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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포커스
한·몽 수교 30주년 한·몽 관계의 어제와 오늘
  • 이평래, 한국외국어대학교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

한·몽 관계의 어제와 오늘


1990326일 한국과 몽골이 공식적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니 올해는 양국이 외교 관계를 맺은 지 정확히 30년이 되는 해다. 지난 30년 동안 한몽 관계는 말 그대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통적 국제 협력 분야는 물론이고, 국방과 종교에 이르기까지 전면적 교류로 확대되었다. 3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두 나라의 교류가 전 분야로 확장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수교 직후부터 우리 정부는 북방 외교의 확대와 북한 문제를 염두에 두고 대몽골 외교를 중시했고, 경제인들은 광산 자원을 비롯한 원자재 확보와 북방 진출의 전진 기지로서 몽골에 주목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한국인과 몽골인이 뿌리가 같다는 확인되지 않은 동류의식 때문이다.


수교 직후부터 공적 분야나 사적 분야를 막론하고 양국 간 교류가 급속히 발전한 이유도 상당 부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우리 정부의 거의 모든 기관은 몽골과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한국 정부의 대외 원조와 국제협력사업에서도 몽골이 빠진 경우는 거의 없다. 양국 학자 간 학술 교류 또한 언어, 민속, 고고 역사 분야를 넘어 의료, 공학, 농축산 등 전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300여만 명의 적은 인구와 몽골의 경제 규모 및 한국과의 교역량에 비하면 대단히 이례적 현상인데, 그 이면에는 형제 민족이라는 뿌리 깊은 사고가 자리한다. 수교 초기 중소 상공인들이 대거 몽골로 간 것도, 기독교와 불교 등 종교 관계자들이 몽골로 달려간 것도, 언어학자와 민속학자를 위시한 여러 연구자들이 몽골로 학술 조사를 떠난 것도 크든 작든 동류의식과 관련이 있다.


한국인에 대하여 친밀감을 가지고 살갑게 대하기는 몽골인도 마찬가지다. 수교 이후 한몽 관련 일을 담당한 사람들이 남긴 자료를 보면 몽골인들의 환대를 특기한 경우가 많다. 1991년 필자가 처음 몽골에 갔을 때를 회고해 보면 몽골인들이 한국인들을 무척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물론 양국의 교류가 빈번해지고 크고 작은 일이 일어나면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몽골인의 인식도 바뀌고 있지만,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친밀한 정서는 여전하다. 몽골인에게 한국은 이 세상에서 자신들과 생김새가 가장 비슷한 사람들이 사는 가장 가까운 나라이고 경제적으로도 발전된 나라다. 따라서 현재 양국 관계의 실제 상황과 관계없이 보통 몽골인들은 한국이 몽골의 발전에 도움이 되고, 또 그렇게 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전통적 몽골인 거주지인 몽골국(외몽골), 러시아연방의 부랴트공화국과 칼미크공화국, 중국의 네이멍구자치구(내몽골)를 제외하면 몽골인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되었다. 201912월 말 현재 한국에 체류하는 몽골인은 48,185명이다. 절대적 수치는 많지 않지만 20204월 말 현재 몽골국 총인구가 3,322,478명이기 때문에 인구의 1.5% 정도가 한국에 사는 셈이니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특히, 전통적 몽골인 거주지 외에 몽골인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사실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특이한 사항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800여 년 전 시작된 한몽 교류의 출발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침략으로 시작된 한·몽의 첫 만남


한몽의 첫 공식적인 만남은 121812월 몽골군이 고려 땅을 밟으면서 시작되었다. 그때 두만강 유역에는 여진의 장수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세운 동진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몽골군은 요동경략遼東經略의 일환으로 이들을 복속시키고 고려 땅으로 진입했다. 명분은 1216년 몽골군에 쫓겨 고려에 들어와 한반도 중북부 일대를 유린하고, 평양 부근의 강동성에 웅거하던 거란족을 소탕한다는 것이었다. 몽골군의 진입에 당황한 고려 조정은 몽골의 제의를 수용하고 12191월 공동으로 강동성의 거란족을 궤멸시켰다. 이때 고려와 몽골은 형제의 맹약을 맺음과 함께 고려는 매년 몽골에 공납을 바친다는 약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 맹약 후 몽골의 무리한 공납 요구는 고려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 과정에서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압록강 너머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하여 양국의 불안한 관계는 파탄 나고, 그로부터 6년 후인 1231년 몽골군의 전면적인 침공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고려 정부가 사실상 몽골에 항복한 1259년까지 몽골의 침략은 여섯 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그 후 고려는 14세기 중반 공민왕이 반원정책反元政策을 추진할 때까지 약 1세기 동안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수십 년에 걸친 몽골군의 침략과 1세기에 걸친 몽골의 지배는 고려 역사에 깊은 먹구름을 드리웠다. 물론 몽골의 고려 지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 그들은 이 시기를 고구려 이후 대외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로 보고, 고려가 세계 제국인 몽골에 편입됨으로써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고려 왕후가 된 몽골 공주와, 원 황제의 비빈이나 귀족의 부인이 된 고려 여인을 예로 들어 양국의 특수 관계를 부각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 여부는 향후 연구에 의하여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국토가 수십 년 동안 몽골군에 의하여 유린된 것만으로도 양국의 만남을 정상적이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한·몽 관계의 어제와 오늘



원 지배기 이후 한·몽 관계


널리 알려진 것처럼 1368년 몽골제국의 종가인 원나라가 멸망한 후 1948년 몽골과 북한의 국교 수립, 그리고 1990년 한국과 몽골이 외교 관계를 맺을 때까지 두 지역의 공식 관계는 단절되었다. 물론 조선 정부와 일부 관리들이 몽골에 관심을 두고 있었음이 자료상으로 확인되지만 구체적인 교류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또한 몽골어가 우리말에 차용되고, 의식주에서 이른바 몽고풍이 생겨나고, 몽골어가 조선 시대 사역원의 학습 과목의 하나로 채택되는 등 몽골의 지배가 남긴 정치 및 사회문화적 영향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 밖에도 조선 시대 한몽 간에는 크고 작은 인적 또는 물적 교류도 있었음이 자료상으로 확인된다.


그 후 기록상 두 나라 국민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20세기 초기다. 그 흔적은 몽골 중앙공문서보관소와 외교부 공문서보관소에 남아 있다. 이들 공문서보관소에는 1920~30년대 몽골 땅에서 살았던 한인들의 생활에 관한 생생한 기록이 있다. 1920년대는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하던 시기다. 그 시절 많은 한인들이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인의 이주는 19세기 중반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노령 연해주와 만주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나타난 것도 이 시기다. 한인의 이주는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후 급격히 늘어났다. 당시 한반도를 빠져나간 사람은 크게 세 부류다. 이전 시기처럼 생계를 위해 나간 사람, 독립운동을 위해 고향을 떠난 사람, 징병이나 징용 등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이다. 당시 한반도 인구의 약 1/4에 해당하는 500만 명 정도가 국외로 나갔다고 하니 나라의 형편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할만하다.


     

일제강점기 한인의 몽골 이주


한인의 해외 이주는 만주와 상하이, 연해주, 일본 등 한반도 인접 지역이나 미주 지역에 집중되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일제강점기 국외 이주라 하면 주로 이 지역들로 이해한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한인의 이주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민의 물결은 멀리 시베리아를 넘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그리고 몽골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적지 않은 한인들이 몽골로 이주했다는 것은 결코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광복회 회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강훈도 1910년대에 몽골을 다녀온 사람이다. 당시 몽골의 후레(현재의 울란바토르) 지역에서는 한인 애국지사 이태준이 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강훈은 그곳에서 몇 달간 기식한 적이 있는데 그때 독립운동가 40~50명이 매일 숙식을 함께했다고 술회하였다. 그 무렵 후레에 있었던 사람으로는 김규식을 빼놓을 수 없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김규식은 1910년대 전반 몽골에 독립군 군관학교를 설립하려 했다. 이태준이 몽골에 가게 된 것도 김규식 때문이었다. 1921년 몽골혁명 이후에는 주로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의 한몽 연대가 논의되고 여운형과 계봉우 등 독립지사들이 몽골에 체류하고 기록을 남겼다.


독립운동가뿐 아니다.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몽골에 간 사람도 많았다. 그중에는 광산을 운영하거나 몽골 정부에 취직하여 안정된 생활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공장, 광산 노동자, 양치기 등 막노동을 하며 살아갔다. 이들은 주로 러시아 각지를 떠돌다가 살길을 찾아 몽골로 흘러 들어간 사람들이다. 몽골 공문서보관소에는 1920~1930년대 몽골에 체류했거나 영구 이주를 청원한 한인들의 청원서가 남아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일제의 만몽滿蒙 이주 정책에 따라 만주로 이주한 한인들이 여러 이유로 내몽골 동부 지역으로 이주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주나 몽골인과의 접촉은 사적인 것이고 공식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몽골과 북한의 교류


그 후 1948년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부터 한반도 소재 국가와 몽골의 관계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몽골과 북한은 19481015일 공식 외교 관계를 수립했는데, 원나라 멸망(1368)을 기준으로 한다면 거의 600년 만에 한반도 소재 국가와 몽골 사이에 공식 관계가 수립된 것이다.


사회주의 시절 몽골은 북한의 가까운 우방이었다. 한국전쟁 기간은 물론이고, 전후의 복구 과정에서도 몽골은 총력을 기울여 북한을 지원했다. 양국의 우호 관계에 걸맞게 김일성은 두 차례(1956, 1988)나 몽골을 방문했다. 1956년 방문은 6·25 및 전후 복구 과정에서 몽골의 물자 지원에 감사를 표하기 위한 방문이었고, 후자는 88서울올림픽을 염두에 둔 정치적 성격의 방문이었다. 사회주의 시절 몽골인민혁명당 서기장의 북한 방문이 이루어지고, 우리가 아는 북한 고위층 거의 모두가 몽골을 방문했다. 지금도 몽골 정부 관리와 학자들은 대체로 북한에 대하여 우호적이다. 이는 사회주의 시기부터 이어져 온 우호 관계에도 그 원인이 있지만, 한민족에 대한 몽골인들의 특별한 감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몽골은 현재 어려움에 처해 있는 북한에 대해서도 무척 신경을 쓰는 한반도 정책을 펴고 있다. 비록 자국의 외교적 역량을 확대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기는 해도, 몽골은 남북동시수교국으로서 북한 문제 해결에 참여하기를 원한다. 또한 북핵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도 평화적 해결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한몽경제협력사업에도 북한의 참여를 바라는 입장이다. 몽골 정부와 국책 연구소의 학자들은 가능하면 북한을 국제 사회에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북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특히 몽골 정부의 한반도 정책에서 주목되는 것은 동북아 국가(····) 모두와 우호 관계를 맺고 있는 유일한 나라가 자국이라는 점을 들어, 한때 우리 정부가 추진했던 동북아 공동체의 허브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한·몽 관계의 어제와 오늘



미래 30년의 한·몽 관계


이런 점에서 우리 정부는 문화 분야와 우호 친선, 그리고 일부 경제 방면에 치우친 한몽 교류 및 협력의 방식을 개선하여 정치·외교 분야에서의 협력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 몽골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북한 문제와 동북아 공동체 설립에 관한 몽골 정부의 입장은 좀 더 진지하게 검토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 다만 이 부분은 현재의 경색된 남북 관계가 완화되고, 북핵 위기 국면이 어느 정도 풀린 시점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정리하자면 지난 30년 동안 진행된 한몽 교류와 협력을 평가해 보면 너무 급했다고 할 만큼 외형적인 발전이 있었다. 필자가 처음 몽골에 갔던 1991년 수십 명에 불과했던 한국 거주 몽골인 수는 그사이에 48,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한국에는 한국 거주 몽골인 자녀를 위한 초··고 과정의 재한몽골학교도 있다. 몽골 교육부가 인가한 정식학교다. 아마도 이런 형태의 몽골 학교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재한몽골학교가 설립된 데는 자녀 교육이라는 현실적인 이유 외에도 양 국민의 상대방에 대한 우호적 감정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합리성 여부를 떠나 서로가 서로에게 친밀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그 어떤 나라도 갖지 못한 양국의 큰 자산이다. 이러한 자산을 토대로 하여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협력을 확대해 나가면 지난 30년보다 훨씬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