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지금도 땅을 파고 있다. 그 목적은 단순한 유물 발굴이 아니다. 19세기 말 서구 탐험가들의 조사와 제국주의적 지식 생산에 충격을 받은 이후, 중국은 고고학을 국가 정체성과 문화적 자신감을 구축하는 핵심 도구로 삼아왔다. 오늘날 고고학은 과거를 복원하는 학문을 넘어, 국가 서사를 재구성하는 정치적 의미를 지닌 프로젝트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번에 출간된 『기억의 권력, 유물의 정치: 중국 고고학의 형성과 변용』은 바로 이러한 맥락을 종합적으로 조명한 성과다.
중국의 국가적 의제로서의 고고학
중국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고고학을 국가 차원의 전략적 자원으로 활용해 왔다. 1996~2000년 ‘하상주 단대공정’을 시작으로, 2001년부터 이어졌던 ‘중화문명 탐원공정’, 그리고 2018년에 시작되어 2035년까지 진행될 ‘고고중국’까지 대형 프로젝트가 연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들 사업은 단순한 발굴작업을 넘어 중국 문명의 자생성과 역사적 연속성을 입증하려는 국가 서사 구축의 도구로 작동한다. 특히 ‘고고중국’은 다음 네 영역을 연구 축으로 삼고 있다.
구석기 시대 중국인의 기원과 발전
신석기 시대 문명 출현 전후 각 지역의 문화
청동기 시대 하(夏)·상(商)·주(周)의 청동문명과 초기 왕조 국가
진(秦)·한(漢)에서 명(明)·청(淸)에 이르는 통일 다민족 국가의 형성과 발전
이처럼 고고학은 오늘날 중국에서 역사 인식과 문화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핵심 수단으로 자리 잡았으며, 국가 건설과 문화 주권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학문적·정치적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집권 2기 이후, 고고학을 국가적 의제로 끌어올린다. 그는 2020년과 2023년 두 차례에 걸쳐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에서 고고학을 주제로 ‘집체학습(集體學習)’을 개최하며, ‘중국 특색, 중국 풍격, 중국 기백이 깃든 고고학’을 강조하였다. 이는 고고학이 단순한 학문적 연구를 넘어 국민의 역사 인식과 문화적 자신감을 고취하는 정치적 도구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준다. 현재 중국 고고학은 고대 문명의 기원과 전개를 종합적으로 조명하는 정책적 방향 속에서 연구되고 있으며, 역사학은 물론 인류학, 문화유산 정책과 긴밀히 연결되어 사회문화적 의미를 지닌 국가적 프로젝트로 추진되고 있다.
이 책의 집필 배경과 구성
그렇다면 중국에서 고고학은 어떻게 권력과 이념 속에서 제도화되었고 정치화되어 왔는가? 고고학이 국가적 의제로 부상한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종합적으로 조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 책 『기억의 권력, 유물의 정치: 중국 고고학의 형성과 변용』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제1부 ‘유물의 길, 제국의 눈: 근대 중국 고고학의 형성과 지식의 경계’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 서구 고고학의 유입과 중국 고고학의 형성 과정을 다룬다. 이 부분의 집필에 참여한 이진옥·이현우·이기성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서구 열강과 일본의 탐험가 및 고고학자들이 중국 각지를 조사하고 유물을 반출하며 고고학이 충격적으로 도입되던 시기를 다루었다. 필자와 김정열·홍영미는 당시 이러한 충격 속에서 중국 지식인들이 고고학을 수용하고 근대적 학문으로서 정립해 나가는 과정을 다루었다. 각 연구는 당시 고고학이 민족사 재건과 국가 정체성 형성에 기여한 학문으로 작동했으며, 정치·제도·이념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발전해 왔음을 보여준다.
제2부 ‘혁명의 땅을 파다: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 중국의 고고학 정치’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부터 문화대혁명까지, 소위 ‘개혁개방’ 이전까지의 시기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이 부분의 집필에 참여한 필자는 중국 고고학의 제도화와 정치적 굴절을 살펴보았고, 김정열·김봉근·오병수는 중국 고고학이 과학적 방법론을 수용하고, 국가 주도 민족 서사를 구성해 가는 복합적 과정에서 어떤 이념적 구조와 학문적 실천이 전개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홍영미와 설재희는 중국 고고학이 국가 이념의 실천 장치이자 외교적 도구로 기능했음을 각각 내부 권력 구조와 대외 교류의 관점에서 분석하며, 고고학이 정치적 실천과 지식 생산이 맞물리는 복합적 현장이었음을 드러내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와 국가 권력의 개입 속에서 고고학이 어떤 방식으로 학문적 정체성과 정치적 기능을 수행했는지를 분석한 것이다.
‘기억의 체제’로서의 고고학 인식
이 책은 고고학을 단순한 학문 체계가 아니라 권력과 이념 속에서 끊임없이 변형되는 지식·정치적 실천으로 바라본다. 기존 연구가 주로 유적과 유물에 집중했다면, 이 책은 그 이면에 작용한 지식 권력 구조와 ‘기억의 체제’를 치밀하게 분석하려 시도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결국 고고학은 땅을 파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을 형성하고 권력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과정임을 보여준다.
중국 고고학은 과거를 복원하는 학문을 넘어 현재와 미래를 설계하는 국가적 프로젝트로 자리 잡았다. 이 책은 고고학을 통해 드러나는 중국의 권력과 기억의 정치학을 조명하며, 학문과 정치가 교차하는 지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 결과물이 향후 중국 고고학 연구를 지속적이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기억의 권력, 유물의 정치: 중국 고고학의 형성과 변용』
1908년 막고굴에서 촛불을 켜고 사본을 조사하는 폴 펠리오(왼쪽)와 입수한 사본의 일부(오른쪽)
(출처: International Dunhuang Project)
공・농・병 은허 발굴 현장 참관(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