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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ISSUE
제국의 중심에서 천황제 타도를 외친 가네코 후미코
  • 배영미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6년 7월 23일,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던 한 일본인 여성이 옥중에서 사망했다. 그의 묘소는 사후 47년이 지난 1973년에 경상북도 문경에 마련되었고, 2018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바로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의 이야기다. 

   가네코 후미코 사진
가네코 후미코(독립기념관 소장)
 
 
영화 <박열>에서 소환된 가네코 후미코
 
2017년,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이 개봉했다. 영화의 주인공은 제목 그대로 독립운동가 박열이다. 그런데 박열을 보러 갔다가 가네코 후미코를 알게 되었다는 관람평이 적지 않았다. 이는 가네코 역을 맡은 배우의 열연 덕분이기도 했겠지만, 박열에 비해 덜 알려진 인물을 접했을 때 대중이 느낀 신선한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포스터
일본에서 개봉된 영화 <박열> 포스터.
제목이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이다.
 

영화 <박열>을 통해 우리는 당시 도쿄를 무대로 활동한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Anarchist)를 만날 수 있다.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뒤 검속된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 등이 일본 천황제와 국가권력의 모순, 일제의 조선 식민 지배와 독립운동 탄압의 폭력성을 폭로하는 장면과 대사는 놀랍다. 
 
특히 ‘파쿠요루’(박열의 일본어식 발음)와의 만남에 설레어 하고 ‘사회주의 빨갱이 새끼, 조선인 쓰레기들은 짓밟아야 한다’며 소란을 피우는 동네 양아치들에게 ‘제국주의 똘마니’라며 어묵탕 국물을 냅다 끼얹어 버리고, 감옥이며 법정이며 할 것 없이 할 말 다 하는 가네코 후미코에게 눈길이 갔다. 
 
가네코는 어떻게 조선인 박열에게 끌리고 사회주의자와 조선인 차별에 분노하며, 그렇게 당당할 수 있었을까. 그를 만나기 위해 문경으로 떠나본다.
 

문경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읽다
 
문경 박열의사기념관에는 가네코의 묘소가 조성되어 있다. 다소 길지만 가네코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글이자 동지들이 남긴 글이기 때문에 묘비명 전체를 소개하고자 한다. 원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읽기 편하도록 현대어로 풀어 옮긴다.
 
묘소제막식 리플렛
가네코 후미코의 묘소와 묘비 제막식 리플릿(박열의사기념관 제공)
 

[가네코 후미코 여사 묘비명]
소백산 조령 기슭 여기 이곳에 여류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여사가 고이 잠들어 있다. 여사는 1904년 1월 25일 일본 야마나시현(山梨縣)에 본적을 두고 요코하마시(橫濱市)에서 태어났다.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 자라난 여사는 한때 고모의 유인으로 한국 땅 부강에서 방랑하였다. 섬세한 감수성과 명철한 두뇌를 가진 여사는 당시 일본 제국의 포학한 침략하에서 도탄에 빠진 한국인의 처참한 모습에 남달리 민감하였다. 고모의 학대에 못 이겨 일본으로 되돌아갈 때는 벌써 여사의 가슴속 깊이 자신의 모국 일본의 부정 불의에 대한 의분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런 여사가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항쟁하는 혁명 투사 박열 선생과 생사를 같이할 동지일 뿐만 아니라 부부로 결합한 것은 필연의 결과다. 흑도회‧흑우회의 맹원으로 활약하던 박열 선생은 여사와 같이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천황을 모살할 계획을 세우고 비밀리에 공작을 펼치던 중, 1922년 4월에 김중한, 니야마 하쓰요(新山初代), 육홍균, 장상중, 한현상, 서동성, 서상경, 정태성, 하세명, 홍진유, 최규종, 구리야마 가즈오(栗原一男), 오가와 다케시(小川式), 노구치 시나니(野口品二) 등과 더불어 혁명결사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하고 『현사회』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며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불령사 맹원 전원이 검거 투옥되었다. 이렇게 검거되어 예심을 받는 과정에서 육홍균 씨 외 13명은 석방되고, 박열 선생과 여사는 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17회의 예심을 거쳐 1926년 2월 26일 제1회 재판이 개정되었으나, 그들의 사상은 추호의 동요 없이 천황 유해론, 약소민족 해방, 한국독립의 정당성, 인간의 자유를 시종일관 주장하였다. 급기야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자 여사는 만세를 외치고 박열 선생은 재판장에게 수고했다며 조소를 지었다.

이 사상의 일관성, 이 태도의 침착성, 이 생사의 초월성은 만세 사상가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같은 해 7월 23일 여사는 수감 중이던 도치기(栃木)형무소에서 의문사로 그 한 많은 일생을 마쳤으니 향년 23세였다. 같은 해 같은 달 여사의 유해는 그 무서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많은 동지와 시숙 박정식 씨 등의 정성으로 본국에 돌아가 묻혔으나 일본 경찰의 날카로운 감시로 봉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50년 세월을 거치는 동안 비바람에 씻기고 깎여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졌다. 이를 안타까이 여겨 동지들은 모든 성의를 모아 유지들의 찬조를 얻어 봉분을 개축하고 묘비를 세워 그 투혼을 영원히 기념하기로 한다.

1973년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 여사 묘비건립준비위원회

 
 
조선으로 간 무호적 소녀, 투명인간 ‘식모’가 되다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묘비에는 1904년)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호적에 오르지 못한 무호적자로,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불안정한 유년기를 보냈다. 1886년 소학교령 제정 이후 일본의 초등교육은 이미 의무교육이었지만, 무호적이었던 가네코는 학교를 제대로 다닐 수 없었다. 가난한 어머니와 친척들의 손에 인신매매 업자에게 팔려 갈 뻔했을 정도였다. 
 
1912년, 아홉 살 때 할머니가 찾아와 가네코를 외조부의 호적에 올리고 조선으로 데려갔다. 이후 가네코는 7년간 충청북도 부강(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당시 청주군 부용면 부강리)에서 할머니, 고모, 고모부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의 삶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가네코가 친손녀라는 사실을 숨긴 채 온갖 집안일을 시키며 식모처럼 대했다.
 
가네코는 가족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까지 했다. 그러다 나이가 찼으니 일본으로 돌아가 결혼을 준비하라는 할머니의 말에 따라 1919년 7년에 걸친 조선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권력과 천황제를 거부하고 자유와 평등을 외치다
 
일본에서의 삶도 녹록지 않았다. 가네코의 아버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경제적으로 완전히 자립하지 못한 딸의 처지를 이용하여 가네코를 억지로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가네코는 이에 순응하지 않고 신문팔이, 식당 종업원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업을 이어가려 하였다. 바로 이 시기 도쿄에서 조선인·일본인 아나키스트들을 만나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다 지진과 학살로 수많은 목숨이 사라진 1923년 9월, 보호검속이라는 명목으로 경찰서로 끌려갔고, 3년 뒤 주검이 되어서야 나왔다.
 
가네코는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혹사당하고 자유를 빼앗기고 착취당했다. 또한 무호적자로서 겪은 고통에 대하여 “일본의 인간도 아닌데 일본의 제도로부터 정신적‧육체적으로 참을 수 없는 학대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생활할 권리를 온전히 평등하게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생각에 조선에서 3·1운동을 보고 들은 경험이 더해지면서 반권력,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인식이 뿌리내렸고, 조선의 독립운동과 저항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함께하게 되었다.
 
그는 “현재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불평등의 정점에 천황 또는 천황제가 있으니, 이를 파괴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고인 신문조서에서는 “국가의 존엄이나 천황의 신성”은 “착각”이고, 천황은 “평등한 인간의 생활을 유린하는 권력이라는 악마의 대표자”이며 “소수 특권 계급자가 자기 배를 채우고자 민중을 기만하기 위해 조종하는 꼭두각시이자 어리석은 괴뢰”에 불과하다고 답했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간이다
 
성차별에 대해서도 단호했다. 한 옥중서신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동일한 전선(戰線)에 서 있는 자들 사이에 무슨 성적 차별이 필요하겠습니까. 성욕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다음에야 여자니 남자니 하는 특수한 자격이 무슨 쓸 데가 있겠습니까. 똑같이 인간이라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 지금 내가 찾고 있는 것은 남자가 아닙니다. 여자도 아닙니다. 인간일 뿐입니다. 나는 인간으로서 살고 있습니다. 나는 이상의 이유에 기초하여 ‘연약한 성을 지닌’ 여성으로 간주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그런 전제 위에서 내게 제공되는 모든 은혜를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상대를 주인으로 간주하여 시중드는 노예, 상대를 노예로 간주하여 딱하게 여기는 주인, 이 둘 모두를 나는 배척합니다. 개인의 가치와 평등한 권리 위에 선 결속 그것만을, 오로지 그것만을 긍정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상호 간의 정당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박열과의 관계에서도 가네코는 주체적이었다. 그는 천황이 필요 없다고 여겼기에 ‘천황제 타도’라는 공동 투쟁을 위한 동지적 결합을 약속한 것이지, 박열에게 동화되었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다. 
 

가네코 후미코가 꿈꾼 세상
 
제국에서 태어났으나 누구보다 강력히 제국의 권력에 저항했던 가네코 후미코, 그녀는 어떤 세상을 그렸을까? 여성 대 남성, 주인 대 노예, 부자 대 빈자, 강자 대 약자, 제국 대 식민지, 권력을 누리는 자 대 권력으로부터 핍박받는 자, 이러한 구분이나 차별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등하게 자유와 권리를 누리며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을 행동할 수 있는 세상. 가네코는 바로 그러한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 아닐까.
 
정작 그의 동반자 박열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1974년 북한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식민 지배와 남북 분단은 공동 투쟁을 약속했던 두 아나키스트를 지금껏 갈라놓고 있다. 
 
오는 7월 23일, 박열의사기념관은 가네코 후미코 100주기 추도식을 개최한다. 그날 그곳에 가면 가네코 후미코가 물어올 것만 같다. 
 
“지금은 평등한 사회가 되었습니까?”
“당신은 하고 싶은 것을 위해 행동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