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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사와
인터뷰
역사, 기억과 기념의 맥락을 생각함
  • 글 이강래 (전남대 교수, 재단 자문위원)

사람마다 병신년 새해를 대망할 까닭이 적실했을 것이나, 역사학자에게 지난해와 새해는 크게 분별될 단서가 없어 보인다. 우선 역사 교과서 발행 방식에서 비롯한 갈등은 전 시민적 전선을 이루어 서로 가차 없이 할퀴는 지경을 거쳐 의연히 내연하고 있으며, 언제라도 학술적이거나 학술외적 계기를 만나 분출할 태세다. 그런가 하면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백제 역사 유적 지구'에 정작 한성시대 백제의 수도였던 서울이 빠진 것과, 이때 함께 등재된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이 사실상 침략전쟁을 위한 군수산업 시설임에도 그곳에 서린 수만 명 '조선인 강제노역'의 참혹상에 대한 정당한 역사적 성찰이 방기되고 있는 것도, 현하 역사학계가 감당해야 할 주요 숙제들의 연원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난 세밑에 전해진 일본군'위안부' 협상 혹은 합의는 당국자들의 언명이나 희망과는 달리 두고두고 가장 치열한 역사적 사건이 되고 말 것임을 예감한다. 역사는 과거의 경험에 관한 기억이자 기록인 한편, 그 가운데 어떤 사실이나 국면들은 구성원들 사이에 역사적 표상으로서 널리 공유되고 오래도록 기념된다. 과연 '무엇을 어떻게' 기록하고 또 기념할 것인가. 이 질문과 관련하여 평범하지만 간과하기 쉬운 전제는, 역사의 진실과 역사의 학문적 근거가 한낱 정쟁이나 협상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며,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이미 끝나버린 (것처럼 보이는) 사태'는 대개 어떤 형태의 긴밀한 의미 관계에서 연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출범 10주년을 맞이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지향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재단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안이 발의된 2005년 즈음의 역사적 사태와 그에 대한 인식이 재단의 본질과 토대를 상당부분 규정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일 간 기억과 기념의 어긋남

환기하건대, 우리 정부와 일본은 2005년을 '한・일 우정의 해' 로 선포하고, 국교 정상화 40주년을 기념하여 양국민의 상호이해와 우정을 더욱 깊게 하자 했다. 그러나 새해 벽두부터 일본의 새 교과서들에는 "일본의 고유 영토"인 독도를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식의 일방적이고 왜곡된 내용 기술이 속출했으며, 시마네현(島根縣) 의회는 2월 22일을 '다케시마의 날'로 선포했다. 정확히 100년 전인 1905년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발하여 독도를 저들의 영토로 편입했던 바로 그날이다. 여순항에 있던 러시아 수비대가 일제에 항복한 두 달 뒤요, 러시아의 발틱 함대가 격파당하기 석 달 전 일이다. 그리고 그해 11월 일제는 '을사늑약'을 강행했다. 그러므로 독도의 강탈은 주권 강탈의 신호탄이었으며, 독도의 훼절은 민족 유린의 단초였던 것이다.

이처럼 재단의 태동기에 우리 사회가 백 년 전 '을사늑약'을 되뇌거나, '광복 60주년'을 맞아 '갈등에서 통합으로' '분열에서 화해로'와 같은 구두선이 어지러웠던 반면, 일본 전역에는 이른바 '일로전쟁(日露戰爭) 승리 백주년' 기념 현수막이 물결쳤다는 사실은 예리한 각성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그와 함께 2005년이 을유년이라, 120년 전 을유년(1885)에 조선과 청이 '백두산정계비'를 근거로 감계(勘界)회담을 했다가 결렬되었던 일이나, 같은 해 남쪽에서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던 일이 국가 간 영토 갈등의 사례로 각별하게 거론되기도 했다. 다만 그것들은 국교 정상화 40주년을 공유하자 한 한국과 일본 사이에 기억과 기념의 맥락이 얼마나 비틀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충격적 경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쩌면 1965년 당시 한일협정을 '제2의 을사조약'으로 규정하고 이른바 '굴욕외교 반대투쟁'을 벌인 시민과 학생들의 진단이,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예컨대 네 컷짜리 시사만화로 대변된 그들의 통찰은 이렇게 형상화되었다. 먼저 한・일 당국자의 맞잡은 손이 있다. 그 다음 기모노 차림의 일본 관광객이 부산에 발을 디딘다. 짐작하듯이 그 다음 컷에는 서류 가방을 든 비즈니스맨이 들어온다. 놀랍게도 마지막 칸에는 일본의 탱크가 부산에 상륙한다. 50년 전 이 섬뜩한 예단은 이미 20년 전 일본 해상자위대 소속 군함 두척이 패전 후 처음으로 부산에 입항함으로써 징험되었다. 이후 일본 자위대 함정의 출입은 지난해 광복 및 해군 창설 70주년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대한민국 해군 관함식'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독도는 100년이 지나도록 이른바 한・일간 '중간수역'의 파랑에 묶여 미완의 광복을 고단하게 증언하고 있다.

문제의 본질은 끝내 우리 자신이다

재단이 걸어온 10년의 마지막에 조우한 일본군'위안부' 문제 협상의 함의는 독도보다 훨씬 더 일상적이고 예민한 반면, 가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피해 집단이 감내할 모욕과 고통의 진원으로 전화할 조짐이 깊어 슬프다. 특히 양 당국자가 강조하는바,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고 불가역적" 해결이란, 정확히 50년 전 한일기본조약 조인과 함께 양국과 양국 국민 간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협정 문구를 떠올리게 한다. 일본은 이를 근거로 이후 50년 동안 어떤 보상 요구도 일관되게 일축해 왔다. 그리고 50년 만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똑같은 논리로 처리한 것이다.

2005년 을유년에 관한 기억과 기념의 어긋남처럼, 2015년 을미년에도 조선의 황후가 처참하게 시해된 1895년 을미사변과 청일전쟁 승리라는 치명적 간극이 있다. 더 나아가 광복 70주년은 저들에게 '대동아전쟁 종전 70주년'이자 집단자위권 행사를 허용하는 안보법안을 통해 70년 만에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된 원년이었다. 일본은 1875년에 조선에 무력 침탈을 한 이후 70년 동안 침략전쟁을 벌였음에도, 패전 후 70년 만에 다시 메이지시대 전쟁 지원시설과 '대화혼(大和魂)'을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그것이 저들의 방식이되, 그러므로 문제의 본질은 끝내 우리 자신이다.

일제가 '여자근로정신대'의 이름으로 무구한 여성들을 착취하고 유린하던 즈음, 뮌헨대에서는 숄(Scholl) 남매가 '백장미(Weiße Rose)'라는 비밀 조직을 결성하여 나치의 폭압에 저항하다가 꽃다운 나이에 처형되었다. 독일을 독일이게 한 이들을 기념하는 조형물이라고는 남매가 체포되었던 본관 중앙홀 귀퉁이에 새겨 넣은 작은 흰 장미 형상이 전부라 한다. 그 앞에는 늘 누군가 가져다 놓은 꽃들이 있고, 뮌헨대 학생들은 백장미의 정신을 일상에서 호흡한다. 만약 저 '평화의 소녀상'의 담담한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불편하다면, 그가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역사적 새해는 아직 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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