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는 고구려의 시작에서 유래하였고, 전성기에서 쇠퇴에 이르는 과정도 고구려사가 전개되는 양상과 맞물려 있다. 백제가 멸망하자 고구려 붕괴도 뒤따랐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등 한국 고대 북방사가 재단의 주 연구 분야라고는 하지만, 백제사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다. 이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는 지난해 12월 10일 "고대 동아시아상의 백제와 중국"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우리 학계 백제사 연구 최고 권위자이자 원로인 양기석 충북대 명예교수를 이성제 고중세연구실장이 만나 백제사 연구 현황과 성과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_ 편집자 주
양기석(梁起錫) 호서문화유산연구원 이사장
현재 발굴조사 전문기관인 호서문화유산연구원에서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한국고대사 중에서 특히 백제사를 전공하였으며, 1981년부터 2013년까지 충북대학교 사범대 역사교육과 교수로 있으면서 충북지역의 지역사에 관해서도 많은 연구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백제의 경제생활》(2005), 《백제 정치사의 전개과정》, 《백제의 국제관계》(2013) 등이 있다.
이성제 현재 충북대학교 교수 시절보다 더 바쁘게 활동하고 계시다.
양기석 2013년에 정년퇴임하고 새로 설립한 발굴 전문 조사기관인 (재)호서문화유산연구원의 이사장을 맡았다. 충북대에 부임한 후 지역 문화유적 지표조사와 발굴에 참여해왔던 것이 인연이 되었다. 정년과 함께 학회활동은 많이 줄었지만 틈틈이 논문과 과제 심사, 시민강좌 강의, 기관 자문회의 등에 참여하는 등 대외 활동을 하고 있다. 아울러 백제사 연구자들과 함께 동북아역사재단 2014년 연구과제인 '중국 정사 동이전 역주사업'에 참여했다. 정년으로 잠시 손을 놓고 있었던 학문을 향한 열정이 되살아나는 기회였다. 설레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이성제 백제의 출발부터 멸망까지 전시대를 시야에 두고 정치사부터 경제사, 지방사, 지역사까지 다루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백제사 전체에서 웅진(熊津)시대에 중심을 두고 연구를 하셨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어떤 연유나 계기가 있었는지요?
양기석 백제 웅진시대(475~538)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71년 공주 무령왕릉 발굴이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공주 무령왕릉 발견은 기록이 아주 많이 부족한 백제사 연구에 돌파구를 열어준 사건이었다. 무령왕에 관해 좀 더 많이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과 무령왕조 기록에는 웅진으로 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백제가 한강 하류유역을 수복하고, 국왕들이 옛 왕도인 한성을 순행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부분이 내게는 퍽 의아했고 호기심이 생겼다. 또 바로 다음 왕인 성왕 때에 백제가 어떻게 그토록 짧은 기간 기사회생하여 중흥을 이룰 수 있었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이런 궁금증과 학문적 관심이 대학원에서 석사학위 논문을 그 주제에 맞춰 준비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백제사 연구자로 입문하게 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이성제 고구려가 남진하면서 백제는 한성(漢城)을 잃고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와 관련, 성왕이 북진에 나서 한강 유역을 되찾기 전 양국 경계를 어디로 봐야 할까?
양기석 알다시피 《삼국사기》 〈지리지 4〉에 나타난 고구려 군현 명칭을 근거로 475년부터 551년까지 한강 하류유역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구려 영역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렇지만 이 견해가 인정받으려면 기사가 쓰인 배경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한강 하류가 내내 고구려 영역이라는 주장과 달리, 나는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 사이에 한 두 차례 강역에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475년부터 5세기 말 백제 동성왕 대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선은 양국의 전투 지점, 성곽 축조 지점, 그리고 고고학적 유물 유적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아산만-직산-진천-세종(부강리 남성골산성)-대전(월평동산성)-괴산-충주(충주고구려비)-단양(단양신라적성비) 선을 유지했다고 본다. 이때 충북 내륙지역은 마치 호로병과 같은 형세를 유지할 정도로 교쟁지역이었다.
그렇지만 6세기 초 무령왕 대에 들어와 백제가 고구려를 상대로 공세를 강화하면서 한강 하류유역으로 일시 진출한 것 같다. 백제와 고구려가 한강 하류유역과 그 북쪽인 임진강과 예성강 일대를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진 것이 근거다. 기사 그대로 믿기에는 다소 과장이 있지만 백제가 종전과는 달리 고구려에 공세를 취해 한강 하류유역 일부 지역으로 진출했다고 보면 좋을 듯하다. 그렇지만 이 지역은 고구려와 백제가 일진일퇴하며 뺏고 뺏기는 전투를 한 지역이기 때문에 백제가 확고하게 그들의 영역으로 삼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다가 성왕 7년(529) 오곡(황해도 서흥) 전투에 패한 것을 계기로 백제가 다시 한강 유역을 상실하면서 두 나라는, 전투 지점인 독산성(예산), 도살성(증평), 금현성(연기) 등에서 보듯이 예산-증평-연기를 잇는 선에서 경계를 유지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 견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무왕 대에 나오는 한성 관련 지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살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성제 고구려사에서는 중국과 북한 나아가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나오는 유적과 유물 자료들이 이 분야에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주고 있다. 이처럼 물질문화와 그것이 소재한 지역의 역사지리를 이해하는 것이 연구에서 점점 더 중요해지는 추세다. 이런 경향과 관련, 백제사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고고학 조사 내용과 역사지리학에서 거둔 성과는 어떤 것이 있을까?
양기석 마한소국에서 출발한 백제가 고대국가로 발전하기까지 과정이나 재지세력의 존재 양태와 성격에 관해서는 대부분 물질자료를 통해 그 면모가 밝혀지고 있다. 주요 유적을 몇몇 소개하면 우선, 한강 하류지역에는 백제의 왕도와 관련 있는 유적 말고도 김포 운양동유적과 인천 운서동유적이 눈길을 끈다. 이 세력집단은 한강 하류유역에 위치하면서 낙랑과 교역하거나 그 이주민들이 유입되면서 한강 하류유역 다른 집단과는 달리 1세기경부터 철기를 제작하여 사용했던 선진세력임이 밝혀졌다. 남양만과 그 주변 일대에는 마하리유적, 당하리유적, 발안리유적, 기안리유적, 요리유적 등 백제시대 마을이나 고분이 분포하고, 그 주변에는 길성리토성과 소근산성과 관련 있는 유적들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요리유적에서 발견한 금동관은 백제 중앙과 지방세력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 자료다. 북한강 유역에는 가평 달전리현리유적, 화천 원천리유적 등이 있다. 특히 원천리유적에서는 주거지와 철기유물을 대량 출토하였는데 재갈, 등자, 교구와 같은 마구가 발견되어 백제가 4세기 무렵 북한강 유역에 진출한 사실을 보여준다. 남한강 유역에는 충주 금릉동유적문성리유적탄금대유적(제철)장미산성 등이 있다.
천안아산지역에는 청당동유적(2세기 후반~3세기 후반)에서 보듯 마한의 영도세력인 목지국이 있던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 세력이 확산되면서 화성리유적(4세기 중후반)과 용원리유적(4세기 중반~6세기 전반)도 중요하다. 아산 갈매리유적에서는 원삼국시대 수혈유구를 비롯해 마한 단계의 것으로 보이는 목책이 나왔다. 천안에서 공주로 넘어가면 웅진천도 이전 것인 수촌리유적이 중요하다. 백제의 대성귀족인 백씨나 목씨 일족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금동관, 중국 도자기와 같은 위세품이 출토되어 5세기 전후 중앙과 공주지역 재지세력의 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이성제 증평(曾坪)을 포함하여 청주지역은 삼국이 서로 차지하기 위해 다투던 중요한 지역으로 안다. 이 지역이 왜 세 나라 간 각축장이 되었는지 요인이 궁금하다.
양기석 청주지역은 서울에서 소백산맥에 난 고갯길인 화령과 추풍령로를 지나 영남이나 호남으로 가는 중부 내륙 주요 길목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호천 주변에 너른 평야가 펼쳐져 있어 용수를 대기가 편리하고 입지조건이 농경생활에 적합하다. 삼국이 이렇게 내륙 교통 요충지이자 경제 기반이 잘 갖춰진 청주지역을 장악하려고 노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백제가 다루왕 대에 낭자곡성(청주)을 개척했다는 기사 이후 바로 백제와 신라가 와산성(보은)과 괴양성(옥천 또는 괴산)에서 뺏고 뺏기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기사가 이어지고 있는 점이 이를 입증한다. 그리고 5세기 후반 백제와 신라 동맹군이 고구려가 남진하자 이에 대항하여 충북지역에서 일진일퇴한 것도 고구려가 두 동맹세력을 단절시키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이성제 한성백제 시기 청주지역 경영은 어떠했나? 이와 관련하여 청주의 재지세력이 남긴 문화 양상도 소개해 달라.
양기석 《삼국사기》 〈백제본기〉 다루왕 36년(63)조를 보면, 백제가 1세기 후반 청주지역에 진출했다고 하였는데 사실 이를 방증하는 고고학 자료는 없다. 청주지역에 백제의 문화요소인 삼족기와 개배, 마구류, 환두대도 등이 출현하는 시기는 4세기 중엽 이후로 이때부터 청주지역이 백제에 편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주성리유적, 신봉동유적, 가경동유적, 산남동유적 등이 이에 해당한다. 그 이전 원삼국시대에는 청주의 재지세력들이 백제보다는 마한의 한 소국으로서 독자성을 추구하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상평리유적, 송대리유적, 송절동유적, 봉명동유적 등이 이에 해당한다.
특히 봉산리유적은 구릉에 조성한 토광묘에서 원삼국시대 유개대부호(토기 종류)와 원저심발형토기가 출토되었고 이어 주구토광묘와 백제 토기가 출토되는 토광묘와 옹관묘, 대형석실묘 등 다양한 묘제들이 분포한다. 평지에서는 원삼국시대 토기 가마와 주거지, 한성백제기 주거지들이 분포할 정도로 한 지역 안에 취락과 분묘 유적이 섞여서 분포하여 읍락 단위 하나를 형성하고 있다. 테크노 단지에서 발굴 조사한 송절동유적 Ⅶ지구에서는 4세기 때 백제 취락들을 확인했다. 500여기가 넘는 주거지와 수혈유구 말고도 제련과 단야, 옥공방 등 각종 생산시설이 복합적으로 분포하는 대규모 도시유적이 존재했음을 확인한 것이다. 청주지역에서 원삼국시대부터 백제시대 신봉동유적 단계에 이르는 재지세력들의 추이를 추적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생각한다.
이성제 30여 년 넘게 역사학자로서 또 교육자로서 활동하셨다. 이제 막 학문이라는 길에 첫 걸음을 내딛었거나 힘든 형편에도 어렵게 연구자의 길을 택한 후학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양기석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목적 달성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은 큰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공부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성과가 생기는 것은 아니고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주위 여건이 어렵더라도 결코 좌절해서는 안 된다. 시류에 영합하고 실익을 좇아 좌고우면해서는 좋은 성과를 이루기 어렵다. 어차피 마음먹고 스스로 선택하여 학문의 길로 들어선 이상 열심히 하는 것 외에 좋은 방도는 없다.
이성제 끝으로 재단 출범 후 직간접으로 재단 사업과 활동에 지지와 성원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 재단이 대외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재단에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다.
양기석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한, 목적이 뚜렷한 연구기관이다. 그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중국과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항하기 위한 학문 논리를 만들어 고구려사 연구 수준 향상과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모두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최근 외풍으로 연구기관으로서 위상이 적지 않게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국책 연구기관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이런 때일수록 스스로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아울러 학문의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관련 학계와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 우리가 외풍에 굴복하여 객관성을 잃어버리면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 왜곡을 어떻게 나무랄 수 있겠는가?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