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은 2025년 11월, 한중 양국의 역사 교과서 집필진과 역사교육 전문가들이 직접 만나 상호 이해를 넓히고, 동아시아 평화교육과 역사화해 담론을 함께 모색하는 한중 역사 교과서 집필진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번 회의는 단순한 학술 교류를 넘어, 교과서 서술의 배경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역사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함께 고민하는 자리였다.
한국은 2022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새로운 역사 교과서가 2025년부터 학교 현장에 처음 적용되고 있으며, 중국 역시 2017년 국정 교과서 체제 전환 이후 새 역사 교과서를 2024년부터 단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양국 모두 대규모 교육과정 개편을 경험하고 있는 시점에서, 교과서 집필진이 직접 마주 앉아 논의하는 이번 회의의 시의성에 대해 참가자들은 공통된 공감을 보였다.
더욱이 광복 80주년을 맞은 해에 한중 교과서 속 근현대사 서술과 역사 인식을 본격적으로 점검한다는 점에서 의미는 더욱 컸다. 중국 측 참가자들은 11월 27일 서울에 도착해, 학술회의에 앞서 한국의 역사 공간을 직접 답사하는 일정으로 첫날을 시작했다.
첫째 날, 교과서 밖 박물관에서 만난 한국사
중국 측 참가자 가운데 두 명은 이번이 첫 서울 방문이었다. 숙소 인근의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조선시대 서울의 공간 구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변천을 살펴보며 답사가 시작되었다.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를 바탕으로 재현된 궁궐과 한양 도성의 모습은 교과서 속 서술을 넘어 ‘살아 있는 역사’로 다가왔다.
이어 광화문광장으로 이동해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며, 두 인물이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상징성을 자연스럽게 공유했다. 광장 옆에 자리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찾은 참가자들은 옥상에서 경복궁과 청와대, 그리고 이를 둘러싼 북악산의 지형을 조망하며 ‘풍수지리적 명당’이라는 설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전시실을 돌아보던 참가자들은 안중근 의사가 1910년 옥중에서 남긴 ‘국가안위 노심초사’ 유묵 앞에서 발길을 멈췄다. 그리곤 각자 방문했던 안중근 관련 유적지에 대한 경험을 나누며,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격변과 저항의 의미를 되새겼다.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교과서 전시를 함께 살펴볼 때는 다음 날 열릴 한중 교과서 집필진 회의가 보다 깊은 논의의 장이 되기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둘째 날, 한․중 역사 교과서 집필진 회의
이번 회의는 중국 역사 교과서의 국정 전환 이후 양국 집필진이 처음 공식적으로 만나는 자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발표는 일방적 보고가 아니라, 발표자 간 상호 교차 토론 방식으로 진행되어 이해와 집중도를 높였다. 회의는 「한중 교과서 속 근현대사 서술과 역사 인식」을 주제로 세 개의 세션으로 구성되었다.
제1부에서는 양국 교과서에서 일제 침략 서술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분석했다. 발표자들은 공통적으로 최근 교과서가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해 관련 내용을 확대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중국의 국가 통편(통일 편찬) 역사 교과서는 2017년 이후 교육과정 개편을 거치며 일본의 침략과 항일전쟁(1931~1945)을 핵심 교육 내용으로 체계화했으며, 중·고교와 직업학교 교과서 모두에서 이를 중요한 정체성 교육 요소로 다루고 있다고 소개되었다. 동시에 이러한 서술 역시 향후 보완과 성찰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했다. 이어서 한국 측에서는 2025년부터 적용되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역시 이전 교육과정에 비해 일제시기 이후 근현대사의 비중이 대폭 확대되었다고 평가하면서도, 갈등적 역사 요소를 어떻게 서술하고 학생들에게 어떤 역사적 사고를 길러줄 것인지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제2부에서는 독립운동과 항일운동의 정당성 서술을 비교했다. 한국 측에서는 최근 제기된 ‘의열투쟁과 테러리즘’ 논쟁을 언급하며, 의열활동의 역사적 의미와 교육적 대응 방향을 모색했다. 중국 측에서는 국정 교과서에서 일본군의 세균전 범죄 책임 추궁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정확한 ‘제2차 세계대전사 인식’ 확립과 책임 교육이 현재 중국 역사교육의 중요한 과제임을 강조했다.
제3부에서는 광복 이후 한중 관계 서술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한국 교과서가 6·25전쟁과 동북공정 등 갈등 중심의 서술에 비중을 두고 있는 반면, 중국 교과서에서는 관련 내용이 거의 다뤄지지 않는 현실이 지적되었다. 이에 따라 향후 교류와 협력의 역사도 함께 서술할 필요성이 논의되었다. 중국 측은 최근 교과서가 전쟁 서술을 넘어 평화학적 관점과 글로벌 시민교육 요소를 강화하고 있음을 소개하면서도, 타자에 대한 고정적 이미지, 전쟁 책임 논의의 부족, 학생의 실천 역량 제시가 미흡하다는 교육적 한계를 함께 짚었다. 이는 한국 측이 강조한 ‘갈등 서술을 넘어 갈등 전환과 평화 실천을 다루는 역사교육’이라는 방향성과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었다. 한중 교과서에서 확대된 근현대사 비중이 실제로 미래 세대의 역사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의견을 나누었는데, 한국 측 집필진은 여기서 더 나아가 한중·일이 공동의 역사서술 원칙과 협의체를 마련할 필요성도 제기했다.
셋째 날, 기억의 공간에서 다시 생각하는 교과서
셋째 날 일정은 학술회의의 연장선에서 진행된 역사문화 답사였다. 중국 측 참가자들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문을 찾아, 식민지 지배와 저항, 그리고 기억의 방식이 교과서 서술 속에서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현장에서 함께 성찰했다.
독립공원에서는 순국선열추념탑과 3·1독립선언기념탑, 서재필 동상 등을 둘러보며 독립운동가들의 메시지를 되새겼다. 특히 독립문이 과거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 자리에 세워졌다는 설명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동시에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했던 당시 한국인들의 역사 인식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은 참가자들
답사 중 중국 측 참가자들에게 재단이 중국어로 번역 발간한 도서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고려편)』을 전달하였다. 아울러 최근 국내 학계의 연구 성과를 폭넓게 참고해 줄 것을 당부하며, 향후 학술 교류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나누었다. 이어 재단의 또 다른 도서인 『다시 찾는 우리역사』 중국어판 『신편 한국통사』의 표지 배경으로 사용된 <화성능행도(華城陵行圖)>를 소개하며, 정조의 효심과 개혁정신, 도시 건설 구상이 집약된 공간인 수원 화성행궁으로 이동하였다. 수원 화성행궁 현장에서 베이징사범대 리판 교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의 핵심 요소인 원형 건축물에 큰 관심을 보였고, 일제강점기 철거를 피한 낙남헌을 직접 확인하며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고구려와 발해 유물, 그리고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반환된 경천사지 10층 석탑 앞에서 한중 역사 인식의 차이와 공통점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한중 역사 교과서 집필진 회의는 자국 중심의 역사 인식을 넘어, 균형과 존중의 시각으로 동아시아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성찰하는 자리였다. 학술 토론과 현장 답사를 통해 양국 연구자와 교육자들은 역사교육이 갈등을 재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미래 세대가 평화를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데 깊이 공감했다. 또한 한중 간 역사교육 교류가 보다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자리였으며, 향후 상호 이해를 넓히는 실질적 협력 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양국이 공동의 역사교육 모델이나 공동 연구 성과를 모색해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