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의 발발과 전개
1919년을 전후한 시기는 세계사적 전환기였다. 1914년 유럽에서 발발하여 5년간이나 계속되었던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에 종결되었다. 이에 따라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에서는 전후 처리와 평화 체제 수립을 위해 1919년 파리강화회의를 개최하였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평화 체제 수립을 위한 원칙으로 민족자결주의를 제시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 중인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 제정이 무너지고 공산주의 소련이 등장하였다. 공산주의 국가 소련은 약소 민족과 피압박 민족의 해방운동에 대한 지원과 연대를 표방하였다. 이 과정에서 패전국의 식민지가 독립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를 한국 독립의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 국내외 각지에서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그중에서 1918년 11월 상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의 활동은 새로운 차원의 독립운동 전개에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신한청년당은 한국의 독립을 요청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전 민족의 일치된 독립의 의사와 능력이 있음을 과시하는 대대적인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국내외 각지에 대표들을 파견하여 통일적인 독립운동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에 따라 2월 8일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해외의 청년들이 독립을 선언했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에서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지도자들이 연합하여 조선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국의 길림 지역에서는 해외 독립운동 지도자 39인의 명의로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후 서간도, 북간도, 연해주, 미주 등지에서도 독립 선언이 발표되고 독립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렇듯 한국의 독립 선언은 국내외 각지의 한국인들이 일치단결하여 이루어졌다.
3월 1일 국내에서 발표된 독립 선언서는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한다. 독립을 국제사회나 일본에 청원하거나 건의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독립된 주권 국가임을 선언하였다. 이는 독립 선언 이후 한국인의 독립을 위한 모든 행위가 한민족의 정당한 주권 행사임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다.
조선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
선언이 발표된 것은, 한국의 주권이 한국인 전체에게 있다는 것, 즉
국민주권주의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민족 대표의 독립 선언 이후 한국인들 개개인이 자유롭게 한민족의
정당한 주권을 행사하는 독립운동의 실천 활동이 뒤따르게 되었다. 3·1운동에는 종교, 이념, 계급, 신분, 남녀, 빈부, 노소의
구별 없이 한민족 전체가 참여하였다. 이로써 한국인 개개인들이 국민 주권의 주체임을 행동을 통해 직접
확인하였다. 3·1운동은 주동 인물이 독립 선언서와 격문을 배포하면서 대중의 참여를 독려하고, 대중은 독립 만세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밤에는
마을 주변의 산에 올라 횃불을 밝히며 독립 만세를 외치는 봉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3·1운동 과정에서는
평화적 시위 운동뿐만 아니라 식민지 지배 기구를 파괴하고 헌병 경찰에 대한 무장 공격이 전개되기도 하였다. 또한
소작료 인하, 민족 차별 철폐, 민족 교육 등 생존권 관련
요구도 함께 제기됐다. 해외에서는 독립 선언과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한 후 국제사회에 독립을 요구하는
활동을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3·1운동을 통해 국내외의 한국인들은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이라는 통일적 목표를
지향하는 단일한 민족 공동체로 결집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국내에서의 독립만세 시위운동과 일제의 침략 기관을 접수하여 주권을 행사하려는 집단행동은 일본의 무단적 폭력 앞에 저지당하였다.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군의 무차별 사격으로 살상을 당하였다. 경기도 화성의 제암리 주민들은 일제에 의해 집단으로 학살을 당하였다. 지도자들은 물론 시위참여자들조차도 체포 구금되어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일제의 무단적 폭압으로 2개월 이상 지속된 3·1운동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웠다. 국내에서의 한민족의 정당한 주권 행사는 일제의 군사적 폭압 통치로 지속적으로 실천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국내에서의 주권 행사가 일제의 군사적 폭력으로 제한을 받고 있으므로 국내 동포를
대신하여 주권을 행사할 통일적인 지도 기관, 즉 임시정부를 해외에 설치해야 한다는 요구는 1910년 이후부터 꾸준하게 제기되었다. 그런데 국민주권주의에 의거한
새로운 민주주의국가 건설을 지향하는 임시정부 수립 시도는 1917년
7월 「대동단결의 선언」으로 본격화하였다. 해외 지역 독립운동 지도자 14인 명의로 상해에서 발표된 「대동단결의 선언」은 각지의 해외 독립운동 지도자들에게 통일적 독립운동의 지도
기관 수립을 위한 독립운동자 대회 개최를 요청하였다. 이 선언에서는
‘이민족에게 주권을 양여한 적이 없다’는 민족사의 불문율에 의거하여 대한제국 황제의 일본에
대한 주권 양도 조약을 무효라고 하였다. 오히려 ‘한일합방조약’을 대한제국 황제가 주권을 포기하고 한민족 전체에게 주권을 양도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국내 동포들의 주권 행사가 불가능한 현실이었기에,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동포의 위임을 받아 주권을 대신 행사하기 위해 통일적 지도 기관, 즉 임시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당시 이러한 제안은 현실화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으로 국내외 동포들의 독립에 대한 통일적 의사와 역량을 확인하자, 임시정부
수립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외교 활동에 유리한 상해로 모여 독립운동의 통일적
지도 방법에 대해 논의하였다. 처음에는 독립운동정당을 조직하자는 주장과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이
대립하였으나 정부를 수립하는 쪽으로 의견이 수렴되었다. 이에 4월 10일과 11일 이틀간 임시의정원회의를 개최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정하고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제정·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헌장 제1조에서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하여 군주주권주의를 부정하고 국민주권주의를 천명하였다. 이어
국민의 평등과 자유권을 규정하였고,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세계 평화와 인류 문화 발전에 기여할 것임을
명시하였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김규식을 외무총장으로 임명하여 국제사회에서
정부의 대표 자격을 부여하였다. 이후 국내와 연해주에서도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이에 3개의 정부가 통합하는 작업이 추진되어 1919년 9월 통합된 임시정부가 출범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내외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다양한 독립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역사적 의미
3·1운동은 근대 이후 한국인이 추진했던 다양한 민족운동이 발전적으로 통합되어 나타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19세기 이후 중국 중심의 세계에 있었던 한국은 유럽 중심의 근대적 국제 질서에 강제적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한국은 종래의 전통적 봉건사회를 근대 시민사회로 개혁하고, 제국주의의 침략을 물리치고 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과제를 떠맡게 되었다. 이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근대의 민족운동은 크게 위로부터의 개혁 운동과 아래로부터의 개혁 운동 두 갈래로 나타났다. 즉, 개화 지식인과 관료 등 지배 엘리트를 중심으로 개화운동, 독립협회운동, 광무개혁운동, 구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고, 농촌의 지식인과 농민들을 중심으로 동학농민항쟁과 의병항쟁이 전개되었다. 이 두 갈래의 운동은 서로 대립하여 제국주의 침략에 통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민족운동 역량의 분열은 한국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3·1운동은 이렇게 분열되었던 두 민족운동의 흐름을 하나로 통일하였다. 3·1운동을 통해 한국인들은 민족의 통일적 역량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함으로써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또한, 한국인들은 하나의 민족과 하나의 국가라는
역사적 운명 공동체로 결집하여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근대적 국민으로 새롭게 탄생하였다. 이로써 한국인들은
전제군주제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이행하는 세계사의 발전 과정과 궤를 함께하게 되었다.
3·1운동이 기존 민족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통일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신세대 청년 학생층과 민중의 광범위한 참여로 가능한 것이었다. 이들의 3·1운동 참여는 신분, 빈부, 지식, 성별, 세대의 차별 없이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자유로운 권리를 향유한다는 사실을 직접적 행동으로 확인하였다.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은 엘리트 중심에서 민중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청년 학생층이 독립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독립운동 세력들은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을 조직화하고 지지 세력으로 이끌어 내기 위한 이론 개발과 투쟁 방법을 마련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3·1운동은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를 추구하는 군국주의를 비판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면서 정의와 인도에 기초를 둔 세계 평화를 지향하였다. 따라서 각종 독립 선언서와 대한민국임시헌장에서는 한국인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자유, 평등, 정의, 인도, 평화를 추구함을 밝히면서 세계 평화와 인류 문화의 발전을 위해 국제연맹에 가입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또한 국제사회에 보내는 독립 요구서에서는 유구한 자주 독립의 역사와 국민적 역량을 가진 한민족이 세계 평화를 건설할 의지와 능력이 있음을 밝혔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 외교는 파리강화회의에서 ‘즉시 독립’이라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중국, 소련, 사회주의인터내셔날 등의 지지를 이끌어내었다. 또한 국제사회의 여론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렸으며, 일제의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식민 지배의 야만성과 잔혹성을 폭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920년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자 대독,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연합국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독립 외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은 종전 후 일정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독립시킬 것을 약속하였다. 이 약속에 따라 1948년 국제연합의 감시 아래 민주적인 선거가 시행되어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이때 제정된 제헌 헌법에서는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사실을 명기하였다. 이 점에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은 대한민국 건국의 출발점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