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준, 단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단국대학교 사학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인하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광복군연구」(1993)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근현대사학회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백범학술원장,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장,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적심사위원, 문화재청 근대문화재위원 등을 지냈으며, 월봉저작상(1994), 독립기념관 학술상(2010)을 수상한 바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광복군 연구』, 『대한민국임시정부(중경 시기)』, 『중국 내 한국 근현대 관계 자료집』,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령집』, 『대한민국의 기원, 대한민국임시정부』(공저), 『한국독립운동의 역사』(공저) 등이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은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을 위해 주력했다. 일제하에서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임시정부가 이끈 독립운동의 힘이 크다. 선열들이 꿈꾼 자주독립의 나라를 누리며 사는 우리가 소중히 지켜야 할 민족적, 정신적 자산이기도 하다. 올해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임시정부와 광복군 분야에서 손꼽히는 연구자인 한시준 단국대 명예교수를 만나 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대담 | 조건, 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Q.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와 광복군 연구의 선구자를 직접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수립 과정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이를 통해 민주주의 국가를 건립할 수 있었던 근원을 설명해주시면 좋겠습니다.
A.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 과정에서 역사를 변화시키고 발전시켜 왔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독립운동을 단순히 일제에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되찾기 위한 항쟁으로 한정할 것이 아닙니다. 1919년 건립된 임시정부는 4천 년 이상 지속되어 온 군주주권의 역사를 국민주권의 역사로 바꾸고, 전제군주제의 역사를 민주공화제의 역사로 바꾸었습니다. 즉, 국민이 국가의 주권을 갖는 시대를 연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수립과 함께 제헌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이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100년이나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임시정부 덕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도 임시정부의 활동과 역사를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전승하기 위한 것입니다.
Q. 대한민국의 역사가 임시정부의 역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면 임시정부의 군대였던 광복군도 군주의 군대에서 국민의 군대로 발돋움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임시정부-대한민국, 독립군-광복군-대한민국 국군의 관계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제헌국회 속기록을 보면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임시정부를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임시정부의 군대였던 광복군은 올해 창군 80주년을 맞았습니다만 아직도 광복군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평가하지 못합니다. 광복군과 우리 역사의 관계를 분명히 하거나, 광복군의 역사적 위상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심지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모르니 광복군의 진면목을 훼손시키는 부분이 나타나기도 하지요. 그래서 최근에는 독립운동 시기의 광복군에 정신적 연원과 근원을 두고 대한민국 국군이 창설된 것으로 봅니다.
A. 미군정은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본명 지청천)을 국내로 데려와 건군의 중심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청천 장군은 중국에서 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 중국에 있는 한인 청년을 모아 광복군으로 확대 개편하는 일을 주도했기 때문에 임시정부 참모총장 유동열 장군을 추천했지요. 그래서 미군정은 통일부 부장에 유동열 장군을 임명하고, 조선경비대 사령관에 광복군 제2지대장 송호성 장군을 임명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여러 비난이 있지만 그분의 역사의식은 분명했어요. 초대 국방부 장관에 광복군 참모장이자 핵심이었던 이범석 장군을, 국방부 차관에 역시 광복군 참모장이자 중국군과 남창의 공군 사령관이었던 최영덕 장군을 임명합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조선경비사관학교의 명칭을 육군사관학교로 바꾸고, 교장을 연달아 광복군 출신으로 임명해요. 대한민국 국군의 주축이자 핵심이 광복군이고, 우리 국군이 독립군과 광복군에 맥락이 닿아있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겁니다. 이를 토대로 깊이 있는 연구가 진행되면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이나 역사적 뿌리에 대한 문제가 정립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 광복군이 중국에서 창설될 때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A. 사실 남의 영토에서 군대를 조직하고 무장을 갖출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했고, 중국 관내에서는 조선의용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광복군까지 창설해서 활동했습니다. 중국은 자국 영토 내에서 활동하는 타국 군대인 광복군에 관한 지휘권과 통수권을 갖겠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임시정부는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죠. 중국 군사위원회의 승인 없이 광복군을 창설합니다.
이에 중국은 ‘한국광복군은 중국 군사위 소속으로 위원회의 통할 지휘를 받는다’는 내용의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九個準繩)’이라는 조항을 보냅니다. 우리가 중국의 용병 노릇을 할 수는 없지 않느냐, 그럴 바에는 광복군을 없애자고 격렬히 저항도 해봅니다만, 현실적으로 남의 영토인 중국에서 군사 활동을 하려면 중국 군사위의 승인이 필요하니 결국 ‘9개준승’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군 통수권을 넘겨달라고 중국과 끊임없이 교섭해서 장개석으로부터 승인받은 것이 1944년 8월, 법령을 마련해서 완전한 통수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 1945년 5월입니다. 그때부터는 중국의 통제 없이 완전한 자주권을 가지고 활동하게 됩니다.
Q. 그렇다면 광복군 창설과 운영에 있어서 주요 역할을 한 이들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의 활동 범위는 얼마나 넓게 볼 수 있을까요?
A.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한 사람들, 중국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사훈련을 받은 한국 청년들,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해서 일본군과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이들이 바로 광복군의 주역입니다.
임시정부는 1919년 11월 3일 국무회의를 소집해서 독립전쟁 계획을 논의하고, 독립전쟁을 위한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 동포들이 많은 만주, 연해주의 20세 이상 40세 청년들을 군적으로 편입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병력을 모집하는 한편, 지휘관 양성을 위해 국무부 산하에 대한민국육군임시무관학교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1920년에는 ‘올해는 독립전쟁 원년, 독립전쟁을 시작하는 해’라고 선포합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김시덕 선생이 임시정부 제작 달력을 발굴했는데, 말 탄 사람이 앞서고, 무장 독립군이 그 뒤를 따라 독립문으로 들어오는 그림이 수록되어 있어요. 우리는 독립군을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가 독립전쟁을 한다는 뜻을 강하게 나타낸 거죠.
광복군은 해방 이후에도 1946년 5월 한국광복군복원선언과 해산 선언을 할 때까지 10개월이나 더 활동했어요. 그 기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요.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 동포들을 살려야 한다는 각오로 중국 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 일본 패망 후 중국 내 일본군이 항복 접수를 할 때 끌려 나온 한국 청년들을 환국시키는 활동을 했습니다. 국군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것입니다. 앞으로는 광복군의 역할 체계와 의미를 찾아가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Q. 임시정부나 광복군에 관한 자료가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A. 임시정부가 정부로서 많은 문서들을 생산했지만 원문서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광복군도 1940년 9월 창설부터 1946년 5월 해산 선언 시까지 6년 이상을 활동했지만 전해지는 기록이 없어요. 임시정부 요인들이 가죽가방 열세 개에 관련 문서를 담아 가져왔는데 6·25 전쟁 때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또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 장군의 따님 지복영 여사께서 “광복군 문서는 아버지가 가지고 들어왔고 아버지 사택 사랑방에 보관했다. 6·25 때 피난을 갔다가 서울 수복 후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 사랑방에 있던 문서가 다 사라졌더라. 아마도 인민군들이 가지고 갔을 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임시정부 문서나 광복군 자료 모두 인민군이 가져갔을 가능성이 큽니다.
Q. 임시정부와 광복군에 관한 자료가 남아있을 만한 장소를 여러 곳 추정하셨는데, 가장 가능성 있는 곳을 상해와 북한으로 보셨던 것 같습니다.
A. 그동안 임시정부와 광복군 문서를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찾지는 못했지만 대략적인 행방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32년에 일본이 가져간 문서는 불타지 않았다면 중국 상해시 당안관에, 6·25 때 없어진 자료는 북한 인민대 학습당에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북한이 그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쉽게 내주진 않을 겁니다. 북이 관련 자료를 제공해서 임시정부가 역사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면 민족사의 정통성이 남쪽에 있게 되는 것이죠. 남북이 독립운동사에 대한 이해 정도가 다르고 견해 차이가 크기 때문에 그 부분이 조율되지 않는 한 쉽게 성사되지는 않을 겁니다.
Q. 선생님께서 1999년 편찬하신 『대한민국임시정부법령집』은 여러 면에서 시사점이 많습니다. 독립운동사의 지평을 개척하신 입장에서 향후 관련 자료의 분석 및 연구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A. 정부를 연구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 중 하나가 법입니다. 민주주의는 헌법에 의해 유지, 운영됩니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국민주권국가, 민주공화제 정부를 수립한 임시정부는 임시헌장(헌법)을 반포했습니다. 정부의 체제와 운영 방식을 이해하려면 헌법, 교령, 부령, 국무원령 등 많은 법령을 살펴야 합니다. 원문서가 별로 없어 여기저기 흩어진 임시정부의 헌법과 법령을 한 데 모아 발표한 것이 『대한민국임시정부법령집』입니다. 이후의 제헌국회가 헌법을 새롭게 만든 일도 없고, 임시정부에 뿌리를 두고 그것을 계승·재건한 것이니 그 자체로서도 매우 큰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 이후로 더 많은 자료가 발굴되었으니 이제는 그 점을 보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쉬운 것은 임시정부나 광복군의 경우 더 크게 다뤄져야 할 것도, 연구를 계속해야 할 것도 많다는 점입니다. 독립운동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일제에 나라를 뺏기고 식민 지배를 받았을 때도 확실한 전략을 가지고 민족 스스로 독립운동을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한국 근현대의 중심을 독립운동으로 보고 그 의미를 찾아 나가야 합니다.
독립운동 관련 자료는 대개 일본 정보원들이 수집해서 보고한 정보 자료를 번역한 것인데, 이를 토대로 연구하면 독립운동사가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자료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임시정부의 자료를 찾는 일은 임시정부를 연구하는 데도 필요하지만, 우리 민족사의 계통과 맥락을 바로 잡고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상당히 중요합니다.
Q. 마지막으로 독립운동사 연구와 관련하여 재단에 바라는 말씀을 부탁드립니다.
A. 재단은 중국과 공유했던 역사적 경험을 되살려서 양국이 공동 운명의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부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20세기 전반 한국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중국은 일제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한중이 함께 힘을 합쳐서 막아낸 과거, 한중 공동 항전 사례를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재단을 주축으로 이런 사례와 자료들을 발굴해서 한중 양국이 하나의 운명을 지닌 공동체라는 데 뜻을 모으고 공동 자료집을 내면 어떨까 합니다. 공동의 이해관계와 역사적 운명에 뜻이 닿으면 많은 문제가 스스로 해결될 수도 있으니까요. 양국이 역사적 공감대가 있다는 것을 중국에 알리고, 우리 스스로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를 위해서도 이 연구가 지속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