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항구도시 목포 앞바다에 웅장하고 붉은 목조 선박 한 척이 떠 있다.
선수에는 '조선통신사선'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이는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15년부터 2018년까지 3년 반에 걸쳐
100~150년 된 금강송으로 건조한 배로, 200여 년 전 부산과 일본을 뱃길로 왕래한
조선통신사 재현선이다.
‘믿음(信)으로 통(通)하는 사신’이라는 뜻의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는 일본 에도 막부의 요청에 따라 약 200년 간 12차례에 걸쳐 일본에 파견된 사절단으로, 조선과 일본을 왕래하며 양국의 국교 회복과 문화 교류에 힘쓰며 상호 이해의 폭을 넓혔다. 조선통신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는 육로로, 그리고 부산-대마도-오사카까지는 해로로, 오사카에서 에도까지는 다시 육로를 이용하였는데 파견 때마다 약 400~500명에 이르는 대인원이 조선과 일본을 오갔다. 배는 총 6척으로 정사·부사·종사관 등 통신사 일행이 탄 기선(騎船) 3척과, 식량 등의 화물을 실은 복선(卜船) 3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중 정사를 태운 기선은 조선의 위용을 뽐내기 위해 당시 최고의 조선 기술을 활용하여 조선 최대 규모의 대형 전함(대맹선) 급으로 제작하였고, 난간과 기둥 등에는 조각을 하여 채색하는 등 화려한 모습의 단청으로 의장했다고 한다.
우리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홍순재 학예연구사의 안내를 받으며 배 위에 올랐다. 조선통신사선은
다양한 문헌 연구와 고증을 거쳐 원형에 가깝게 재현됐다고 한다. 통신사선의 건조와 운항 실태가 기록된
「계미수사록(癸未隨槎錄)」,
설계도 및 재료 등을 자세히 기록한 「헌성유고(軒聖遺稿)」, 일본 등 우리나라 인접국과의 외교 관계를 기술한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등 다양한 고문헌은 물론 배의 형태 및 배치 등을 엿볼 수 있는 국립해양박물관 소장 「근강명소도회 조선빙사(近江名所圖會朝鮮聘使)」, 일본
자하현립근대미술관 소장 「조선통신사선도(朝鮮通信使船圖)」
등 한국과 일본의 그림을 참고하는 한편,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용 문양의 뱃머리, 매화·소나무·모란 등이
그려진 화려한 궁궐 단청을 발견하여 실물과 유사하게 복원하고자 했다. 또한 선박의 저판, 선수, 선미, 격벽, 갑판, 판옥, 돛대, 멍에 등 무엇을 제작하느냐에 따라 목재의 두께, 형태, 나뭇결의 방향, 연결 및 보강 방식을 달리했다. 재현된 선박은 통신사의 총 책임자인 정사가 탄 ‘정사 기선’으로 길이 34m, 너비 9.3m,
돛대 높이가 22m에 달한다. 이는 학술 및
고선박 연구를 통해 배의 구조와 형태를 찾고, 조선공학적 분석 방법으로 배의 원형을 밝혀낸 것으로, 이제까지 우리나라 전통배인 한선(韓船) 제작에 있어서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부분을 상당 부분 보완한 결과물이다.
우리는 홍 학예연구사의 설명에 따라 목선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변변한 장비도 도구도 없이 이 웅장한 배를 만들었을 200년 전 사람들을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자르고 나르고 다듬었을까, 이 배의 갑판과 돛대와 판옥과 계단과 누각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톱질과
대패질이 필요했을까. 왜구의 나라로 향하는 통신사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게다가 200년 전 바다는 지금과는 달리 더욱 험한 곳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영조 때 조엄(趙曮,1719~1777)은
조선통신사 정사로서 일본에 다녀오며 쓴 「해사일기(海槎日記)」에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나라는 땅덩이가 좁아 나라 안이 멀어야 수천 리이고, 중국 사행도 4천 리를 넘지 않는다. 그런데 일본 사행은 왕복 1만1천300리에 그것도 5분의 3이
뱃길이다. 통신사의 노정이 이러하니 운수와 명의 소관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조선이 일본과 ‘통신’을 시작한 이유는 전쟁으로 훼손된 상호 신뢰 회복이었다. 조선은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과 같이 대의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결국 조선과 일본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었고, 전후 처리와 신뢰 회복을 위한 양국의 노력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조선통신사는 양국의 긴급한 외교 문제 해결, 국교 재개, 새로운 통교 관계 확립 등 많은 성과를 남겼다. 약탈과 무력 침공이라는 반복되는 갈등 상황을 뛰어넘어 정치·외교적 측면에서는 평화와 공존의 관계를 추구하고, 학술·문화·예술 교류도 활발히 이어갔다.
이제 막 재항해를 시작한 조선통신사선처럼 ‘서로 속이거나 다투지 않고 진심으로 대한’ 한일 양국의 성신교린(誠信交隣) 정신도 함께 재현되기를 바란다.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더 나은 현재를 만들고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것이다. 200년 전 조선통신사가 전한 역사적 메시지가 오늘날 더 큰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한일 양국, 더 나아가 동북아 각국이 ‘갈등을 넘어 화해로’ 순항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