 형태로 시작된 것을 보여준다.
러시아공사관은 조러 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1885년에 짓기 시작하여 1890년 준공한 건물이다. 지하 1층, 지상 2층과 3층 탑부로 이뤄진 석재와 벽돌식 건물로, 1883년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여러 근대 건축물을 남긴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하였다. 초가와 기와지붕 건물들 사이로 우뚝 솟은 이 르네상스 양식 건물 탑에 오르면 당시 조선 궁궐과 사대문 안이 다 내려다 보였을 것이다.
1897년 2월 고종이 1년간 아관파천 후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고도 한동안 권력 중심에 있던 친러내각과 러시아공사는 1904년 러일전쟁 발발 후 일본이 승리하며 위세가 급격히 추락했다. 이후 러시아혁명 등으로 자진 폐쇄, 소비에트 총영사관으로 쓰이는 등 부침을 거듭하다 한국전쟁 때는 건물 대부분이 파괴되기에 이른다.
정부는 러시아공사관을 1969년 서울시 향토문화재 제2호로 지정 고시하고, 1973년 남아있는 전망탑을 중심으로 복원과 보수 공사를 하였으며, 1977년 사적 제253호 '구 러시아공사관'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근대 역사 유적지 중 암울한 기억을 품은 곳이 어디 이곳 뿐이겠는가마는, 당시 아관파천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고종의 심정과 그럼에도 온몸으로 국권피탈의 아픔을 감당해야 했던 백성들이 떠올라 찬바람이 더욱 춥게만 느껴지는 유적지다.
참고 자료 : 문화콘텐츠닷컴 - 러시아공사관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
독립기념관 《서울 독립운동 사적지》 - 옛 러시아공사관사
http://sajeok.i815.or.kr/ebook/ebookh01/book.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