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성들> 연재
역사학의 쓸모: <표현의 미학>
역사학은 전통적으로 과거의 사실을 복원하고 입증하는 ‘실증’의 영역에서 정체성을 찾았다. 사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검증하며 당대의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을 역사학의 역할이라고 정리해 보자. 그러나 누군가가 ‘과거의 사실이 왜 지금 유용한가?’를 묻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심심치 않게 제기되는 이러한 질문들은 역사의 정치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를 내포하기도 한다. 실증된 사실들은 사회와 어떤 방식으로든 접촉하고 있다.
역사와 사회의 접촉은 역사의 ‘쓸모’를 만드는 데 꼭 필요하다. 그 쓸모란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과거의 기록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석되고, 향유되는가에 따라 정해진다.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가르치다’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는 현재, 우리가 역사를 느끼는 방식 또한 이전과는 분명히 다르다. 다시 말해, 실증이 사회적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사실(史實)을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할 것인지에 대한 미학적 고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 재단은 이 과제를 얼마나 의식해 왔을까? 역사 현안을 가운데에 두고 사람들과 호흡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일은 재단의 사회적 쓸모와도 깊이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공공역사(Public History)가 시나브로 당위의 영역이 된 지금, 전문가와 시민을 ‘우리’라는 단위로 묶어낼 수 있는 사회적 실천이야말로 역사적 지식보다 가치가 있다.
재단은 3월부터 만화 〈‘최초’의 여성들〉의 연재를 시작했다. 이 기획이 하나의 사회적 실천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고 어떤 방식으로 독자와 만나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만화라는 표현
만화가 역사라는 소재를 만날 때 발생하는 시너지는 ‘새로움’ 그 자체다. 물론 역사 만화가 낯선 장르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화가 가진 고유한 효과까지 희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만화는 사실 사이의 빈칸을 인물의 내면과 감정으로 채워 넣는 데 효과적인 매체다. 그래서 작가에게는 역사를 단순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만의 감각으로 재구성하는 해석가의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실증과 상상력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새로운’ 생동감을 준다. 긴장과 생동감은 재단과 만화가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작가는 재단이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를 구성하면서도, 기록이 말해주지 않는 인물의 고뇌와 열망까지 그려낸다. 텍스트로만 남아 있던 권기옥의 비행, 강향란의 단발, 강주룡의 농성, 박남옥의 연출, 이태영의 변호, 박에스더의 진찰이 만화로 시각화될 때의 역사는 단순한 정보가 아닌 장면과 감각으로 독자 앞에 나타난다.
무엇보다 이런 접촉은 역사를 학습의 대상에서 경험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만화는 직관적인 매체이기에 독자는 만화의 주인공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역사에 실감을 주고 서사를 채워 넣는 것, 재단이 만화라는 매체를 활용하여 사회적인 실천을 기획하며, 기대했던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6명의 인물을 6명의 작가에게 각각 맡긴 데에도 분명한 의도가 있다. 동일한 역사적 사실이라도 작가의 해석과 상상력에 따라 전혀 다른 결의 작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6인 6색’의 구성은 독자들이 역사를 더욱 다층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이번 연재는 이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기획되었다.
여성이라는 주제
이번 기획의 핵심 키워드는 ‘여성’과 ‘최초’다. 그간의 사학사를 돌아보면, 여성사는 한국근현대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역사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문제의식을 염두에 둘 때, 지금까지의 역사 서술은 국가 간 대립, 남성 중심의 정치사, 독립운동사 등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큰 흐름 속에서 여성이 부수적 존재 혹은 객체로 인식되어 온 것이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어느 시점까지 여성은 남성이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역사에 등장하는 존재였다. 마치 ‘여성, 그들의 사랑과 결혼’, ‘여성, 그들의 직업’과 같은 어떤 책의 목차처럼 말이다.
따라서 여성을 주제로 삼는 일은 소외된 이들을 복권하는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여성사를 통해 우리는 근현대의 시공간 속에서 주체가 형성되고 좌절되는 과정을 가장 세밀하고도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질서와 식민 지배 등의 굴레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 나간 여성들의 이야기에는 인권과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가 넘쳐흐르고 있다. 그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는 일이야말로 역사 현안이 보편을 획득하는 방식이 아닐까.
다시 말해 여성의 서사는 한일 간의 역사 갈등을 ‘국가 대 국가’의 대결 구도에서 인권과 삶의 문제로 확장할 수 있다. 우리가 역사 현안이라고 부르는 일본군‘위안부’ 문제나 강제동원 등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슈화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보편성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다. ‘관계’라는 단어로 치장된 한일 간의 역사 현안에 새롭게 다가가는 마중물의 역할도 여성의 서사라면 가능하다.
역사적 문해력의 씨앗
이번 만화 연재는 역사를 통해 사회적 실천을 수행하려는 우리 재단의 문제의식이 구체화된 결과물이다. 특히 박정애 연구위원은 <최초의 여성들> 기획의 방향 설정에 처음부터 끝까지 깊이 관여했고, 이아리 연구위원, 필자와 함께 작화 감수도 맡고 있다. 세 연구위원이 재단과 작가 사이에 형성된 긴장감과 생동감을 함께 조율하고 있는 셈이다.
이번 연재에는 김소희, 원혜진, 유승하, 고정순, 최호철, 앙꼬 등 6인의 작가가 참여한다. 이들은 각자의 개성과 문제의식을 살려 근현대사의 파고를 넘어야 했던 여성 인물 6명의 생애를 각각 4회 분량의 단편으로 풀어낸다. 하늘을 꿈꾸었던 권기옥, 단발이라는 파격으로 시대에 맞선 강향란, 체공녀로 기록된 노동자 강주룡 등 저마다의 영역에서 ‘최초’라는 수식어를 만들어낸 인물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영웅전이 머물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시대의 한계에 부딪히면서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지금 우리의 모습과 같다.
우리 재단은 만화를 온라인에 게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어 번역도 함께 추진할 계획이다. 이를 통해 외국인 독자들 역시 한국의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 한국이 다루는 역사 현안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또한 단행본 출간과 교육용 자료 활용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이 만화 시리즈가 세대를 아우르는 역사 교육의 교재로도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만화로 만나는 역사가 우리 사회의 역사적 문해력을 높이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공감의 토대를 마련하는 소중한 씨앗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