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대의 구리 생산지였던 아시오동산
일본 도치기(栃木)현에는 한때 일본 구리 생산량의 약 4분의 1을 담당하던 아시오동산(足尾銅山)이 있다. 이 동산은 에도시대부터 개발이 시작되었는데, 이곳에서 생산된 구리가 에도성의 동(銅)기와로 사용되기도 했다. 일본이 근대국가로 전환하던 시기인 1877년에 후루카와 이치베에(古河市兵衛)가 동산을 매입하였고, 근대적 기술의 도입으로 생산량이 계속해서 증가했다. 그리고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시작하고 나서는 많은 조선인들이 이곳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아시오동산은 깊은 산맥 가운데에 위치해 있어서 사람이 많은 관광지는 아니지만, 이곳을 기억하기 위해서 건설된 여러 시설들이 있다. 닛코(日光)시에서는 아시오동산의 세계유산 등재를 시도하고 있으며, 현재 아시오동산은 일본의 세계유산 등재 잠정목록 후보에 등록되어 있다. 아시오동산에 어떤 역사와 이야기, 사람들이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시설들을 방문했다.
아시오동산관광: 역사와 체험
아시오동산은 세 개의 주요 갱도가 연결된 대규모 광산으로, 갱도의 총 길이는 서울과 부산 왕복 거리의 약 1.5배에 해당하는 1,234km에 달한다. 그중 쓰도갱(通洞坑)의 일부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이 ‘아시오동산관광’에 있다. 평소에는 접하기 어려운 ‘토로코(トロッコ)’라고 하는 작은 전차를 타고 갱도에 진입하는 것으로 체험 코스가 시작된다. 갱도 내부에는 에도시대-메이지시대・다이쇼시대-쇼와시대로 이어지는 간략한 전시가 마련되어 있고, 움직이는 인형과 음향 효과를 사용하여 각 시대의 노동현장을 재현하였다. 갱도는 층고가 낮고, 천장과 벽에서 물이 계속 떨어지고 있어서 나름 실감나는 현장이다.
아시오동산관광 갱도 전시: 쇼와시대(1926~1989)의 갱부
비교적 짧은 갱도를 지나오면 작은 전시실에 채굴과 선광에 관한 설명과 더불어 실제 아시오동산에서 채굴된 광석을 관람할 수 있다. 출구에 가까워지면 610년의 광맥 발견부터 시작되는 아시오동산의 연표가 게시되어 있다. 여기에서 조선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1940년 전시체제 중 노동력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를 사용”이라는 문구였다. 그러나 이 한 줄의 설명만으로는 이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동원되었고, 어떤 환경에서 일했는지 알기 어렵다.
아시오동산기념관: 기업을 위한 기념 방식
일본에서 아시오동산은 교과서에 등장할 정도로 나름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그 유명세는 단순히 이곳의 동 생산량이 높았기 때문은 아니다. 일본 최초의 ‘공해사건(아시오광독사건, 足尾鑛毒事件)’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상설 일본사』(야마카와출판사) 교과서에 실린 ‘아시오동산’(287쪽)
아시오동산의 개발은 일본의 급속한 근대화와 맞물려 있다. 그 과정에서 무분별한 벌목이 이루어졌고, 채굴과 제련 과정에서 폐수와 폐석 등 폐기물이 유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890년에 와타라세강(渡良瀬川)에 대홍수가 일어나면서 아시오동산에서 유출된 폐기물로 인한 농작물 피해가 발생했다. 많은 지역민들이 직간접적인 피해를 입었고, 당시 도치기현 국회의원이었던 다나카 쇼조(田中正造)가 제국의회에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사회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896년에는 세 차례의 홍수가 일어나면서, 피해자들이 채굴의 영구 정지를 요구할 정도로 피해가 더욱 심했다. 일본 정부는 광업을 정지하는 명령을 내리는 대신, 예방공사명령을 발령했다. 아시오동산을 운영하던 후루카와 기업은 퇴적장과 정수장 등을 건설하는 등의 조치를 시행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아시오동산 스토리텔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공해문제를 이야기하는 주체는 피해를 입은 지역민들이 될 수도 있고, 문제를 발생시킨 동시에 이를 ‘해결했다’고 말하는 기업이 될 수도 있다. 그중 기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시설을 찾아갔다.
아시오동산기념관 정문
아시오동산을 운영했던 후루카와(古河) 기업은 2025년 8월, 아시오동산기념관을 건립했다. 설립 주체가 기업이라서인지 전시는 창업자인 후루카와 이치베에 개인의 업적과 후루카와 기업의 도전정신, 공해문제 해결 과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의 내용과 분위기는 벽면에 쓰여진 짧은 글에 압축되어 있다.
아시오는 열(熱)의 역사
후루카와 이치베라는 남자가 있었다. 산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품었고, 그를 만난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뜻을 함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광맥을 발견하자 산은 활기를 띠었고, 마을도 탄생했다. 그는 기술 개발에도 투지를 불태웠고,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모두 함께 분발했다. 그의 열정을 잇는 자도 나타났다. 아시오의 산은 아직 식지 않았다. 그 정신은 지혜와 마음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업자인 후루카와 이치베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아시오동산 개발을 추진했고, 그로 인해 공해사건이 발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함께 분발’해서 위기를 극복했다는 서사다. 기념관은 이러한 서사에 매우 충실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그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이 기업에서 아시오동산을 기억하는 방식일 것이다.
아시오조선인강제연행희생자위령비: 기억되어야 할 사람들과 기억하는 사람들
아시오동산을 기억하는 또 다른 시설을 찾아갔다. 아시오동산 관련 지도에는 ‘조선인공양탑’으로 표기되어 있는 곳이며, 정식 명칭은 ‘아시오조선인강제연행희생자위령비’이다. 이 비는 1994년에 일본조선우호도치기현민모임과 도치기현 조선인강제연행진상조사단 등이 중심이 되어 건립하였다. 아시오 마을의 옛 관청 사무소에 남아 있던 당시의 화장 허가서 등을 조사한 결과 조선인 73명(노동자와 가족 포함)의 사망자 명단이 확인되었다. 해당 명단을 기초로 삼아 만든 것이 현재의 위령비다.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아시오동산에는 약 2,416명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다. 이들은 주로 갱내 작업에 투입되었고, 열악한 노동 환경으로 인해 도망치거나 사망한 경우도 다수 확인된다. 특히 위령비 옆에 세워진 희생자 명부판에 따르면 사망자 연령은 0세부터 71세까지로 청장년층의 노동자에 한정되지 않는다. 영유아 사망의 경우 주로 폐렴이나 소화불량 등으로 추정되며, 당시의 열악한 생활 환경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위령비는 일본 최대 동산인 아시오동산에 어김없이 조선인이 존재했고 희생되었음을 보여주는 곳이다. 아시오동산관광, 아시오동산기념관이 번듯하게 갖춰진 시설에서 방문객을 끌어들이며 아시오동산의 ‘빛’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위령비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가능한 언급하고 싶지 않은 곳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위령비 근처에는 위치를 표시하는 표지판 등을 일체 찾아볼 수 없다. 위령비의 존재를 미리 알고 찾아가지 않는 한, 1,234km에 이르는 거대한 동산 안에서 위령비를 찾기는 어렵다.
세 시설의 차이점은 방문객의 연령에서도 드러난다. 아시오동산관광은 체험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단체 초등학생 방문객으로 가득했다. 반면 아시오동산기념관에는 중장년층이 방문하여 잘 정비된 전시의 내용을 꼼꼼하게 읽어보고 있었고, 말 그대로 후루카와 기업을 ‘기념’하는 분위기였다.
위령비 앞에는 누군가가 이곳을 기억하고 다녀갔음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있었다. 종이학과 꽃 포장지, 사람의 손길과 온기가 남아 있었다. 후루카와 기업은 아시오동산 역사의 일부를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강제동원된 조선인을 기억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작년에는 일본 패전 80주년을 맞이하여 기존에 목재로 사용했던 희생자 명부판을 새롭게 교체하였고, 매년 추도식도 이루어지고 있다.
아시오동산을 기억하는 여러 시설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의 존재를 이야기하는 공간은 산 속의 위령비뿐이다. 아시오동산의 역사는 그들의 존재를 제외하고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아시오동산을 온전히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함께 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