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기준 대한민국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은 220만 명이 넘는다. 코로나 팬데믹 직전인 2019년에는 250만 명을 넘어서기도 했으며,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한 귀화 인구도 20만 명을 넘어선 지 오래다. ‘단일 민족 국가’라는 표현은 이미 철 지난 수식어가 되었고, 대한민국은 빠르게 다문화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 대중의 기억 속에 조선 후기 ‘쇄국’의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 우리 역사를 돌이켜보면 생각보다 개방적인 사회였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어우러졌고, 여러 국가와 종족 출신의 사람들이 우리 역사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줄곧 이방인이었을까?
안악 3호분의 주인공
황해남도 안악군에는 직경 30m, 높이 6m가 넘는 ‘하 무덤’이라고 불리던 무덤이 있었다. 조사를 통해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된 돌방무덤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내부에는 남녀 인물의 초상화에서부터 무덤 주인공의 저택과 생활 모습, 무덤의 주인공이 무장한 군인과 관리 등 250여 명에 달하는 수행인과 함께 행차하는 다채로운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안악 3호분의 발견이었다.
그런데 벽화만큼이나 눈길을 끈 것은 무덤의 주인공이었다. 무덤 안에 묻힌 사람의 내력을 기록한 68자의 묵서가 확인되었는데, 그는 고구려 고국원왕 27년(357)에 사망한 동수(冬壽)였다.
영화(永和) 13년(357) 초하루가 무자(戊子)일인 10월 26일 계축(癸丑)에 사지절 도독제군사·평동장군·호무이교위·낙랑상, 창려·현도·대방 태수이자 도향후인 유주 요동군 평곽현 도향 경상리 출신인 동수는 자(字)가 ▨안으로 69세의 나이로 관직에 있다가 죽었다.
동수는 요동군 평곽현(랴오닝성 가이저우 일대) 출신이었다. 동수는 『진서』와 『자치통감』 등의 역사책에도 등장하는데, 선비 모용씨(전연) 세력의 휘하에서 관직을 역임하며 활동한 인물이었다. 안악 3호분이 자리한 황해도 일대를 자리하던 지역이기도 했지만, 동수가 사망한 357년은 이미 고구려 영토로 편입된 지 40여 년이 지난 후였다. 요동에서 태어나 전연에서 활동하던 동수의 무덤이 고구려 영토 안에서 발견된 것이다.
모용외(慕容廆) 사후 그 자식들 사이에 벌어진 권력 다툼에 휘말려 들어간 동수는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당시 고구려와 모용씨 세력은 전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로서는 모용씨 휘하에서 군대의 요직을 역임했던 동수의 활용 가치가 적지 않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렇게 동수는 고구려에 정착해 살아갈 수 있었다. 동수 외에도 당시 적지 않은 중국인이 고구려로 망명해 들어왔다.
안악 3호분 「묘주도」
안악 3호분 「묵서명」
고구려에 정착한 이방인들
고대로부터 중원의 혼란기에 많은 사람이 만주와 한반도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 일찍이 진승과 항우가 봉기했을 때 연·제·조의 백성들이 고조선으로 망명했고, 진한(辰韓) 사람들은 스스로 진(秦)나라의 고된 역(役)을 피해 망명해 온 사람이라고도 했다. 고구려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국천왕 19년(197) 중국이 크게 어지러워지자 매우 많은 한인(漢人)이 피난해 왔고, 산상왕 21년(217)에는 평주 사람 하요가 천여 호의 백성을 데리고 투항하자 책성에 살게 했다고 한다.
서진(西晉) 멸망 후 화북(華北) 지역은 5호 16국으로 들어섰다. 5호 정권의 흥망이 이어지면서, 다수의 한족들이 고향을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 당시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최대 규모의 이주민이 발생한 시기 중 하나였다. 이러한 현상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자, 여러 나라들은 이주민들을 받아들이고자 경쟁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고구려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구려 역시 유이민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자 했고, 그들을 고구려 안에 포용하고자 노력했다. 안악 3호분은 그 노력의 산물 가운데 하나였다. 정치적 망명객이었던 동수는 비슷한 처지의 유이민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부여받았고, 고구려에서 살아가다가 생을 마감한 것이다.
각저총 「씨름도」
고구려에는 중국에서 온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깊은 눈에 크고 오뚝한 콧날을 가진 사람들이 눈에 띈다. 각저총과 장천 1호분의 「씨름도」에 보이는 인물이 대표적이다. 아마도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서역인으로 짐작된다. 고대 동아시아에서 널리 활동하던 서역 출신의 상인, 용병들이 고구려에도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사람’이라고 하면 대부분 예·맥(혹은 예맥), 한(韓)만을 떠올린다. 하지만 고구려에는 본래부터 그 지역에 거주하던 토착민들 외에도 중원에서 온 한인(漢人)과 서역인들도 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료에는 선비, 숙신, 말갈인들도 고구려 영역 안에서 어우러져 있었던 사실이 전해진다. 그들을 쉽게 외국인, 이방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들 모두가 ‘고구려 사람’이었다. 이러한 다종족, 다문화 국가로서 고구려의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고, 고구려 사람들의 이야기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