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국, 재단 명예연구위원
중앙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고 대륙연구소, 고구려연구재단을 거쳐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하며 발해사 연구와 크라스키노 발해성 발굴 사업을 담당하였다. 발해 고왕 대조영 표준영정 제작 추진위원회 고증위원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고구려발해학회 편집위원과 학술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논저로 『크라스키노 발해성–발굴 40년의 성과』, 『발해 유적의 국가별 발굴 성과와 재해석』, 『해동성국, 고구려를 품은 발해』, 『발해 염주성 이야기』, 2006~2018 연해주 크라스키노 발해성 발굴 보고서 12책, 『고대 환동해 교류사–2부 발해와 일본』, 『발해의 역사와 문화』, 『새롭게 본 발해사』 등 저서 외 다수의 논문이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전신인 고구려연구재단 설립 이래 2004~2018년까지 크라스키노 성을 직접 발굴하였다. 러시아 연해주에 위치한 크라스키노 성 발굴은 1980년대에 러시아과학원 극동 지소 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처음 시작되었고, 현재까지 약 40년의 발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최근 재단에서는 크라스키노 성 발굴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크라스키노 발해성–발굴 40년의 성과』(2021)를 출판하고, 한국과 러시아의 발굴 성과를 총정리하였다. 크라스키노 성의 발굴 조사와 보고서 편찬을 주도적으로 이끈 재단 명예연구위원 김은국 박사를 만나본다.
인터뷰 | 배현준, 재단 북방사연구소 초빙연구위원
대륙연구소 시절부터 재단 퇴직 전까지 크라스키노 성 발굴 조사에 참여하셨습니다. 당시 한국에서 러시아를 비롯한 해외에 나가 직접 발굴하는 사례는 드물었을 듯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발굴 조사에 참여하게 되셨는지, 한국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발굴 조사를 한 계기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1993년 연해주 발해 유적을 처음 접한 그 감격은 지금 이 순간에도 생생합니다. 지금까지 크라스키노 발해 유적 발굴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1990년 당시 중앙대 동북아연구소장 김성훈 선생님(전 농림부 장관·상지대 총장)과의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UN 식량농업기구의 아시아 지역 실무자로 공산권 국가였던 중공과 소련의 농업 실태를 조사하면서 평소 관심을 두던 발해 유적을 답사하고 언론을 통해 그 존재와 의미를 강조하셨죠. 그리고 소련 연해주 내 유적 발굴을 총괄하는 러시아 극동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와 중앙대 동북아연구소 사이에 발굴 조사 협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이때가 제가 1991년 석사학위를 갓 취득한 이듬해였죠. 이후 선생님은 협약 주체를 대륙연구소로 변경하고 연해주 발해 유적 발굴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고, 저도 발굴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시작된 러시아 연구소 학자들과의 교류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인연들이 그동안 제가 크라스키노 성 발굴을 주관하고 이번 발굴 40년 성과를 책으로 출간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크라스키노 성 안에서 발굴 구역은 어떻게 선정되나요? 그리고 러시아 발굴의 특징이나 절차를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크라스키노 성은 러시아 영토인 연해주에 있어 러시아의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발굴해야 합니다. 발굴 구역은 마음대로 선정할 수 없고, 전년도 발굴 구역에 이어서 심화 발굴과 확장을 해 나가는 것이 원칙입니다. 러시아의 발굴법은 구소련 시대의 발굴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개토제開土祭(발굴 시작 전 토지신에게 올리는 제사)를 지내고, 표토층을 걷어낼 때부터 복토할 때까지 전체 일정을 철저히 러시아 발굴 규정에 따라야 합니다. 러시아는 그 해 발굴과 관련된 행정 보고서를 모스크바 과학원에 제출하여 심사를 받아야 다음의 발굴 허가를 받습니다.
지금까지의 크라스키노 성 한-러 발굴은 러시아 측의 발굴 허가와 발굴 방식에 따라 진행하였습니다. 10cm 단위로 흙을 걷어내면서 유물과 유구가 출토될 때마다 세부적으로 정리하고, 방안실(도면을 그리기 위해 방안지 모양으로 실을 설치하는 것)을 치고, 도면을 그리고, 유구와 유물의 높이level를 측정하여 기록하고, 유물 수습 전후의 유구 사진을 찍은 뒤에야 그 아래층 발굴이 가능한 것이죠. 느린 진행 속도와 한정된 일정, 불규칙한 날씨, 발굴 방법을 두고 의견 충돌도 많았습니다만, 러시아 학자들과 최상의 조율을 하면서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고, 크라스키노 성 발굴을 본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한 번 발굴을 시작하면 꽤 오랜 시간 그 지역에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크라스키노 성 발굴에서의 어려움,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대개 발굴 기간은 1달 정도입니다. 크라스키노 성은 크라스키노 마을에서 남쪽 해안가에 있습니다. 이곳으로 가려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자동차로 족히 3시간을 가야 합니다. 매번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러시아 측이 발굴을 위한 야영지를 먼저 설치를 해 놓습니다. 발굴 보고서를 보면 아시겠지만, 강가에 접해서 설치하는 야영 캠프의 목표는 50여 명의 두 나라 발굴단원이 자연 속에서 한 달간 생활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실제 어려움은 태풍과 홍수, 그리고 지독한 불볕더위 같은 기후 변화에 있었습니다. 특히 2013년에는 강력한 태풍이 연해주를 통과해서 홍수로 강물이 넘쳐 발굴단원 모두 비상 탈출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하루 만에 비가 그치고, 불어난 물도 다 빠져서 발굴을 이어갈 수 있었죠. 이때 발해 유적 발굴 사상 네 번째로 발해 청동거울이 발굴되었는데, 고단했던 발굴단원 모두가 환호하는 모습이 그 거울에 드리웠습니다. 그러니 2015년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청동 낙타상이 발굴되었을 때의 기쁨은 또 어땠겠습니까. 크라스키노 마을에 정기가 서린 안중근 의사의 외침처럼, 만세를 부르며 기뻐하던 단원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발해는 698년 고왕 대조영이 건국한 후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228년 동안 존속하였습니다. 크라스키노 성은 발해 시기 중 언제 세워졌을까요? 또 크라스키노성을 발해성으로 특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요?
한국에서 대륙연구소 이름으로 첫 발굴을 시작할 때 러시아 학자들은 크라스키노 성의 활용 시기를 발해 멸망 이후 동단국 시기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재단과 러시아연구소가 공동 발굴을 거듭하며 조사한 유구와 유물들을 통해 발해 이전인 고구려 시기부터 이 성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크라스키노 성은 문헌 자료에 근거해서 역사적으로 비정比定할 수 있는, 연해주에서는 유일한 발해 유적입니다. 이 성은 『신당서』 「발해전」을 근거로 발해 동경용원부 아래에 있던 염주鹽州로 봅니다. 발해는 785~805년 사이에 상경에서 동경으로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라 정천군(지금의 덕원)부터 책성부까지 39개의 역驛이 1170리里에 해당한다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도 크라스키노 성을 발해 염주성으로 보는 중요한 근거입니다. 처음 크라스키노 성을 염주로 비정한 것은 1960년대 E. V. 샤브꾸노프E.V. Shavkunov였습니다. 그는 포시에트 지역에 고대의 군항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빨라디이 까파로프Palladii Kafarov의 의견과, 얀치헤煙秋 강의 명칭이 염주의 명칭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어 이를 확정한 것입니다.
크라스키노 성이 두만강이 동해로 흘러가는 곳 인근 해안가에 위치한 이유가 있을까요? 그리고 발해의 대외 교류 창구 기능을 보여주는 유적이나 유물이 있나요?
염주 즉 크라스키노가 위치한 곳은 해양과 대륙의 접점으로, 발해의 동쪽에서 가장 역동적인 곳입니다. 이곳을 지나는 길은 지금도 중국의 훈춘, 러시아 연해주 주요 도시, 북한과의 교량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발해 시기 남쪽으로는 신라와, 서쪽으로는 당나라와 서역, 그리고 동해를 건너 일본과 왕래하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었습니다. 발해 교통로 중 사통팔달의 교차점으로,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국제적 통로 역할을 하기에 최적의 위치입니다.
크라스키노 성에서는 이곳이 육로와 해로의 연결거점이었음을 분명히 하는 쌍봉 낙타의 뼈, 청동 쌍봉 낙타상, 금박 구슬, 화병 모양 거란 토기 등 서역-북방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또 이곳에서 발견된 편병은 신라에서도 발견되어 해로를 통해 발해와 신라가 교류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고누판은 남쪽으로는 신라,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몽골에서도 발견되어 동일한 놀이 문화를 공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월주요, 정요, 장사요 등에서 생산된 자기들의 출토는 당과의 교역을 보여줍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세워진 나라로 알려져 있는데요. 발굴 조사에서도 그러한 양상이 확인되나요?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입니다. 구성원 역시 고구려 유민을 주축으로 말갈 세력 등까지 포함하고 있었죠. 우선 성문의 옹성 구조와 곳곳에 놓인 치雉 등은 고구려 전통을 보여줍니다. 흙을 다지고 돌로 견고하게 쌓아 토석혼축土石混築으로 만든 성벽은 고구려 이래 평지성의 축성법이죠. 주거지의 온돌 구조는 고구려 난방 시설의 전통입니다. 성 내의 우물 윗 부분은 단면으로 원형이고, 아랫 부분은 방형인 고구려식 우물로 고구려의 전통 축조술이 발해대에도 계승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크라스키노 성에서 가장 많은 수량으로 출토된 유물이 토기입니다. 그중 대다수가 윤제 토기로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고요. 손끝 무늬의 지두문 기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0년 동안 한 유적을 발굴한 사례는 국내는 물론 러시아에서도 드문 일입니다. 이는 크라스키노 성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발해사 연구에서 크라스키노 성이 가지는 의의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1993년 이후 지속된 한-러 크라스키노 염주성 발굴은 발해사 정립에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특히, 최근 10년간의 발굴에서는 발해 지방성 도시 구획의 실마리인 석축 기단 건축물터 등을 확인할 수 있었기에 발해 유적 조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후 성 내에서 ‘┼’형으로 교차하는 도로 발굴이 이어지면서 염주성이 상경성 못지않게 뚜렷한 도시 구획을 지닌 도성임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크라스키노 성은 당시 동북아시아의 역동적인 교류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1990년대 일본 발굴팀이 발해와 일본과의 교류 상징인 일본도日本道 관련 조사를 위해 동문지를 집중적으로 조사했고, 최근에는 중국 고고학팀이 성 내부에 대한 탐침 조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2015년에는 발굴 사상 처음으로 발해 전체 시기의 토층을 노출하였습니다. 특히 토층에서 수습한 목탄을 분석해 보니 성의 사용 연대를 발해 이전의 고구려 시기부터로 설정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발해 문화의 고구려 계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를 얻었습니다. 앞으로 고구려의 동해안 및 연해주 지역에 대한 경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개별 유물을 통해서는 발해인의 역동적인 생활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크라스키노 성은 현재 각 지역에 분포한 발해 유적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기준입니다. 이곳의 토층과 유물들은 비교할 수 있는 편년과 형태 분석의 표본이지요.
마지막으로 크라스키노 성 발굴, 연구와 관련하여 재단의 역할에 대한 조언 부탁드립니다.
크라스키노 성 발굴이 어느새 40년을 훌쩍 넘어섰군요. 하나의 유적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발굴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에 긍지를 가집니다. 재단이 발해 유적 발굴에 대해 아낌없는 지원을 한 결과이고, 30년 동안 돈독한 학술 교류를 이어온 러시아 극동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 러시아 학자들의 노력 덕분입니다. 이는 동아시아 발해 유적 발굴의 모범적인 사례로, 앞으로 다른 지역의 발해 유적 조사에도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재단은 크라스키노 발굴을 이제야 본 궤도에 올려놓았습니다.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가 많습니다. 러시아 학자들은 재단 발굴단이 매년 7월의 여느날처럼 크라스키노 발굴 야영장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주 E.I.겔만E.I. Gelman 박사가 이번에 출간된 책을 잘 받았다는 소식을 보내주면서, 그간 함께 발굴해 온 우리들의 열정과 또 다시 함께하고 싶어 했습니다. 재단과 러시아 극동역사학고고학민족학연구소가 맺은 학술 조사 협약은 어느새 세월의 인연이 되어 있을 뿐입니다.
크라스키노 성은 발해 역사만이 아니라 고구려는 물론 최근 우리 동포들의 삶까지 담겨있는 우리 역사의 타임 캡슐입니다. 향후 재단의 크라스키노 성 발굴은 연해주 일대 우리 문화상을 종합적으로 살필 수 있는 마중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재단이 다시 크라스키노 성 점장대에 올라가 주변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곳에 서면 남쪽의 우리 모습들이 새롭게 와닿습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대륙과 해양 곳곳에 해동성국의 위상을 전파한 발해인의 속 깊은 이야기가 쑥대밭의 바람결로 바뀌어 들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