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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위안부’ 생존자로부터 배운 용기로, 전쟁과 성폭력의 관계에 대해 꾸준히 질문하다
  • 인터뷰이ㅣ 레기나 뮐호이저(Regina Mühlhäuser) 함부르크 연구문화진흥재단(Hamburg Foundation for the Advancement of Research and Culture) 선임연구원 인터뷰어ㅣ 박정애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로부터 배운 용기로, 전쟁과 성폭력의 관계에 대해 꾸준히 질문하다

역사학자인 레기나 뮐호이저는 독일 함부르크 학술문화진흥재단의 선임연구원이자, 국제적 연구 그룹인 <무력분쟁에서의 성폭력> (www.warandgender.net) 창립자 중 한 명이다. 무력 분쟁과 젠더폭력, 섹슈얼리티 문제가 주요 연구 주제인 그녀는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침략국인 독일과 일본뿐만 아니라 연합군의 성적 가해행위 등이 관심 분야이다. 그녀는 성폭력 방지와 여성인권 존중을 위해 가해국의 책임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민들의 인식 전환, 현지 활동가와 피해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터뷰이레기나 뮐호이저(Regina Mühlhäuser)

함부르크 연구문화진흥재단(Hamburg Foundation for the Advancement of Research and Culture)

선임연구원

인터뷰어박정애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로부터 배운 용기로, 전쟁과 성폭력의 관계에 대해 꾸준히 질문하다   

 

Q. 선생님이 어떤 계기로 전시 성폭력 연구를 시작했는지 궁금합니다.

 

A. 대학생이던 1990년대 중반 이 문제에 관심을 가졌어요. 파시즘과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한 세미나를 들었고, 독일 나치 강제수용소 기념관에서 조교로 일하기도 했어요.

당시 국가사회주의, 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기간의 여성 피해자를 피해자이자 가해자, 또는 대리인으로 보는 페미니스트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때 성별에 따른 전쟁과 폭력 경험, 그리고 그 역학 관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1994년과 1996년에는 위안부생존자들의 정의를 위한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에 왔고 도쿄에서 열린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도 참가했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생존자의 용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제 할아버지 세대가 점령지에서 현지 여성과 소녀들, 때로는 소년과 남성들에게 무엇을 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Q. 한국 피해자의 이야기를 듣고, 여러 활동을 겪은 경험이 선생님을 변화시켰군요.

 

A. , 저는 위안부생존자 덕분에 이러한 폭력이 지난 전쟁에서 얼마나 만연했는지 알았습니다. 독일로 돌아온 후 제 동료인 최미라 씨와 함께 한국의 위안부에 대해 책을 쓰고 공개 행사에서 발표했습니다. 이날 한 독일 여성이 다가와서 저도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라고 말했어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많은 독일 여성들이 연합군 병사에게 강간당했습니다. 하지만 가해자들은 나치에 맞서 싸운 해방군이었고 피해자들은 침략국 독일의 여성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 이후, 저는 마침내 성범죄 가해자로서 독일군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과 나치 병사: 1941 ~ 1945년 소련전쟁 중 폭력적이고 상업적이며 합의된 만남이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입니다. 저는 독일 병사가 강간과 다른 형태의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병사들은 보호나 음식 제공을 빌미로 여성들과 은밀하게 성을 거래했고, 현지 여성과 연애를 하기도 했습니다. 육군 사령부는 이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처벌하는 대신, 관리하고 통제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가장 광범위한 조치는 군 매춘업소를 개설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어떤 여성은 돈을 받고 일했고 어떤 여성은 성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받은 여성도 성폭력과 억압을 당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로부터 배운 용기로, 전쟁과 성폭력의 관계에 대해 꾸준히 질문하다

2023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 학술회의에서 발표하는 레기나 뮐호이저 박사

 

 

Q. 독일에서 과거 독일군의 성폭력에 대해 말할 때 반발이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매우 민감한 문제일 텐데요.

 

A. 제 책이 출간되었을 때 반응은 두 가지였습니다. 퇴역 군인들로부터 제가 독일 군대와 독일 국가를 망신시킬 거라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신체적인 위협도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에 제 사진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마침내 이런 종류의 범죄가 공개되었다는 사실을 축하하는 언론의 긍정적인 평가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러한 종류의 범죄가 피해생존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또 가해자 가족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폭력을 자명하고 정상적인 일로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분석한 자료는 사실 비밀 자료도 아니었고, 많은 역사가가 먼저 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왜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을까요? 암묵적으로 모든 전쟁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폭력이 끔찍하다고 생각했을지라도 분석하고 연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거죠. 역사부정론자뿐만 아니라 이러한 인식 부족도 문제입니다.

 

Q. 독일은 과거사 반성이 철저한 나라라고 인식되고 있는데 어디나 성범죄에 대한 반응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A. 일본과 비교했을 때, 독일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당시 독일이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1970년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는 1943년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봉기 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제스처였습니다. 또한 1970, 1980년대부터 독일의 시민단체들이 추모비와 박물관을 설립하기 위해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독일이 개인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독일은, 전후 점령국 정부에 대한 배상금 지급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다고 주장합니다. 게다가 성폭력 문제는 추모비와 배상 논의에서 눈에 띄게 빠져 있습니다. 이 폭력에 대해 독일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청구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에는 활발한 시민운동이 위안부생존자가 직접 나서도록 독려했습니다. 유럽에는 이와 유사한 노력이 없었습니다.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로부터 배운 용기로, 전쟁과 성폭력의 관계에 대해 꾸준히 질문하다


 

Q. ‘위안부생존자들은 전쟁 때의 폭력과 전후의 무관심 속에서 살아남은 분들입니다. 이들과 처음 만났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A. 처음 한국에 왔을 때, 23살이었던 저는 독일의 중산층 출신 학생이었습니다. 저는 할머니들이 제 나이 때 어떤 성폭력을 당했는지 알고 싶어하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이 때문에 직접 질문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관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들은 적어도 우리에게는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화투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을 때는 많이 웃었습니다. 한국에 3개월 동안 머물며 매주 수요시위와 청문회, ‘나눔의 집을 찾았을 때 생존자들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한 번은 강덕경 할머니가 저희를 방으로 초대해 자신이 어떻게 전선

으로 끌려갔는지, 군인들이 어떻게 나무 막대기를 땅에 박았는지 보여줬습니다. 그런 다음 바닥에 누워 자신에게 담요를 덮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군인들이 어떻게 위안소 텐트를 지었는지 우리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강덕경 할머니는 우리에게 너는 젊고 외국에서 왔으니 우리 이

야기를 세계에 알릴 씨앗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녀는 정치 운동가였고 우리를 참여시키고 싶던 것이 분명합니다. 할머니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너무 힘든 삶을 살았고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절대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Q. 피해자들은 바람을 다 이루지 못한 채 거의 돌아가셨습니다. 혹자는 생존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A.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지막 생존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지원하고 남은 생애를 평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이번 기회를 통해 생존자들에게 공식적으로 직접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군‘위안부’ 생존자로부터 배운 용기로, 전쟁과 성폭력의 관계에 대해 꾸준히 질문하다  

Q. 이번 한국 방문 중에 수요시위에 참가하셨습니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는데, 어떠셨어요?


A. 이번에 수요시위가 열린 평화의 소녀상주변 공간을 한국의 부정론자들이 점거한 것을 처음 보고 매우 화가 났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한일 양국의 갈등으로 만들려고 하고, 윤정옥과 같은 저명한 활동가뿐만 아니라 수요시위 참가자를 반일파라고 합니다. 이는 명백히 잘못입니다. ‘위안부문제는 단순히 한일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 인권 문제이자 전후 탈식민지 사회의 인권 문제입니다. 부정론자들이 자신들의 대의명분을 위해 이 문제를 악용하고 도구화하지 못하도록 담론의 방향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위안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 있는 현재의 정치 상황에서는 이것이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 걱정입니다.

 

Q. 독일에도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수요 시위에서 본 사람들처럼 행동하면 어떻게 되는지요?

 

A. 독일 형법에는 증오나 폭력을 선동하고 공공의 평화를 어지럽힐 가능성이 있는 방식으로 집단학살, 반인도적 범죄, 전쟁범죄를 대중이 용인, 부인, 혹은 경시하는 행위를 형사처벌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네오 나치가 아우슈비츠를 부정하는 경우 경찰에 신고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조사를 받고, 법정에 회부될 수 있습니다. 정부가 그러한 일을 항상 제대로 수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Q. 이번 재단의 학술회의는 어떤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A. 매우 고무적이고, 전문가와 주제, 접근 방식이 특별한 조합을 이룬 회의였습니다. 일본군위안부제도 이전의 역사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를 통해 전쟁 전후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각국의 차이점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독일과 유럽에서는 지금까지 이러한 오랜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 여성들이 국가의 성관리 정책, 또는 성노예 제도를 어떻게 헤쳐나갔는지 더 많이 궁금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Q. 이번 회의의 목적 중 하나는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뿐만 아니라,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성폭력 상황에 대해 개입하는 것이었습니다.

 

A. 제가 우려하는 것은 무력 분쟁에서의 성폭력을 둘러싼 학문적 논의가 우크라이나나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크게 다른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번 회의의 발표자였던 백재예 선생님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출판 문헌에 대해 발표하면서, 이러한 연구가 현지에 대한 지식을 누락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제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분쟁 지역에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가장 먼저 대응하는 사람들은 대개 현지 여성 활동가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경험과 지식은 학술적 또는 정치적 논쟁에서 거의 고려되지도, 문서화되지도 않고 있습니다. 나아가 지난 몇 년 동안 이들의 지식은 주요한 논쟁에서 적극적으로 밀려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전쟁에서 성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젠더화된 권력 구조를 공개적으로 비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을 더 깊이 이해하고, 누가 언제 누구에게 무엇을 왜 했는지 탐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 배경, 학문을 가진 활동가와 학자들이 지식을 공유하고 다양하게 결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한국의 위안부연구가 이러한 접근 방식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고 생각합니다.

 

 

Q. 전시 성폭력 연구와 함께 실천활동에도 꾸준히 관여하고 계십니다. 앞으로는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A. 저와 국제적 동료들은 무력 분쟁에서의 성폭력에 대한 페미니스트 및 지역 지식을 기록하고 다시 활성화하기 위해 구술사 프로젝트를 막 시작했습니다. 주로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면서, 그 이후에도 활동했던 1990년대 페미니스트 활동가들과 인터뷰하여 그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게 되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등을 질문하고 있습니다. 당시 페미니스트 운동은 매우 국제적이었습니다. 보스니아 및 기타 유고슬라비아의 여성들은 한국, 필리핀, 일본의 여성들을 만나 컨퍼런스, 법정 등에서 활동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운동에 세계적으로 관련된 이들이 누구인지 지도를 만들려고 합니다. 이것이 젊은 세대의 운동가들과 학자들이 이 문제를 이해하고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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