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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읽는 발해사
발해사는 동아시아에서 어떤 의미일까
  • 임상선 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7세기말~10세기초 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어 200년간 존속했던 고대국가 발해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발해와 관련된 1차 사료와 새로 발견된 자료를 중심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 보자. 해석의 다양성, 사료의 중요성과 함께 발해사의 감춰진 이야기들을 들춰보는 재미를 선사할 것이다.


발해 멸망 후 발해사는 오랫동안 역사 속에 묻혀있었다.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은 발해의 역사를 편찬하지 않았고, 망국민 발해인은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발해가 있던 곳이 동북아시아 민족의 뿌리였기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기억으로 전해지며 이어졌다. 오늘날 발해사 해석은 넓게는 나라마다 다르다. 발해사를 어떻게 연구해야 할까.



발해사에 주목한 사람들의 주장

     

부여씨가 망하고 고씨가 망함에 이르러, 김씨(金氏)가 그 남쪽을 소유하고, 대씨(大氏)가 그 북쪽을 소유하고 발해(渤海)라 하였다. 이를 남북국이라 하고, 마땅히 남북국사(南北國史)’가 있어야 하는데, 고려(高麗)가 이를 편찬하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하면 바로 고구려 사람이요, 그들이 차지했던 땅은 누구의 땅인가 하면 곧 고구려 땅이었다. 그 땅을 동북으로 개척하여 크게 하였을 뿐이다. 김씨가 망하고 대씨도 망함에 이르러, 왕씨(王氏)가 통합하여 이것을 소유하고 고려라 했다. 그 남쪽은 김씨의 땅을 소유한 것이 완전하나, 그 북쪽은 대씨의 땅을 소유하였으나 불완전하였다. 혹은 여진(女眞)에게 들어가고, 혹은 거란(契丹)에게도 들어갔다. 유득공, 발해고(渤海考)1784

     

동북 지방의 원시 부족 가운데 조선반도로 이주했던 부여족은 모두 당나라에게 멸망했다. 예컨대 고구려와 백제가 그랬다. 그 밖의 숙신(肅愼)과 동호(東胡) 두 부족은 계속해서 옛 땅에 살면서, 서로 동서로 대치하는 형세를 이뤘다. 처음에는 숙신족의 속말말갈(粟末靺鞨)이 당대(唐代)에 일어났고, 뒤를 이어 동호족의 거란이 오대와 북송 시대에 일어났다. 다시 그 뒤를 이어 숙신족의 여진이 송대에 일어났으며 또다시 그 뒤를 이어 동호족의 몽고가 송대 말기에 일어나 송과 금을 멸망시키니 이것이 바로 발해, (,)(), () 네 나라다.

金毓黻,東北通史, 1941 ; 동북아역사재단 역, 김육불의 동북통사, 2007


지도 

발해와 현재의 동아시아



토문 북쪽과 압록 서쪽을 잃었다고 한 유득공


발해인이 정리한 역사책이 없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도 발해 역사를 정리하지 않았다. 발해 멸망 이후, 가장 열정적으로 발해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는 18세기 조선시대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이었다. 그는 최초의 발해 전문 역사서인 발해고(渤海考)1784년에 발간했다. 유득공은 역사를 국가 성쇠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고려가 부진한 이유 또한 남북국 중 발해의 역사를 편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유득공의 주장은 오늘날 남북한 학계의 발해사에 대한 중요한 학적 논리이다. 유득공이 고구려의 옛 땅인 토문(土門)북쪽과 압록강 서쪽을 차지해야 한다는 걸 강조한 것이 중국 측에는 매우 거슬리는 지적이다. 그래서 중국 학계가 가장 많이 비판하는 발해사 연구자이다.

     


민족과 계승 의식에 따라 해석한다면


한국은 발해를 고구려의 옛 땅에 그 주민이 세웠고, 멸망 이후 그 주민이 고려로 넘어와 발해에 대한 계승 인식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민족과 계승 의식이 바탕이 된 것이다. 우리 학계가 이해하는 발해인은 혈연, 문화, 언어, 공동생활,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으로 고구려인과 말갈족이다. 특히 말갈족은 고구려와 인접했고, 일부는 고구려 주민이기도 했다. 발해 건국에 참여한 말갈족은 바로 그 고구려 주민이었다. 발해 시기에는 고구려인, 말갈족의 차이가 없어졌고 멸망 이후에는 발해인만이 있을 뿐이었다. 한국 측의 민족 개념에 따르면 발해 주민 중 오늘날 중화민족과 연결되는 집단은 없고, 일부 극소수의 한족(漢族)이 있을 뿐이다.

     


속말말갈이 세운 당나라의 속번(屬藩)이라고 한 김육불


중국의 유득공 같은 이가 김육불(金毓黻, 1887-1962)이다. 북경대 졸업 후 동북대 교수를 역임한 그는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부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만주 지역이 예로부터 중국의 일부였음을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编)1934, 동북통사(東北通史)등을 통해 주장했다. 원시 부족에는 부여족, 숙신족, 동호족이 있는데 이중 조선반도로 이주한 부여족(고구려, 백제)은 당에게 멸망했다. 숙신족은 발해와 금나라를 세웠고, 동호족은 요와 원을 세웠다. 김육불은 발해를 속말말갈이 세운 당나라의 속번이라 규정했다. 오늘날 중국 학계의 발해사 인식은 전적으로 김육불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국민과 영토에 따라 해석한다면


중국은 국민(중화민족)과 영토를 기준으로 역사 귀속을 설명한다. 중국의 영역이란 중국 역사에서 최대 판도였던 청나라의 영역이고, 이곳에 존재한 다수의 국민이 중화민족이다. 이 영역 안에 발해가 있었으니 이는 중국사이고 그곳의 주민도 중화민족이었다는 논리다. 중국의 논리에 따라 한국사를 설정한다면 한국 역사에서 최대의 판도는 신라와 발해가 있던 남북국시대이니, 이 공간이 한국 역사의 영역이다. 이곳에 존재한 과거의 모든 민족이 우리민족이고, 국가와 정권은 한국사에 포함된다. 우리민족은 예···숙신계(숙신, 읍루, 물길, 말갈, 여진, 만주족)라는 주체민족과 일부 동호계(흉노, 오환, 선비, 거란, 몽골) 그리고 매우 소수의 한족·일본인 등의 연합과 융합으로 형성, 발전해 왔다. 한국 역사에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 그리고 요, , 후금이 역대 왕조가 된다.

     


발해사 해석은 공통의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야


역사 연구와 토론은 합리적 기준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발해사는 그렇지 않다. 한국과 중국의 발해사 해석은 그 기준이 다르다. 한국 측의 민족과 계승 논리에 따르면 중국 측은 한족을 중심으로 발해사를 설명해야 하는데 이 경우 발해사가 중국사일 가능성은 낮다. 중국 측의 국민(중화민족)과 영토 범위에 따르면 한국사의 범위와 포함 민족은 현재보다 대폭 확대된다. 결과적으로 중국사의 범위는 축소되고 양국 역사 범위와 대상이 상당 부분 중첩된다. 따라서 공통의 합리적인 기준을 찾아 발해사 연구를 해야한다.

     


발해는 어떤 나라일까


·중의 발해사 다툼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듯하다. 발해사가 중국사인지 한국사인지에 따라 양국의 역사는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각종 사료와 당시 상황을 공정하고 학술적인 기준에 따라 검토하면 발해사는 중국사보다 한국사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중국에 발해 유적과 유물이 많지만 한국의 연구자에게는 유독 공개를 꺼리고, 발해사에 대한 논의도 하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새해에는 발해 연구자들이 발해 땅에서 만나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한다. 발해는 어떤 나라이고, 발해사는 동아시아에서 어떤 의미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