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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씨름이 고구려 때 시작되었다고?
  • 전호태 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각저총 벽화의 씨름

각저총 씨름

 

각저총 벽화의 씨름

  각저총 널방 벽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민속씨름 장면이 남아있다. 이런 까닭에 북한에서는 씨름과 같은 격투기를 나타내는 용어 각저대신 씨름이라는 말을 붙여 이 무덤을 씨름무덤이라고 부른다. 벽화에 씨름 장면을 넣으면서 화가는 씨름에 들어가 서로를 넘어뜨리기 위해 온 힘을 쏟는 두 장사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씨름에 열중하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매부리코에 눈이 큰 서역계 인물이고 다른 한 사람은 보통의 고구려인이다. 두 장사는 서로 상대방 왼쪽 어깨에 머리를 대고 오른쪽 어깨는 상대의 왼편 가슴 쪽으로 밀어 넣었다. 두 손을 뻗어 상대 등 쪽 바지 허리춤에 걸친 샅바를 잡고 한쪽 다리는 상대의 사타구니 근처 허벅지에 닿도록 밀어 넣은 상태로 상대를 들어 올리거나 힘으로 밀어 버리려 안간힘을 쓰는 중이다. 두 장사가 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입을 벌린 상태로 내 쉬는 숨이 좌우로 삐져나온 콧수염을 위로 날리고 있는 듯한 화가의 묘사에서 잘 드러난다. 몸에서는 아마 땀이 송골송골 솟아나고 있을 것이다.

  씨름에 열중하는 두 장사 곁에 서 있는 늙은이는 심판의 역할을 맡은 이가 틀림없다. 한쪽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있는 이인물은 머리에 새깃을 꽂지 않은 절풍을 썼는데, 그 아래로 드러나는 머리카락이 성기며 눈, , 입이 보이지 않는 얼굴의 수염도 성기다. 화가는 이 성긴 수염과 머리카락으로 지팡이 짚은 인물이 머리와 수염이 허연 노인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장면이 고구려 사람들이 5세기 초에 제작한 고분벽화라는 사실임을 알리지 않고 이게 무슨 장면 같아요?’라고 일반시민이나 청소년에게 물어보면 어떤 답변이 나올까? 대뜸 민속씨름이라고 할 것이다. 두 장사가 걸친 짧은 반바지에 샅바까지 민속씨름의 복장과 다른 게 무언가? 두 씨름꾼의 자세가 근래까지 호남에서 주로 행하던 오른씨름 중임을 보여주고, 현재의 민속씨름 주류는 왼씨름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민속 씨름 자체는 늦어도 삼국시대 고구려 때에는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진 민속놀이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이 벽화 한 장면으로 알 수 있지 않는가?

    

저 세상으로 가는 관문에서 하는 놀이, 씨름

장천 1호분 씨름


저 세상으로 가는 관문에서 하는 놀이, 씨름

각저총 벽화의 씨름 장면에서 눈길을 끄는 것 가운데 하나는 화면의 왼편에 보이는 커다란 자색나무 밑동의 곰과 호랑이다. 나무 위의 가지에는 검은 새들이 앉아 있고 줄기 아래에는 곰과 호랑이가 각각 사람처럼 등을 줄기에 기댄 채 앉아 있다. 씨름하는 장사들과 심판관 노인의 머리 위쪽에는 새구름 무늬가 그려졌다. 씨름꾼 두 사람과 심판 외의 이런 그림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곰과 호랑이는 단군신화의 주인공들 가운데 일부이다. 하늘의 임금 환인의 아들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던 두 동물이 곰과 호랑이다. 곰은 환웅이 시키는 대로 동굴에서 빛을 보지 않고 쑥과 달래를 먹고 지낸 지 삼칠일 만에 사람이 되어 나왔지만, 호랑이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람 여자가 된 곰은 이후 환웅과 부부의 인연을 맺고 단군왕검을 낳는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은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나무 신단수 아래에서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기도하면서 시작되었다. 땅의 생명이 하늘에 빌면서 일어난 일이다. 씨름장면 벽화의 거대한 나무는 단군신화의 이 신단수와 다르지 않다. 곰과 호랑이가 이 나무의 밑동에 앉아 있는 게 그 증거다. 그렇다면 씨름은 하늘과 땅을 잇는 이 신단수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서로 다른 두 세계 사이의 경계이자 사다리 역할을 하는 거대한 나무 앞에서 씨름이 행해지고 있으니, 두 장사가 힘을 겨루는 씨름이라는 운동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넘어가게 둘 거냐, 말 거냐를 두고 행하는 중차대한 행사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백제와 관련이 깊던 일본의 고대 기록 일본서기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남아있다. 일본 천황이 백제 사신을 맞이하는 잔치 자리에서 씨름을 하게 한 것이 그것으로 기사는 아래와 같다.

    

(가을 7월 갑인 초하루, 642722) 을해 백제 사신 대좌평 지적 등에게 조당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이에 건장한 장정에게 명하여 교기 앞에서 씨름을 하게 했다. 지적 등은 잔치가 끝난 후 물러나와 교기의 문전에 절하였다.

    

  그런데 이 기사가 백제 사신 일행의 사망기사에 이어 나오는 점에 주목한 일본의 민속학자는 씨름을 당시 장례 절차의 일부로 이해하고 있다. 민속학자들은 내륙아시아 민족들 사이에서 씨름은 장례 때 행하는 놀이의 일부였고, 진혼의식과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장의행사의 일부였던 씨름이 윷놀이 같은 민속놀이와는 다른 의미와 기능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벽화에 등장하는 두 씨름꾼 가운데 한 사람이 서역계라는 사실은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인의 씨름 장면은 각저총 외에 장천1호분 벽화에도 보이는데, 역시 등장하는 두 사람의 씨름꾼 가운데 한 사람은 서역계다. 한국의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 동아시아에서는 중앙아시아 서역계 사람들이 상인과 용병으로 활약하는 사례가 많았다. 고구려 벽화 씨름장면에 등장하는 이 서역계 인물은 용병으로 활약하던 사람의 힘과 능력을 상징하는 존재일 가능성이 크다. 벽화 씨름장면에 이런 인물이 등장하는 이유는 뭘까? 죽은 이의 혼이 들어가서 살 새로운 세상, 내세의 관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아닐까? 이 문지기와의 씨름에서 이겨야만 관문이 열리고 내세 삶의 공간으로 넘어가는 게 허용된 것은 아닐까? 벽화 속 고구려인은 죽은 이의 영혼을 대신해 이 서역계 문지기와 씨름에 나선 이가 아닐까? 물론 장의 행사의 일환으로 열리는 씨름에선 관행상 서역계 문지기를 대신하는 장사가 죽은이의 영혼을 대신하는 씨름꾼에게 지는 것으로 끝나겠지만, 이 행사가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음은 틀림없다고 하겠다.

    

삶과 죽음을 잇는 놀이 씨름

일본의 전통씨름 스모는 시작할 때 반드시 두 손을 위로 올렸다 내린 뒤, 주변에 소금을 뿌린다. 우리네 민속에도 남아있던 소금 뿌리기는 주변을 정화하는 의식이다. 악한 기운을 퇴치하고 그런 것들이 더는 주변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려는 행위다. 스모 시작하기 전의 소금 뿌리기 역시 주변을 정화하는 활동이다. 이미 대중 스포츠가 되었지만, 원래의 스모는 하늘에 고하고 행하는 신성한 의식의 일부라는 건데, 이는 장의라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는 의미 깊은 행사로 스모가 행해졌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고구려의 씨름 또한 본래는 신성하고 무게 있는 민속 행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각저총 씨름장면 옆의 신단수, 곰과 호랑이, 검은 새는 씨름이 지닌 그런 의미를

확인시켜주는 존재인 셈이다. 지금은 대중화된 민속씨름이라는 스포츠의 한 종목이지만, 본래의 씨름은 삶의 이편과 죽은 뒤의 세상인 저편 사이 관문 통과를 위한 힘겨루기였고, 죽은 이를 위해 씨름에 나선 이를 응원하는 문상객들의 함성 아래 치러지는 또 하나의 축제 행사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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