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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 새 책
역사화해의 길을 찾아 『역사화해의 이정표 I』
  • 이병택, 재단 국제관계와 역사대화연구소 연구위원

Find the way to historical reconciliation Find the way to historical reconciliation 『A Milestone in Historical Reconciliation I』


역사적 정황과 기획 의도


재단은 수립 이후 역사화해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고 확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2008년에는 가해와 피해의 구분을 넘어: 독일·폴란드 역사화해의 길을 출간하였고, 2013년에는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동북아의 역사화해와 번영: 카이로 선언 이후 70을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하는 등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을 지속해 왔다.


재단이 출간한 새 책 역사화해의 이정표 I은 재단의 앞선 노력을 계승하는 것이면서도, 2018년부터 진행해 온 역사화해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수립하려는 기획 연구의 결과물이다. ‘역사화해의 이정표라는 제목은 화해와 공존을 위한 현재까지의 노력을 검토하고, 앞으로 나아갈 이정표를 수립해보려는 시도임을 표현한 것이다.


지구촌화의 심화와 민주주의의 확산은 국내뿐 아니라 국제적 수준에서도 역사화해의 필요성을 제고한다. 지구촌화의 심화는 국가가 범한 비행이나 범죄에 대한 법적·도덕적·정치적 기준을 높이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확산은 권력에 의해 자행된 불의와 은폐되고 억압된 과거를 시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자유가 확대됨으로써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 화해적 공존의 조건이 더 높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세계의 자유화 물결을 배경으로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 간의 역사화해 문제가 위치해 있다. 동북아의 역사화해 문제는 비단 현재 진행형인 과거사 문제뿐 아니라, 각 나라의 집단적 서사와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각 나라의 정치적 생활에 대한 서로 다른 정당화와 비전의 설정은 과거사에 대한 해석과 서술에 금기와 제약을 부과함으로써, 과거사에 대한 냉철한 성찰과 그에 바탕한 화해의 시도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연구의 방향성과 주요 분석 대상


재단의 연구뿐 아니라 그 밖의 연구도 근대 제국주의 시대에 일어난 피해에서 기인한 국가 사이의 갈등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한·, ·일 역사 갈등의 저변에는 피해자의 경험이나 사실 외의 다른 요소들이 작용한다. 일반적으로 역사화해 문제는 갈등 해소 사례로 간주되는데, 이 해소의 논리를 발견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게임이론(전략이론) 등으로 이어졌다. 이 이론들은 갈등 해소의 전략을 거래나 교섭의 시각에서 분석한다. 그러나 한··일 사이의 역사화해 전략에는 성공적거래나 교섭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차원들이 존재한다. 민족적 자긍심의 충돌, 이웃 나라에 대해 가지는 자연스러운 질투, 피해에 대한 기억 등 처리하기 힘든 문제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동북아는 서구로부터 근대화 충격을 받으며 근대화 과정을 겪은 까닭에 한중일 3국이 그것을 이해하고 풀어내는 과정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각기 다른 근대화의 경험과 더불어, 과거로부터 내려온 유산이 엉키면서 서로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본성, 역사와 문명, 그리고 국제 질서


위와 같은 점을 고려하여 연구 참여자들은 네 가지 차원을 분석의 수준으로 삼았다. 먼저 인간 본성의 차원이다. 인간의 본성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복수의 정념, 집단 간 겨룸 의식,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being in the surrounding world)와 거리 두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 주목했다. 무엇보다 복수의 문제는 가장 까다로운 인간의 본성이고, 복수를 넘어선 화해적 공존은 근대에 와서나 가능했던 정치적 구상이다.


두 번째는 역사적 차원이다. 과거의 갈등과 싸움에 대한 기억, 집단 정체성을 위한 선민의식, 과거의 현존 양상(modes of presence of the past) 등이 역사적 차원의 주요 요소이다. 특히, 정치 공동체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인 회원 자격(membership)의 문제는 역사 해석을 둘러싼 갈등의 저변에 도사리고 있다.


그다음은 문명적 차원이다. 문명은 그 자체로 세계의 위계와 차별의 구도를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명 간의 소통 문제를 일으킨다. 문명의 충돌을 예언한 헌팅턴(Samuel Huntington)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지만, 각 문명을 떠받치는 기초 관념들의 소통에 큰 장애가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역사 갈등과 관련하여 근대성의 문제에는 서구비서구를 비대칭적 위계로 구분하는 차별이 내재한다. 근대성의 도입으로 발생한 문명 간의 충돌은 역사 해석의 문제를 제기한다. 덧붙여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은 각기 다른 근대화의 과정을 밟아왔기 때문에 역사 해석의 문제가 대단히 복잡하다. 각기 다른 역사 해석은 과거사로 인한 갈등 해소를 더욱 어렵게 한다.


끝으로 국제 질서의 차원이다. 이 연구는 세계 질서의 두 기둥을 힘(power)과 정당성(legitimacy)으로 구분하는 키신저(Henry Kissinger)의 설명을 받아들인다. 각 문화권에서 통용되는 세계의 올바른 질서 관념에 방점을 둔다면, 국제 질서의 차원은 문명적 차원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될 것이다.

     


화해적 공존은 가능한가


이 책은 총 3부로 나누어진다: 서구의 사례, ·일의 사례, ·중의 사례. 여기에 실린 아홉 편의 연구는 각기 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대체로 위에서 제시한 인간 본성, 역사, 문명, 국제 질서의 네 가지 차원을 염두에 두고 진행되었다. 그리고 서로 다른 글의 대조와 비교를 통해서 복수, 근대성, 그리고 역사 서사의 문제의식을 드러내고자 했다. 정치 공동체는 역사 갈등을 안고 있고 불완전하지만 해결 모델을 창안해 왔다. 국가 간의 화해적 공존 문제는 국내의 화해 문제보다 간단할 수 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화해의 내용이 더 세밀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정치 공동체가 정체성과 자긍심을 지키면서 다른 정치 공동체와의 화해 문제에 접근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성(理性)의 문제에 앞서 끈질긴 정념(情念)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서구의 사례와 한국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과의 사례는 모두 공동생활의 보편적 문제를 드러낸다. 다른 한편으로 서구와 동북아의 비교는 복수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의 차이를 드러내기도 한다.


끝으로 기존의 화해 연구는 대체로 가해자의 사과나 피해자의 용서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가해자의 사과는 중요한 요소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결과 가해자가 가해자로 남고, 피해자가 피해자로 남게 된다면 화해적 공존은 싹트기 어려울 것이다.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동등한 대화의 파트너로 상승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이를 정신심리학적 용어로 가로지르기’(transversality)라고 한다. 이번 연구는 화해의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당사자들이 처해 있는 조건,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역사적 사고의 형이상학적 요소라 할 역사적 상상력의 한계를 드러내고자 했다.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통해 선악을 넘어혹은 가해와 피해를 넘어라는 아름다운 표현의 이면에 숨겨진 역사적 상상력의 한계와 정념의 난제를 넌지시 살펴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