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우전쟁 속 연해주
현재 한국에서 러시아 연해주로 가는 직항 비행기는 운행이 중단된 상태다. 그러나 인천에서 하얼빈으로, 하얼빈에서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중국을 경유해서 가는 것은 가능하다. 경유 대기 시간을 포함하면 약 9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특이한 점은 필자가 하얼빈에서 탄 새벽 2시 출발 비행기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새벽 5시에 도착했지만, 실제 비행시간은 1시간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잠을 청하려고 했던 필자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중국은 한국보다 1시간 느리고, 러시아는 1시간 빠른 시차 때문에 중국과 러시아는 2시간의 시차가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현재 우크라이나와 전쟁 중이지만, 전쟁지역과 멀리 떨어진 러시아의 동쪽 끝에 위치한 연해주는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다만 유럽풍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는 전체적으로 한산했고, 간혹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을 기리는 패널을 보면서 전쟁의 여파를 간접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생수 1병이 한국 돈으로 1,000원에 달하고, 마트 진열대에는 중국산 콜라와 생활용품이 가득한 모습은 러시아 현지 물자가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수리스크 거리의 추모 패널
연해주와 한국사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는 1860년 군사기지로 출발해 1880년 도시로 성장했고, 1916년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연결되며 러시아 극동의 관문이 되었다. 도시 이름 자체가 ‘동방(vostok)을 지배한다(vladet)’는 뜻이니, 제국의 야망이 이름 속에 그대로 담겨 있는 셈이다. 이곳은 한국사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9세기 후반 두만강을 건넌 조선인들이 이곳에 뿌리를 내렸고, 20세기 초에는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전 머물렀던 곳도, 이상설이 망명정부 수립을 도모하며 활동했던 곳도 연해주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인들이 모여 살던 신한촌이 형성되기도 했다. 1920년 일본군의 잔혹한 학살로 수많은 동포가 희생된 ‘4월 참변’의 비극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안중근 의사 단지동맹비
이러한 관계는 사실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신석기시대에는 동해안을 따라 문화교류가 있었고, 청동기·초기철기시대에는 북옥저가 활동하던 공간이기도 하다. 역사시대에는 발해의 동쪽 영역에 속한 곳이기도 하다.
연해주 출토 신석기시대 토기(극동연방대학교 과학박물관)
연해주 출토 초기철기시대 토기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소 역사학민족학고고학연구소)
연해주에서 만난 발해
발해(698~926)는 고구려 멸망 후 대조영에 의해 건국되어 약 230년간 남쪽의 통일신라와 함께 우리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나라다. 처음에는 진국(振國, 震國)이라고 했다가, 713년 당에 의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된 후 발해(渤海)라는 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발해는 현재의 중국 동북지역, 북한,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걸쳐 분포했다. 이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발해는 5경(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을 두었는데, 이중 러시아 연해주는 동경 용원부(東京 龍原府)에 속하며, 발해 15부 62주 행정구역 중 솔빈부(率濱府), 안변부(安邊府), 정리부(定理府), 염주(鹽州) 등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중에서 염주의 소재지였던 크라스키노 성터는 우리 재단이 러시아와 약 15년간 공동으로 조사한 곳이기도 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서쪽으로 약 280km 떨어진 하산(Khasan) 지구의 바닷가 평원에 위치한다. 발해시기 이곳에서 소금이 생산되었기에 염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은 또한 발해에서 일본으로 사절단을 보내고, 일본에서 온 사절단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추정한다. 그래서 한국, 중국, 일본에서 모두 이 유적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크라스키노 마을을 지나 바닷가 쪽으로 이동하면 저 멀리 낮은 둔덕이 보이는데 바로 크라스키노성의 성벽이다. 과거 발굴조사에서는 성 내부에서 절터, 우물, 주거지, 도로 등이 조사되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덮여 있거나 발굴 구덩이 흔적만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그리 높지 않은 성벽이 잘 남아 있으며, 각 문지에서는 옹성 구조도 확인할 수 있다.
성 남문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멀지 않은 곳에 바닷가 해안선이 펼쳐지고, 바다 너머로 과거 발해 사절단이 출항했다고 하는 포시에트 항구도 눈에 들어온다. 당시 발해인이 왜 이곳에 성을 축조하고 이 지역을 관리 거점으로 삼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크라스키노성 평면(구글어스)
동성벽
연해주 발해 유적 유물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소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
발해 연구의 활성화를 기대하며
연해주의 다른 발해성은 대부분 금(金) 시기의 성벽이 잔존하고 그 하부에서 발해시기 문화층이 확인되어 발해성으로 추정하는 반면, 크라스키노성은 현재 남아 있는 성벽부터 성 내부 문화층까지 모두 발해시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발해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실제로 현재 크라스키노 성터는 중국 발굴팀이 조사 중이고, 일본팀도 부정기적으로 발굴을 한다고 한다.
크라스키노성에서 만난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소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의 겔만(E.I. Gelman)교수는 그간 재단과 함께 크라스키노성을 꾸준히 조사한 덕분에 이 성의 학술적 가치가 빛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성에는 아직 발굴할 곳이 많기에 이후에도 재단과 함께 협력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현재 한국에서 발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중국이나 북한 쪽 자료를 참조해야 하는데,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그 한계를 연해주의 발해 유적과 러시아 연구자와의 협업을 통해 극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