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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회의 참가기
동북아시아 근대사 조약 연구와 국제법적 성찰
  • 신효승 국제관계연구소 연구위원
-동북아시아 조약 질서의 형성과 인식의 변화 학술회의-
 

재단은 9월 5일 ‘동북아시아 조약 질서 형성과 인식의 변화’를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2025년은 동북아시아 근대사의 중대한 조약들이 체결된 지 각각 120년, 130년을 맞는 해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은 청일전쟁의 결과물로서 조선의 독립을 명목으로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일본의 조선 침략과 대륙 진출을 제도화하는 전환점이었다. 1905년 포츠머스조약은 러일전쟁의 종결과 함께 열강의 동북아시아 재편을 공식화하였다. 같은 해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점하고 외교권을 박탈하면서 한국의 주권을 침탈하였다. 
 
이번 학술회의는 이러한 조약을 단순히 과거사적 사건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동북아시아 조약 질서의 형성과 인식의 변화’를 주제로 국제법학, 한국사, 중국사, 일본사 등 다양한 전공의 학자들이 모여 학제적 대화를 시도하였다. 특히 불평등조약의 법적 정당성 문제, 당시 국제법 체계의 모순, 문명론 담론의 작용, 그리고 이를 둘러싼 대중적·지식인적 서사를 입체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오늘날 동북아 국제질서 연구에 새로운 단초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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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발표에서 오시진(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은 ‘조약과 제국주의: 19세기 말 불평등한 국제법 체계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불평등조약 연구의 기존 경향을 검토하였다. 그는 을사늑약 등 불평등조약의 무효성을 단순히 ‘강압에 의한 체결’ 혹은 ‘절차적 하자’로만 설명하는 시각은 지나치게 협소하다고 지적하였다. 당시 국제법은 법실증주의와 문명론의 틀 속에서 ‘비문명국’을 법질서 밖에 두면서도, 이들과 체결한 조약은 국가 간 합의라는 이유로 유효하다고 간주하였다. 이러한 이중적 논리는 구조적 모순을 내포하며, 불평등조약의 법적 정당성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국제법의 성격을 세 가지 차원에서 설명했다. 첫째, 보편적 규범으로서의 적용 가능성, 둘째, 자연법적 정의의 원칙과 보편주의의 잔존, 셋째, 법적 판단을 유보하고 정치적 합의로 전환하는 현실적 타협이다. 결국 그는 19세기 말 국제법을 단순히 법실증주의의 산물로만 이해하는 것은 과도한 단순화이며, 불평등조약의 문제는 법과 정치, 문명론과 현실주의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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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하는 오시진 교수

강병근(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은 ‘러일전쟁 시기 국제관습법과 을사늑약’을 통해 1904년 개전과 함께 시작된 일본의 대한제국 점령을 국제법상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그는 대한제국이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서울을 점령한 행위는 어떤 정당방위 논리로도 합법화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전쟁이 종결된 뒤에도 점령이 지속된 것은 필요성과 비례성 원칙을 명백히 위반한 불법 점령이었으며,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체결된 을사늑약은 국제법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1905년 보호조약 체결에서 1910년 병합에 이르기까지의 과정 전체를 국제법 위반의 연속선상에 위치시켰다. 
 
신효승(재단)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1899년)와 전쟁법 변화’를 통해, 국제법이 제국주의의 담론적 도구로 기능했음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였다. 서구 열강은 청국을 ‘비문명국’으로 규정해 불평등조약을 강요했고, 일본은 이를 수용하면서 ‘문명국’ 지위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은 청일전쟁 당시 뤼순(旅順)학살 등에서 드러나듯 국제법을 준수하기보다는 제국주의적 침략을 합리화하는 가면으로만 활용했다. 국제법은 보편적 규범이 아니라 야만성을 감추는 수사적 장치였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다.
 
이후 토론에서는 여러 쟁점이 제기되었다. 이서희(한국해양수산개발원)는 ‘비문명국’이라는 규정 자체가 근대 한국에 적용 가능한지, 일본의 보호령이 유럽 식민지와 동일시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도면회(대전대)는 국제관습법상 교전 개시 이전의 점령 규범이 불분명했다는 점, 한국의 중립이 국제적으로 공인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보다 신중한 해석을 요구했다. 동시에 그는 을사늑약과 병합이 일본 단독의 범죄가 아니라 열강들의 묵인과 승인 속에서 이루어진 국제적 공동범죄라는 시각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문일웅(국사편찬위원회)은 시모노세키조약 체결 직후 창립된 조선협회를 분석하며, 이를 단순한 친목단체가 아니라 입헌정치 실험의 기초로 규정했다. 조선협회는 박영효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 인사들이 일본과의 협력 속에서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전략적 결사였으며, 일본과 서구 열강을 상대로 서로 다른 취지서를 발표하는 이중 외교전략을 구사했다. 비록 을미사변 등으로 단명했지만, 그 경험과 네트워크는 건양협회와 독립협회로 이어지며 근대 정치사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는 것이 발표 요지였다.
 
손성욱(창원대)은 청말 지식인과 언론이 시모노세키조약을 어떻게 서술했는지 추적하였다. 그는 이를 단순한 패전의 결과물이 아니라 왕조의 정통성과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정치적 위기로 인식했음을 강조했다. 특히 상하이 언론은 ‘국치’ 담론을 대중에 확산시켰고, 지식인들은 이를 정치·경제·사법 체제의 근본적 실패로 규정하며 개혁을 촉구했다. 이러한 서사는 교과서에 제도화되어 근대 중국 민족주의의 기층서사가 되었고, 시모노세키조약은 근대 중국에서 반식민지화와 국가적 치욕의 출발점으로 굳어졌다.
 
일본 측 발표자인 오가와라 히로우키(同志社大学)는 ‘러일전쟁 후 일본의 자타인식–조선인식을 중심으로’를 주제로 일본 대중매체가 형성한 조선 인식을 분석했다. 특히『도쿄 퍽(東京パック)』과 같은 시사만화잡지를 통해 일본 민중은 조선을 멸시와 보호의 대상으로 인식했고, 이를 통해 ‘문명 대 미개’라는 이분법적 시각이 강화되었다. 이는 지식인 담론이 아닌 대중적 심성 차원에서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을 구축하는 중요한 장치였음을 보여주었다.
 
토론에서는 조선협회와 독립협회의 연속성, 청말 서사의 시간적 변화, 일본 대중 담론의 성격 등에 대한 다양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조재곤(서강대)은 조선협회의 참여 인물 분류와 일본 명예회원의 역할에 대한 보다 신중한 해석을 요구했고, 정동연(청주교대)은 청말 서사의 시간적 층위를 세분화해 비교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홍종욱(서울대)은 일본 대중 담론이 근대적 산물인지, 에도(江戶)기의 연속인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만평 속 젠더 규범 해석에 신중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발표는 조약이 단순한 외교문서가 아니라 각국 사회의 집단적 기억과 인식 구조 속에서 어떻게 재생산되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학술회의를 통해 국제법학과 역사학이 접근 방식과 문제의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회의는 두 분야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제공했으며, 향후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일본 학자의 참여는 국내 연구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일본 내부 담론을 직접 접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이는 기존 연구의 한계를 보완하고, 국제 비교연구의 필요성을 환기시켰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한미통상협상 등 국제조약 문제가 긴급한 현안으로 떠오른 시점에서, 19세기 말 불평등조약의 논리를 재검토한 것은 시의적 의미가 컸다. 다만, 발표와 토론 시간이 부족하여 보다 심도 있는 이루어지지 못한 점, 외국인 학자의 참여가 제한적이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다. 참석자들은 이번 회의가 일회성 기념행사에 그치지 않고, ‘문명론과 국제법’ 같은 근본 주제를 심화하는 연속 학술모임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데 공감하였다. 또한 일본, 중국, 러시아 등 다양한 국가의 연구자를 참여시켜 보다 균형 잡힌 국제적 논의의 장을 마련할 필요성도 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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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술회의는 동북아시아 근대사의 조약 질서를 총체적으로 조망한 드문 시도였다. 불평등조약의 법적 정당성을 재검토하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인식을 복합적으로 분석한 논의는 학문적으로나 현실적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앞으로 이러한 학제적 대화가 지속될 때, 동북아 근대사의 복잡한 조약 경험을 보다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