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타의 첫날-눈, 추위 그리고 지진
지난 11월 초 일본 니가타현(新潟縣) 니가타시와 사도섬을 다녀왔다. 도쿄에서 차로 출발해 니가타시(新潟市)까지는 대략 5시간 정도 걸렸다. 가는 도중에 길이가 11㎞로 ‘일본에서 두 번째로 길다’고 하는 터널을 지나자, 눈이 쌓인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니가타 지역의 차가운 비바람을 맞으니 도쿄보다 훨씬 쌀쌀한 날씨를 체감할 수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쉬려던 순간 건물이 묘하게 삐걱거리며 좌우로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방송에서는 진도 7 이상의 강진이 발생했다며, 이와테, 아오모리, 홋카이도에서 태평양과 접한 연안 저지대 주민들에게 쓰나미 대피 경고 안내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진앙지와는 거리가 있어 숙소에서 별도의 대피 안내는 없었다. 흔들림은 곧 잦아들었다. 니가타 첫째 날의 기억은 눈, 추위 그리고 지진으로 인한 건물의 흔들림이다.
여객선을 타고 사도섬으로
니가타시 역사박물관
이튿날 오전에는 니가타시 역사박물관에 먼저 들렀다. 1층 기획전은 쇼와(昭和) 시대 영화관에서 홍보용 영화 포스터를 다양하게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2층은 니가타현의 역사를 소개하는 역사 유물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니가타현의 개항과 관련된 근현대사 전시 관련 유물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박물관 출입구 앞쪽에 창고 비슷한 건물로 보인 구 니가타 관세청사가 남아 있어서 개항장 관련 전시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지만 2층 전시관을 한 바퀴 둘러본 결과 개항 이후의 근현대사 전시가 미약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니가타현의 지역사 전반을 기술한 현사(縣史)와 부속 자료, 보고서, 연속간행물 등 참고도서는 1층 자료실에 있었다.
박물관 관람을 마친 후 여객선이 있는 부두로 이동했다. 니가타항에서 사도섬의 료쓰항(兩津港)까지는 페리로 2시간가량 바다를 건너가야 했다. 니가타시에서 바다 너머 사도섬의 전체 윤곽이 보이기는 했지만, 2시간 넘게 배를 타고 가는 것은 역시 다른 문제였다. 배 안에는 ‘사도섬의 금광’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지 1주년이 되었다는 홍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배가 료쓰항에 도착한 뒤 차로 40분가량 섬의 반대편으로 이동하여 사도박물관(佐渡博物館)에 도착했다. 1957년에 지어진 건물이라 그런지 오래된 느낌이 강했다. 박물관 2층에 사도섬의 금은광 개발과 관련된 각종 유물과 그림, 패널 전시가 있었다. 전시는 에도 시대 사도 광산 개발이 막부 재정을 뒷받침했고, 최대 전성기에는 인구 5만 명이 광산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소개하였다. 주로 막부 직할령으로 사도부교소(佐渡奉行所)가 설치되어 있던 시기를 중심으로 전시를 구성하고 있었다.
1852년 2월, 23세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사도섬에 12일 동안 체류하며 쓰루시(鶴子) 광산 내부의 작업 현장을 둘러보고 갔다는 기사가 그의 동북 지역 일대 유람 동선과 함께 소개되어 있었다. 다만 근현대 시기 사도섬의 광산 운영과 관련된 역사는 아이카와(相川) 광산의 제실재산(帝室財産) 이전(1889), 미쓰비시 합자회사(三菱合資會社)로의 불하(1896), 미쓰비시 사도광산의 조업 축소(1952) 정도만 연표에 기재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사도섬의 근현대 역사에 대한 소개는 소략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오니 로비에 야간 조명을 받은 기타자와부유선광장(北澤浮遊選鑛場)의 폐허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선광장을 근대산업 유적의 하나이자 관광 명소로 홍보하고, 영화 촬영 같은 이벤트에 활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타자와부유선광장. 1938년부터 1953년까지 월간 5만 톤의 광석 처리 능력을 갖추고 가동하던 시설.
이 앞에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이 있다.
가타자와부유선광장 홍보 포스터
한국 관련 역사가 소략한 세계유산 ‘사도섬의 금광’ 현장 전시
사도광산 ‘도유의 균열(道遊の割戶)’. 도유코를 보고 밖으로 나오면 볼 수 있다.
다음 날 아침 사도광산으로 향했다. 세계유산 등재 시설은 아니지만 1930년대에 가동했던 오다테 수직갱(大立竪坑)은 천막을 치고 보존 수리 중이었다. 소다유코(宗太夫坑)가 있는 갱내 시설은 전체 길이가 400m로, 에도시대 사도 광산 갱부들의 채굴 작업을 패널 설명과 동작을 연출하는 실물 크기의 인형을 이용해 잘 보여주고 있었다. 갱내 패널에는 에도시대부터 쇼와 시대에 이르기까지 생산된 금의 산출량을 그래프로 보여준다. 하지만 사도광산 관련 연표는 17세기에서 시작해 광산이 미쓰비시에 불하되는 1896년에서 멈췄다. 그 이후에는 만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1945), 재벌 해체(1945)와 일본국 헌법 공포(1946) 정도만 언급했을 뿐이다.
소다유코를 둘러보고 도유코로 가는 길에는 에도 시대 사도광산에서 활용한 각종 금 생산도구와 기술, ‘사도고판(佐渡小判)’이라 불리던 화폐의 연대별 실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실에는 24K, 12.5㎏짜리 금괴 실물을 직접 만져볼 수 있었다. 다만 전시는 에도 시대의 금광 운영에 국한되어 있었고, 근대 이후는 다루고 있지 않았다. 관광 비수기라서 그런지 광산 유적을 둘러보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12월 초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하면서 기념품 가게는 상품을 다 치워 한산한 상태였다.
도유코(道遊坑)는 전체 길이가 1.7㎞로 메이지 시기부터 1989년까지 100년에 걸쳐 채굴에 이용하던 갱도다. 소다유코보다는 갱도가 널찍했고, 채굴 관련 운반 시설인 ‘토롯코’가 왕래할 수 있는 궤도가 갱도 바닥에 깔려 있었다. 안내판에는 메이지 시기 들어서 서양의 근대 기술을 도입하여 1875년부터 오다테 수직갱을 캐기 시작한 것과 1890년 일본 최초의 광산학교 설립 등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도유코의 일부 공간은 현재 현지에서 제조한 주류숙성 보관 창고로 활용하고 있었다. 도유코 갱도를 나오면 근대 시기 채굴 기계와 도구를 정비하던 수선소가 나온다. 이곳에 설치된 근현대 연표를 살펴보면 1939년 “노무동원 계획으로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모집이 시작되다”, 1945년 9월 “패전으로 인하여 조선인 노동자가 귀국”이라고 두 줄의 서술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줄의 서술만으로는 1939~1945년까지 사도광산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가 광산에서 무슨 일을 하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강제동원’이 빠진 키라리움 사도와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키라리움 사도는 사도시에서 현지 안내의 관문 역할을 하도록 운영하는 시설로, 2019년 4월 개관하였다. 이곳에서는 에도 시대 사도섬에 파견된 막부 관리가 사도부교소를 중심으로 사금 채취와 광산 채굴, 금 주조 등을 관리하는 과정을 드라마 형식의 영상 세 편으로 만들어 큰 화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상은 ‘대방류(大流し)’라 불리는 니시미카와 사금산(西三川砂金山)에서 이루어지는 사금 채취 방식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출하고 있었다. ‘근대 광산의 개막’ 영상은 에도 시대보다는 확실히 짧았다. 영상은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시대까지 광산 생산량이 어느 정도에 도달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데 그쳤고, 여기서 전쟁 시기의 강제동원이 언급될 여지는 없었다. 영상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곳에는 사도광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등재될 때까지 10년 넘게 니가타현과 사도시에서 준비한 관련 자료를 참고용으로 비치돼 있었다.
키라리움 사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원래 메이지 시기 일본 정부에서 제실(帝室) 재산 관리를 위해 설치하였던 어료국(御料局) 사도지청(佐渡支廳) 건물이었다. 이곳은 2024년 리모델링 후 재개관을 하였는데, 메이지 이후 시기의 광산 운영과 관련된 전시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재개관을 하면서 전시실 D에 ‘한반도 출신자를 포함한 광산노동자의 생활’이라는 코너를 신설하였다. 1층 전시실 안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한쪽 구석에 위치해 있다. 여기에는 「연초배급대장」, 「반도 노무관리에 대하여」, 1940년대 『특고월보(特高月報)』 등의 자료 사본과 간략한 설명문(일본어와 영문)이 전시 되어 있다. 그러나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 서술 속에서 한국 측이 요구하는 조선인의 ‘강제동원’ 사실에 대한 내용이 반영된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사도광산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1주년을 맞았다고는 하나 전시실 D의 전체 구성과 자료 소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점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거주하였던 기숙사(소아이료, 相愛寮) 터도 마찬가지였다. 마을을 따라 산길로 올라가는 중간에 숲길로 빠져야 하기 때문에 찾기 쉬운 곳은 아니었다. 기숙사 터에 세워둔 안내 팻말에는 “전시 중 이 기숙사에 한반도 출신 노동자가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는 문구와 함께 1943년 5월말 거주 인원수만 기숙사별로 간단히 제시되어 있다. 일본 정부가 작년 12월 1일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제출하고, 같은 달 15일 홈페이지에 공개된 등재 후속조치 보존현황 보고서(SOC)에는 이번에 둘러본 전시 관련 현황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근현대 한일 관계 속에서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와 지역사의 관계를 어떻게 서술할지는 향후 지속적인 연구와 상호 대화를 통해 접점을 찾아나가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제4소아이료(第4相愛寮) 터에 설치된 안내 팻말.
여기서는 1943년 5월말 124명의 조선인이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