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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코리안 디아스포라
‘백의민족의 영상’ 김산
  • 유정애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


중국 산시성 황토고원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이요

삼천리 강산도 잃었구나

아리랑 아라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망향

 

타클라마칸 사막의 미사가 수천 년 동안 날아와 쌓여서 황토고원을 이뤘고, 이 고원은 다시 흐르는 물에 수천 년 침식돼 깊은 계곡을 이뤘다. 산시성(陝西省) 황토고원에는 붉은색 사암만이 물결 무늬처럼 주름으로 남아 그 장구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그 계곡 어느 주름 하나는 김산을 보듬어 안고 있을 것이다. 그 주름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그가 백여 년 전 불렀던 아리랑의 노래일까? 그는 한 줌의 흙으로라도 조국으로 돌아가길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어디든 누구든 디아스포라. 이방인들에게 조국이란 무엇일까?


나는 20대 초반에 미국에서 아리랑의 노래를 처음 읽었다. 한국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또 하나의 아리랑고개를 넘고 있었고, 이 책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한 사람은 독립운동가이며 동아시아의 혁명가 김산(본명 장지락)이었고, 다른 한 명은 모험 충만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님 웨일즈(본명 Helen Foster Snow)였다. 이들이 1937년 중국대장정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 만난 것이다. 웨일즈는 학자의 손처럼 야윈 손을 가진 당당하고 품위 있는 태도의 김산에게서 그녀가 전기를 쓴 25명의 중국혁명가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사유의 깊이와 통찰을 보았다. 김산은 그녀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남김으로써 수 많은 이름 없는 김산들의 흔적을 역사에 남겨줬다.

    



미국에서 1941년 출판된 『SONG OF ARIRAN』의 표지



평화시위가 피를 뿌리며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난 이후에

 

1905년 평북 용천에서 태어난 김산은 3.1운동 당시 14세의 소년이었다. 하루 종일 밥 먹는 것도 잊고 너무나도 기뻐서 가슴이 터질 것만같았던 감격도 잠시였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무참히 짓밟히고 전국이 감옥으로 변하는 것을 목격한 후 울음소리가 투쟁의 함성으로 바뀔 때까지는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다짐하며 어린 소년은 압록강을 건넜다.


압록강을 건너 하얼빈으로 갔던 김산은 방향을 틀어 서간도 하니하(哈泥河)의 신흥무관학교로 향했다. 길바닥에 패인 마차 바퀴 자국을 따라 엄동설한에 새우잠을 자며 어렵게 신흥학교에 당도했다. 입학 최저 연령인 18세에 못 미친 김산은 학교 당국의 배려로 3개월 단기과정에 입학했고, 졸업 후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으로 갔다. 이 과정에서 그의 사상적 멘토인 김충창(본명 김성숙)을 비롯 오성륜, 김원봉, 안창호, 이동휘 등과 인연을 맺는다.



광둥의 조선인: “물속의 소금

    

1925년 중국혁명의 열기 속에 김산을 비롯한 많은 조선의 혁명가들이 새로운 혁명정권의 도시인 광둥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중국혁명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26년 김산은 김원봉, 김충창과 함께 조선인을 대표하는 연합체인 조선혁명청년연맹을 결성했고 이후 민족주의 정당으로 의열단을 중심으로 조선민족독립당을 만들었다.


장제스의 쿠데타에 대항해 19271211일 중국 공산당이 광저우봉기를 일으켰을 때 김산을 포함 약 3백여 명의 조선인들은 봉기가 중국혁명임과 동시에 조국을 방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참여했다. 많은 조선인들이 국제연대를 통해 독립과 혁명이라는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광저우봉기는 삼일천하로 끝나고 이후에 국민당의 보복은 처절했다. 무장봉기에 참여한 공산주의자뿐 아니라 합류했던 군중까지, 모두 칠천 명 가까이 학살됐다. 김산은 광저우에서 대학살 현장을 목격하며 혁명이 분열에 의해 어떻게 좌절하는지 통감했다. 김산은 이렇게 잔혹한 나라에서는 살 수가 없어. 절대로, 절대로라며 총살당한 18살 소녀의 눈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노래한 <동교장(東敎場)의 휴머니티>란 시를 남겼다.


김산은 광저우를 탈출해 중국 최초의 소비에트인 광둥성의 하이루펑으로 갔지만 이곳 역시 머지않아 광둥군벌에 의해 공격당했고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하이루펑을 잃고 김산과 그의 동지 오성륜은 힘겹게 탈출했다. 김산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세세하게 남긴 광저우봉기의 참상이나 하이루펑 소비에트의 일상에 대한 생생한 기록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상상을 일깨워 준다. 1927년 경험은 김산에게 새로운 사유의 전환을 갖게 했고 중국혁명운동과 조선혁명운동의 공동 투쟁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는 믿음 하에 상하이, 베이징, 만주를 다니면서 양국의 항일운동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김산은 1930년과 1933, 두 차례에 걸쳐 일제에 체포돼 고문과 회유에 시달렸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살아내었다. 두 번째 석방 후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동지들의 환영이 아니라 불신과 당적 박탈, 그리고 가난과 병마였다. 결핵은 그가 지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망령이었다. 1934년 병마에 시달리던 그는 자신을 따뜻하고 헌신적으로 돌봐 주던 중국 여성 자오아핑(趙阿平)과 결혼했고 후에 옌안에서 아들의 출생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얼굴조차 보지 못한 자식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으리라. 결혼생활을 했던 2년 정도의 시절이 그가 14세에 고국을 떠난 후 가장 평온하게 지낸 시간이 아니었을까. 가정교사를 하고 글을 쓰고 돈을 벌어 아내와 함께 생활했던 그 짧은 세월이 그에게는 유일하게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경험이었을 것이다.


이즈음 김산은 조선인의 민족전선 구축을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더는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우리 자신을 잃어버릴 처지가 못 된다. 우리는 쫓겨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세력에 가담하는 하나의 세력으로서 중국에 가세해야만 한다장래의 행동을 위하여 조선인의 운동을 건설하고 준비하는 방향으로 재빨리 우리의 정력을 기울여야 한다.” 19367월 김충창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고 대표 자격으로 선출돼 8월에 중화소비에트의 수도 옌안으로 파견된다.




1931년 톈진 일본 영사관에서 체포된 김산. 그의 가슴에는 그가 3년 동안 중국에 머무는 것이 금지될 것이라고 적혀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순례자 김산

 

1937년 김산은 옌안의 군정대학에서 일본 경제와 물리, 화학을 가르치고 있던 중, 어느 날 한 미국인 기자한테서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 님 웨일즈였다. 7년 동안 중국에서 혁명가 25인의 자서전를 썼다는 그가 김산의 전기를 쓰기 위해 집요하게 설득했다. ‘진리를 추구하는 순례자라고 회상할 정도로 그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김산은 고달픈 조선인의 실상과 끈질김에 대해 신뢰와 애틋함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 이래 조선 사람이 왜놈들과 싸우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아직은 한반도 내에서 식민지 체제를 때려 부수지는 못하고 있지만, 만주에서부터 무장투쟁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리고 그는 확신에 찬 모습으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 조선을 해방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아리랑고개를 넘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김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리랑을 즐겨 불렀다. 그리고 웨일즈에게 이 민요에 대해 설명했다. 아리랑은 끊임없이 어려움을 넘고 넘어도 나중에 죽게 되는 그런 죽음의 노래이지만 죽음은 패배가 아니고, 수많은 패배를 딛고 승리가 태어난다고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며, 더 많은 사람이 압록강을 건너유랑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조국에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웨일즈는 아리랑에서 거칠고 힘들었던 그의 인생, 하지만 결국에는 독립된 조국에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을 읽었던 것일까. 나중에 책 제목을 아리랑의 노래로 했다.

    


김산의 마지막 아리랑 고개

    

나는 지금 연하의 강변에 서 있소. 눈물이 연하의 모래밭을 적시고 있소. 옌안을 떠나 전선으로 갈 생각이오. 아이가 크면 백의민족을 위해 분투하는 인간으로 길러주오.” 김산은 자오아핑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도 민족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 직후 33세의 나이에 자신의 아이도, 조국의 해방도 보지 못한 채 황토고원의 계곡 어딘가에서 숨을 거뒀다.


김산은 공포의 붉은 별로 악명 높았던 캉성(康生)에 의해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했다. 김산의 최후에 대해서 조선족항일렬사전2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938년 섬감녕변구 보안처에서는 김산 동지의 역사를 심사하였다. ‘반역자가 아닐까?’ ‘일제특무가 아닐까?’ ‘트로츠키가 아닐까?’ 하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심사하였지만 결론을 내릴 만한 근거는 없었다. 이에 캉성은 비밀리에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산 동지는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그때 그는 33살이었다.”


얼굴조차 보지 못한 아들 가오융광(高永光)이 애쓴 보람으로 중국공산당은 1983년에야 그의 처형은 특수한 역사 상황에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라며 과오를 인정하고 김산을 복권시켰다. 분단에 의해 북에서도 남에서도 잊혔던 그에게 한국 정부는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산은 아리랑의 마지막 장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내 청년 시절의 친구나 동지들은 거의 모두가 죽었다 () 그러나 내게는 그들이 지금도 살아있다. 그들의 무덤을 어디로 정해야 하는지 따위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다 () 그들의 뜨거운 혁명적 선혈은 조선, 만주, 시베리아, 일본, 중국의 대지 속으로 자랑스럽게 흘러 들어갔다. 그들은 눈앞의 승리를 보는 데는 실패했지만 역사는 그들을 승리자로 만든다. 한 사람의 이름이나 짧은 꿈은 그 뼈와 함께 묻힐지도 모른다. 그러나 힘의 마지막 저울 속에서는 그가 이루었거나 실패한 것이 단 한 가지도 없어지지 않는다 () 그 무엇도 사람이 역사라고 하는 운동 속에서 점하는 자리를 빼앗을 수가 없다. 그 무엇도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 없다.”

    


    님웨일즈 (연도미상)

1937년 연안에서 웨일스가 찍은 김산의 마지막 사진(좌), 님 웨일즈. 연도미상(우)




1937년 옌안에서 님웨일즈. 오른쪽은 주더(朱德)



김산을 생각하며

 

역사는 종종 승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역사를 만드는 일에 어떻게 참여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웨일즈는 아리랑의 노래를 통해 우리가 역사를 만드는 주역이라고 상기시킨다. 김산은 15세에 하얼빈에서 남만주까지 700리를 걸어서 여행했고, 22세에 광둥 봉기에 참여했다. 그리고 역사의 주역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줬다. 이 에세이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독립투사 홍범도 장군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 묻힌 지 78년 만에 돌아온 것을 상기한다. 지난 여름 그의 귀환은 감동의 순간이었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계곡 어딘가에 유해가 묻힌 김산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을까. 아리랑 열세 구비를 넘어서...

 

동지여, 동지여 나의 동지여

그대 열두 구비에서 멈추지 않으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열세 구비를 넘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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