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도시환 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 센터장
정리 윤현주 작가
정진성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사회학과 석사, 시카고대학교에서 사회학과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후 덕성여자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통일원 정책자문위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유엔인권정책센터 소장 및 공동대표, 외교통상부 정책자문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2000년 여성국제법정' 한국위원회 부대표 및 유엔차별철폐위원회 위원으로 재임중이다. 저서로 『경계의 여성들』이 있다.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학교 명예교수
와세다대학교에서 국제교육센터 교수를 역임하고, 와세다대학교 명예교수를 맡고 있다.
본래 전공은 동남아시아 역사이지만 한국과 동남아시아의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알게 된 후 여성인권 운동가로 다양한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2000년 여성국제법정' 일본사무국 대표,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센터 공동대표, 바우넷 재팬(VAWW-NET Japan)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올해는 「일본군 성노예제를 재판하는 여성국제전범법정(이하 ‘2000년 여성국제법정’」)이 개최된 지 20년을 맞는다. 2000년 12월 7~12일까지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2000년 여성국제법정은 한국, 중국, 일본, 필리핀 등 10개국의 공동 기소단이 일본군의 아시아지역 전시 성폭력 문제를 국제사회에 제기한 시민법정이었다. 민간법정이었기에 법적 구속력은 없었지만, 피해 당사자들이 일본군의 잔학상을 직접 증언했고, 히로히토 천황과 일본 정부에 대해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과제로 남아 있다. 지난 10월 22일 재단은 당시 역사적인 법정을 지켰던 두 사람, 나카하라 미치코 와세다대 명예교수와 정진성 서울대 명예교수를 초청하여 법정이 남긴 의미에 대해 들어보았다.
Q
인터뷰에 앞서 먼저 두 분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연구 자체가 쉽지 않은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일본군‘위안부’ 연구에 매진해 오신 두 분의 행보가 역사의 진실과 정의, 인권 문제의 발전에 헌신적인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은 어떤 계기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게 되셨는지요?
A-나카하라 미치코
동남아시아사를 전공한 저는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정말 문외한이었습니다. 저는 한국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 일본군‘위안부’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당시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진실은 저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존재하는 것조차 몰랐기 때문에 충격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일본이 조선과 동남아시아 일대뿐만 아니라 일본의 점령지에 있었던 여성들에게 이렇게까지 잔혹한 짓을 했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죠. 그런데 한국 여성들이 이 문제를 밝히기 위해 나섰고, 그들의 그런 뜻을 후원하는 사람들이 함께 힘을 더하는 것을 보면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A-정진성
‘위안부’ 문제는 윤정옥 선생이라는 개인 연구자의 끊임없는 발굴 노력과 1980년대 발전하기 시작한 한국의 여성 운동이 만나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저는 사회 운동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또한 역사 사회학자이자 여성 사회학자로서 이 문제를 굉장히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990년 11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가 결성되어 윤정옥 선생님이 정대협 대표로 가시면서, 제가 정신대 연구소를 맡게 되었습니다. 정신대 연구소를 맡으며 증언 정리 작업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게 벌써 30년이 되었네요.
Q
일본군‘위안부’에 대한 관심과, 진실을 찾기 위한 많은 분의 노력이 ‘2000년 여성국제법정’을 성립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요?
A-정진성
1998년에 「게이 맥두걸 보고서」가 작성되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을 때 ‘바우넷 재팬(VAWW-NET Japan)’ 쪽에서 민간법정을 제안해 왔습니다. 유엔에서 보고서가 나온다고 해도 일본에 대해 그 어떤 강제조치도 취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 보고자 한 것인데 그게 바로 민간법정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법정을 여는 장소부터도 문제가 됐죠. 한국이 최대 피해국이니까 한국에서 법정을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결국 법정은 도쿄에서 열리게 됐습니다. 미완성의 도쿄법정을 완성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쿄에서 법정을 열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기 때문이죠. 이뿐 아니라 일본 천황을 기소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 언어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와 고민을 하나씩 해결해 가며 ‘2000년 여성국제법정’을 열었습니다.
Q
‘2000년 여성국제법정’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주역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들이 아사히 신문의 마쯔이 야요리 기자, 한국 정대협을 대표하는 윤정옥 교수가 아닐까 싶습니다. 혹시 이분들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A-나카하라 미치코
윤정옥 선생과 마쯔이 야요리 기자는 ‘2000년 여성국제법정’을 만들 당시 각각 한국과 일본의 대표자였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두 분은 결단이 굉장히 빠르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약 12년 전에 윤정옥 선생님께 미야코섬 ‘위안부’ 추모비 건립을 상의하러 갔던 적이 있었는데 상의할 틈도 없이 추모비를 세우자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건립됐나요?”라고 묻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저는 “아직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마쯔이 기자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낸 분입니다. ‘위안부’ 문제가 일어났을 당시 1990년 6월에 일본정부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위안부’들은 업자가 데리고 다닌 것이다. 정부나 국가와는 상관이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마쯔이 기자는 그때부터 시종일관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고, 진실규명에 앞장섰습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재판하자는 것도 마쯔이 기자의 주장이었고요. 당시 일본 페미니스트들은 “사람이 사람을 심판할 수 있을까?”라는 몹시 철학적인 말을 하며 도망치듯 달아났지만 마쯔이 기자는 “이 문제는 아시아 여성들에게 일본이 저지른 범죄이기 때문에 재판하자”라고 주장했죠. 그 한 마디가 ‘바우넷 재팬’이라는 조직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바우넷 재팬’은 여성들에 대한 전시 폭력반대를 주장하는 여성 운동체이고, 조직이 없으면 재판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만든 단체입니다. 현재도 저는 ‘바우넷 재팬’ 공동대표를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Q
‘2000년 여성국제법정’이 가진 의의 중 하나가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공론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본군‘위안부’ 문제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A-정진성
유엔인권기구에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가지고 간 것이 ‘위안부’ 문제의 국제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대협이 만들어졌지만, 일본정부는 사실 일본군‘위안부’ 자체를 완강히 부인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엔인권기구를 활용해보자는 생각에 1992년 8월 인권소위원회를 찾아갔습니다. 인권소위원회는 민간위원으로 구성이 되어 있었는데요. 당시 저희는 각 위원에게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알리려 노력했고 그 결과 게이 맥두걸 위원이 이 문제를 맡게 되면서 1998년 「게이 맥두걸 보고서」가 나오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인권소위원회에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전시 하 여성 폭력 문제로 개념화했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Q
김학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최초 증언 이후 1997년 도쿄에서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국제회의가 열렸습니다. 여기에 초대되었던 호주 국제법 학자 우스티나 돌고폴 교수가 문제를 제기합니다. 바로 도쿄 재판에서 논의됐어야 할 ‘위안부’ 문제가 전혀 논의되지 못 했다는 것이었죠. 이것이 ‘2000년 여성국제법정’이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견해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A-나카하라 미치코
한국 여성들이 유엔에서 열심히 활동하며 대활약을 펼친 덕분에 1996년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1998년 「맥두걸 보고서」가 나옵니다. 이 두 가지 보고서는 굉장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우리는 두 가지 보고서를 모두 사용해서 일본 여성을 계몽하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1997년 일본에서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국제회의를 열게 되는데요. 이를 통해 전쟁시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이 얼마나 세계적인 규모로 일어났는지를 확실히 알리게 됩니다. 회의 전까지 우리는 ‘위안부’ 문제를 일본과 한국의 문제로 규정지었습니다. 그런데 구 유고슬라비아, 르완다, 동티모르, 버마, 아프가니스탄, 필리핀 등 전 세계에서 온 여성들의 증언은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이 전 세계 여성들의 문제라는 인식을 깊이 새겨주는 계기가 됐죠. 당시 호주 국제법학자인 우스티나 돌고폴 교수가 감명깊은 강연을 했는데요. 그 강연에서 제가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패전 후 일본의 재판 이야기였습니다. 이른바 도쿄재판이라는 극동군사재판이었는데 일본은 그 재판에서 전쟁범죄에 대한 심판을 받지만, 그 판결에는 정말 중요한 것이 두 가지가 결락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는 유일한 통치자였던 일본 천황에 대한 책임을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여성들에 대한 폭력 문제였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자료도 있고, 증거도 있고, 증인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밝히기 위한 철저한 준비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이 문제에 대해 그 어떤 심판도 받지 않았다는 것이죠.
Q
‘2000년 여성국제법정’을 회고하다 보면 많은 생각들이 들 것 같습니다. 혹여 아쉬움이 드는 부분도 있으신지요?
A-나카하라 미치코
‘2000년 여성국제법정’은 중요한 일이 달성된 법정이지만 그 법정에서 저희가 재판하지 못했던 것도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식민지 지배에요. 아쉽게도 일본 사회는 식민지 지배가 일본 근대사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잘 모르거든요. 그런데 그보다 중요한 건 전후 일본 교육은 일본이 식민지 지배를 했다는 것조차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식민지라는 단어조차도 모르는 대학생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우리 역사연구자들의 엄청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대학교를 퇴직했지만, 앞으로도 다양한 운동을 통해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계속 말을 할 생각입니다.
Q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사회의 각성을 요구하겠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지금 그런 작업들을 하고 계신가요? 아니면 계획 중인 일이 있으신지요?
A-나카하라 미치코
‘2000년 여성국제법정’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부분은 재판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식민지 지배가 있었고 이 식민지배 하에서 ‘위안부’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재판을 진행했으면서, 식민지 지배 자체에 대해서는 그 죄를 심판하지 못했던 겁니다. 저는 이것이 ‘2000년 여성국제법정’에서 가장 큰 결점이라 생각하고 이에 대해서 큰 아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그 아쉬움을 채워 나가고 있어요. 몇 년 전부터 저는 ‘희망의 씨’라는 운동 설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젊은 일본 학생들과 한국 학생들을 만나게 하는 프로젝트인데 지난해 와세다대 학생들을 한국에 보냈습니다. 젊은 사람은 젊은 사람을 만나 그 사람한테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가장 좋다는 생각에서죠. 나이 든 사람한테 “너 이랬었다고!”하는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마음에 와닿지 않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희망의 씨’ 프로젝트는 상당히 좋은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을 만날 수 있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식민지 지배와 역사에 대해 배우고 느끼는 것, 개인적 바람으로 이런 프로젝트가 앞으로도 잘 이어져 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