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인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20년 후 중국 충칭(重慶)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독립을 위한 진전이 광복군 창설로 이어졌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외국 땅에서, 징집의 어려움 속에서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하고 대륙에 흩어진 교민들을 모아 광복군의 군사력을 증강했다. 그리고 2차 대전 후반기에는 자주권을 확보하며 독립전쟁의 주체적 결실을 목전에 두었다. 이는 수십 년간 이어진 독립전쟁의 의지와 역량이 공인된 것이자, 현실 외교의 성과이기도 했다.
국민 개병제와 국민군 편성을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포고 제1호(1920.1) ⓒ독립기념관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포고 제1호>
“2천만 대한민족이 일심일체가 되어 죽음이냐 자유이냐의 독립대전쟁(獨立大戰爭)의 첫해를 만들 대한민국 2년의 새 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독립전쟁의 중견이 될 러시아·중국령의 2백만 동포에게 고하노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모습(1940.9.17) ⓒ독립기념관
<1940년 9월 15일 한국광복군 창설 선언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蔣介石) 원수의 특별 허락으로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22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함을 선언한다.”
위의 두 문서는 1920년 독립전쟁을 선포한 임시정부 포고문과 1940년 한국광복군 창설 선언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을 결집하고,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는 한편 군사 투쟁을 병행했다. 그러나 망명정부의 현실에서 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망명정부가 강대국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광복군 창설을 선언할 때도 ‘장제스 원수의 특별 허락’이 명시되었을 만큼, 타국에서 군대를 창설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강대국이 거점 국가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키는 경우는 제법 있었지만, 약소국이 강대국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하물며 제국주의가 팽배한 20세기 전반에는 더욱더 그러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광복군 창설에 담긴 두 가지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광복군은 단기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 수립 이후 계속된 장기적인 군사 계획의 결실이다. 둘째,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군대이기는 하나 외국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물리적 주둔과 군사행동 전개에 대해 중국 정부의 승인과 협조를 구해야 했다. 이는 광복군의 현실과 의의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광복군 연구의 성과와 과제
한국광복군은 한국독립운동을 상징하는 군사조직이며, 대한민국 국군의 원류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위상이 정립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1970년대 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고,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등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 대한 사료를 편찬하면서 비로소 연구가 진전되었다. 초기 광복군 연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 활동’의 일환으로 다뤄지거나(이종학, 『한국사론』 10, 국사편찬위원회 1981) 특정 인사들이 참여한 독립운동 조직으로 인식되는 데 그쳤다. 학술 차원에서 광복군 연구가 진전된 계기는 1993년 『한국광복군 연구』(한시준, 일조각, 1993)가 발간된 이후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광복군 출신 인사들에게 독립유공자 포상이 주어지고 개별 연구가 이어지면서 광복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연구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실제로 역사학계에서 광복군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은 한시준(1992)과 김광재(『한국광복군의 활동 연구』, 동국대, 1999)의 연구뿐이며, 이후에도 이들 외에는 거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컨대 광복군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지속적으로 증대하였으나 학술 연구는 미진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2006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 10~15권 ‘한국광복군’을 발간한 것은 연구사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였다. 임시정부 자료집 ‘광복군’ 편에는 광복군의 창설과 변천, 구성 인원과 편제 변화에 대한 자료가 망라되어 연구자에게 큰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후로도 광복군 연구가 실질적으로 진전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임시정부 연구도 마찬가지다. 임시정부 자료집이 발간되었다 하더라도 이를 활용한 학술 연구는 제한적이었다. 최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으며 일시적으로 많은 연구가 발표되었지만 광복군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빈약하다.
광복군 연구의 진전을 위해서는 몇 가지 과제를 극복해야 한다. 첫째, 광복군 출신 인사들의 증언과 회고로 박제된 역사를 뛰어넘어야 한다. 광복군 인사의 증언과 회고에는 때로는 과장과 자의적 해석이, 혹은 왜곡이 담겨있기도 하다. 문제는, 절대적으로 사료가 부족했던 시절에 역사적 근거로 삼은 증언과 회고를 부정하거나 재해석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둘째, 광복군이 본질적으로 타국에 주둔하는 군대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전쟁 말기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광복군의 증강을 군사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현실적 측면에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셋째, 한국독립운동, 임시정부의 독립전쟁이라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광복군을 평가해야 한다. 광복군은 스스로 평가하듯 망국의 과정에서 결집된 의병의 역사를 계승하였으며, 독립전쟁의 진전 속에서 만들어진 소산이기 때문이다.
한국광복군 대원의 아침 구보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증강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것은 1940년 9월 17일이지만, 군대 창설 계획은 임시정부 수립 이후 계속되었다. 1919년 11월 5일 「대한민국 임시관제」에서 대본영·참모부·군사참의회·군무부 직제를 명문화한 임시정부는 같은 해 12월 18일 군무부령 제1호로 「대한민국 육군임시관제」를 통해 육군 창설을 구체화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1만 3천에서 3만여 명 수준의 군단을 편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이 규모로 병력을 편성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에, 임시정부는 만주의 독립군 부대들을 통합 지휘하여 독립전쟁을 시작하려 했다. 군무부를 만주로 이전하려는 시도, 서로군정서·북로군정서를 임시정부로 편입하려는 노력은 임시정부가 추구한 독립전쟁의 일환이었다.
1920년대 들어 임시정부 내부에 위기가 이어지고 만주 지역의 정세가 독립군에게 불리해지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전쟁에는 난항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932년 임시정부가 상하이(上海)를 떠나 피난을 거듭하던 때, 중국의 협조로 한인 군사 간부를 양성하는 역설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렇게 중국 군관학교에서 만주 독립군 출신 교관이 키워낸 청년 군인들은 광복군의 근간이 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7월 15일,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통해 유동렬, 지청천, 김학규 등으로 구성된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위원회는 ‘최후의 목적 완수를 위한 일대 혈전을 치를 군사 준비를 서두르기 위해’ 조직되었으며, ‘독립전쟁 계획안을 연구·작성하고, 군사 간부 인재를 양성’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1938년에는 1개 연대의 부대 편성과 200명의 초급 장교 양성을 목표로 하는 계획안을 수립하였고, 1939년에는 군사 특파단을 조직하여 중국 동북 및 화북 지역에서 군사 요원을 징모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구상과 군사위원회의 계획은 진전되었지만, 임시정부의 이동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하다가 충칭에 자리 잡으면서 현실화되었다.
1940년 8월 4일 임시정부는 지청천을 총사령으로 하여 30여 명의 정예 요원으로 구성된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고, 9월 17일 가릉빈관(嘉陵濱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韓國光復軍總司令部成立典禮)를 거행하였다. 태극기와 중국의 청천백일기가 함께 게양된 식장에는 중국 측 군사령관과 당 간부 등 외빈 30여 명과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인사 등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총사령부 창설 후에도 군사 활동에는 상당한 제약이 따랐다. 중국 국민당 측이 광복군을 중국 군사위원회의 관할 아래 통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국 광복군은 중국 측의 지휘를 명문화한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을 통해 자주적 지휘권을 박탈당하였으나, 3년여의 교섭 끝에 1944년 11월 ‘9개준승’의 취소를 끌어냈다.
이를 전후로 임시정부는 광복군 총사령부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먼저, 1944년 10월 3일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광복군 직원이 정부의 직책을 겸임하지 못하게 한 기존의 결의를 취소했고, 10월 23일에는 ‘광복군 직제개정안(光復軍職制改定案)’을 통과시켰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잠행조직조례’를 개정하여 총사령부에 참모처·부관처·정훈처·경리처와 군법실, 의무실 설치를 규정했고, 총사령부는 광복군을 통솔 지휘하는 기구이되 ‘대한민국 임시정부 통수부’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나아가 임시정부는 광복군에 대한 중국 정부의 원조 방안에 대해 구체적으로 협의하여 ‘원조한국광복군판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광복군에 파견된 중국 장교들은 부관·경리 분야에 극소수만 남고 모두 철수하였고, 총사령부 참모장 이하 전원이 한국인 장령으로 보직하였다. 특히, 사령부의 핵심인 참모처 및 정훈처는 처장 이하 전원을 한국인으로 구성하였고, 부관처 및 경리처는 대부분을 한국인으로 교체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인사 중 상당수가 총사령부로 이동하거나 겸직하게 되었다. 충칭의 경위대에 근무하던 청년들은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렇듯 창설 직후 중국의 제약을 받던 광복군은 전쟁 막바지에 접어들수록 자주권을 획득하며 군사력을 체계적으로 증강해갔다. 1943년 영국군 및 인면전구공작대가 함께 수행한 대일전, 1945년 미국 전략첩보국OSS과 함께 추진한 국내진공작전 등은 광복군의 군사적 위상 강화와 병력 증강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임시정부가 돌아본 광복군의 전사(前史)
1943년 광복군은 『한국광복군소사(韓國光復軍小史)』를 통해 무장 항일운동을 광복군의 전사로 정리하였다. 그들은 “1907년 한국 국방군 해산일은 한국광복군 창설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략) 한국광복군은 지금으로부터 36년 전부터 존재하였습니다. 우리는 동방의 약소민족 중 가장 처음으로 아시아의 평화를 쟁취하기 위해 한국광복군이라는 유력한 항일 군대를 가졌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는 광복군의 뿌리가 국권 침탈에 따라 일어선 항일 의병에서부터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편으로 광복군은 국내외 동포와 세계에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한국이 독립과 자유를 누려야만 중국·소련·일본이 다툼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서로 다투지 않아야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이 가능합니다. 아시아가 평화로워야 세계의 분쟁이 합리적으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 세계의 평화를 추구한다면 먼저 한국을 구해주십시오. 먼저 한국광복군을 지원해 주십시오.” 그들이 최종 목표로 추구한 세계 평화는 한국의 독립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결국, 광복군은 한국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군대이자 평화를 쟁취하기 위한 군대였다. 광복군의 역사를 복원하고 현대적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2020년 대한민국은 한국광복군 창설 80주년, 독립전쟁 선포 100주년을 맞이했다. 우리의 손으로 독립을 되찾기 위해 임시정부는 외국 땅에서도 광복군의 자주권을 얻기 위해 협상하였고, 국제무대에서 독립의 당위성과 의지를 피력하였다. 오늘의 우리는 동북아 갈등과 분단의 현실 속에서 진정한 ‘독립’ 정신을 되새기고, 또 향해가야 할 것이다. 쑨원(孫文)이 강조하고 백범 김구가 즐겨 쓰던 ‘알기는 어렵지만 행하기는 쉽다(知難行易)’는 글귀를 떠올려본다.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호소한 ‘김구 서명문 태극기’>
백범 김구 주석이 미우스 오그 신부에게 광복군에 대한 우리 동포들의 지원을 당부한 묵서를 써서 건넨 태극기.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정력(精力), 인력(人力), 물력(物力)을 광복군에게 바쳐서 강노말세(强弩末勢)인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조국의 독립을 완성하자.”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