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중추절의 기원은 신라?
1996년 중국 학자 슝페이(熊飛)는 엔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를 들어 중추절이 신라에서 기원하였다고 하였다. 하지만 2000년 양린(楊琳)은 신라 기원설을 부정하였다. “당나라 때 이미 중추절이 있었으며, 당나라는 문화적으로 우세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신라와 같은 소국의 명절을 수입하였을 가능성이 없다.” 2003년 류더쩡(劉德增)은 다시 신라 기원설을 주장하였다. “당나라의 중추는 소수가 참여하였기 때문에 명절이라 볼 수 없으며, 신라의 명절이 호속(胡俗)을 좋아하던 당나라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2008년 황타오(黃濤)는 “중추절의 기원은 당나라의 달 감상 습속에서 기원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신라 기원설을 다시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는 “2005년 한국 단오절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선정되어 중국의 문화유산 보호에 경종을 울렸음을 지적하고 중한(中韓) 중추절의 기원에 관한 논쟁도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중국 국무원(國務院)은 2006년 5월 20일 중추절을 ‘국가급무형문화유산(國家級非物質文化遺産)’에 등록하고, 2008년에는 「전국 명절과 기념일 휴가 방안(全國年節及紀念日放假辦法)」
을 통과시켜 중추절을 법정공휴일로 지정하였다.
적산 법화원의 위치
전 사회가 함께 즐긴, 신라의 가배
적산 법화원은 산둥성(山東省) 룽청시(荣成市) 스다오진(石島鎭) 북부에 있는 적산(赤山) 남쪽에 위치한다. 적산 법화원은 대당무역, 해상교류의 중심지로 재당 신라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일본 승려 엔닌은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839년 6월 7일부터 840년 2월 19일까지 약 8개월간 적산 법화원에 머물렀다. 엔닌은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적산 법화원 8월 15일 명절에 대해 소개하였다.
비파 연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토우
적산 법화원에서는 8월 15일 명절에 박돈(餺飩)과 병식(餅食) 등의 음식을 제단에 진설한다. 이 명절은 다른 나라에는 아직 없으며 오직 신라에만 있다. 노승들의 말에 의하면 “신라가 예전에 발해와 전쟁을 하였는데 이날 승리하여 명절로 삼았다. 이날은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며 즐기는데 오랫동안 계승하여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종류의 음식을 진설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관악기와 현악기를 연주하며 잔치를 하는데 밤낮으로 계속되어 3일이 지나서야 끝이 난다. 지금 적산 법화원에서는 고국을 그리워하여 이날을 명절로 삼았다. 발해는 신라에 토벌되어 겨우 1,000명이 북쪽으로 도망쳐갔다가 이후 다시 돌아와 옛날 그대로 나라를 세웠다. 지금 발해라고 부르는 나라가 그 나라다.
춤을 추는 토우
위의 기록으로 보아, 적산 법화원의 명절은 많은 사람이 함께 즐기는 성대한 명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신라만의 풍속”이라는 점이다. 법화원의 노승들에 의하면 8월 15일 명절은 신라의 풍속을 계승한 것이라고 한다. 신라에서는 이 명절을 ‘가배(嘉俳)’라고 하였다.‘가배’는 오늘날 ‘한가위’의 ‘가위’에 해당하는 말로, “가을의 반”이라는 뜻이다. 즉, ‘중추’의 우리말 표기다.
가배 때 신라 궁궐에서는 잔치를 하고, 관리들은 활쏘기 시합을 하였는데, 왕은 상으로 말과 포(布)를 하사하였다. 부인들은 머리를 틀어 올리고 비단과 구슬로 장식하였다. 그리고 왕녀의 주도하에 길쌈놀이를 하고, 회소곡이나 추석곡 같은 노래도 불렀다. 처용에 대한 고사로 볼 때 일반인들도 밤새도록 놀고 즐기는 성대한 명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희 때는 관악기와 현악기에 맞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 이러한 모습은 신라 토우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어린아이가 토끼 할아버지에게 제사 지내는 모습.
청나라 시기 양유청(楊柳靑)이 제작한 목판화 <계서승평(桂序昇平)>. 중국국가박물관소장.
아이들이 토끼 할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다.
아이들 중 가장 어린아이가 절을 하고 조금 큰 아이들은 악기를 치거나 절을 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토끼 할아버지는 제단 위에 모셔져 있는데 붉은 귀에 붉은 입술을 하고 관복을 입고 있다.
토끼할아버지 앞에는 커다란 월병이 쌓여 있다.
토끼 할아버지에 제사하는 중추절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은 당나라 시기 중추절은 정식 명절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당나라 때 중추는 휴일이 아니었으며, 문헌기록이 없고, 일부 상류층만의 달감상 습속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중추가 정식명절이 되는 것은 북송에 이르러서다. 북송 태종(太宗) 시기 “8월 15일은 중추절이다”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중추절이 명절로 지정된 것은 영종(英宗) 시기인 1203년 「경원조법사류(慶元條法事類)」의 반포를 통해서다. 송나라 때 완월갱(玩月羹)이란 명절음식이 등장하는데, 현재 중추절 음식인 월병과는 다른 것이다. 『동경몽화록(東京夢華錄)』에는 흥겹게 중추절을 즐기는 카이펑(開封) 사람들의 모습이 소개되어 있다.
명나라에 이르면 가족들이 단합하고 월병을 나눠먹는 현대 중추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민간에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중추절에 월병을 나눠먹는 것은 몽골 통치에 항거한 역사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원나라 통치자는 잔혹한 통치를 하였다. 당시 열 집에서 칼 하나를 사용하게 하고, 사람을 파견하여 감시하여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았다. 사람들의 고통은 극에 달해 중추절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사람들은 암호를 종이에 써서 월병 안에 넣어 서로 전하였다. 8월 15일 저녁 폭죽이 터지자 모든 사람이 함께 봉기하여 원나라 통치자를 살해하였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원나라를 물리쳤다.”
명나라 시기 토끼신에 대한 제사도 성행했다. 중국에는 “달에 사는 흰 토끼가 약방아를 찧어 사람에게 복을 준다”는 전설이 있다. 명나라 때 베이징에서는 심각한 전염병이 돌았는데, 항아가 옥토끼를 파견하여 병을 고쳐주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옥토끼에 감사하기 위해 토끼 할아버지(兔兒爺)를 만들어 제사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토끼 할아버지에게 제사하는 습속이 더욱 성행하였다.
“매번 중추가 되면 시장 사람 중에 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황토를 주물러 토끼[蟾兔] 형상을 만들어 파는데 토끼 할아버지라 한다. 어떤 것은 의관을 갖추고 우산을 쓰고 있으며, 어떤 것을 갑옷을 입고 큰 깃발을 꽂고 있으며, 어떤 것은 호랑이를 타고 있고, 어떤 것은 묵묵히 앉아 있다. 큰 것은 1미터 정도 하고 작은 것은 30센티미터 정도 한다.”
추석에는 송편을 먹고, 중추절에는 월병을 먹는다. 한국과 중국의 달[月]은 서로 다르다.
서로 다른 달[月]
추석은 중추절보다 이른 시기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중추절이 신라 가배의 영향을 받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두 명절은 목적과 내용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추석은 햇곡식으로 송편을 만들어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행사다. 남부지방에서는 조상들에게 새로 수확한 벼를 바치기도 한다. 이밖에도 강강술래, 소먹이 놀이, 소싸움, 닭싸움, 거북놀이와 같은 다양한 풍년 축하 놀이가 거행된다. 한국의 추석은 풍년의례적 성격이 강하며 달을 감상하는 것은 부가적인 행사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중국 중추절의 핵심은 달에 대한 제사다. 달이 뜰 무렵 제단을 차리고 진흙 토끼를 만들어 제상에 올리고 아이들이 제사한다. 이러한 요소는 한국 추석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명절 음식도 추석은 송편이고 중추절은 월병으로 뚜렷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추석과 중추절은 발생과 내용, 목적에 있어 본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중추절이 신라에서 기원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의 추석과 중국의 중추절은 각기 다른 기원과 목적, 내용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화의 기원을 따지기 보다는 서로의 명절을 이해하고 함께 즐기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문화는 교류할 때 더욱 풍요로워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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