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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이야기
일본 쇼군과 다이묘를 매료시킨 조선의 ‘마상재馬上才’
  • 윤유숙 (재단 한국고중세사연구소 연구위원)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최고 통치자에게 파견된 공식적인 외교 사절로 알려진 ‘조선통신사’. 통신사는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고, 양국 관계의 변화 속에서 통신사가 수행한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1429년 첫 번째 통신사로부터 590주년이 되는 2019년을 앞두고, <조선 통신사 이야기> 코너를 통해 조선왕조 대일 외교의 역사이자 문화 사절이었던 조선통신사를 들여다 본다.


일본 쇼군과 다이묘를 매료시킨 조선의 ‘마상재馬上才’


마상재란 조선시대 무예 24가지 기술 중의 하나로, 사람이 달리는 말의 등에 서거나 눕는 등 갖가지 아크로바틱한 자세를 취해 보이는 기예이다. 마상 재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도 보이며,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도 행해졌는데, 유교사회였던 조선왕조는 마상재를 무예보다는 놀이로 인식하여 격구(擊毬), 기사(騎射), 기창(騎槍) 등 실전용 기마 무예를 강조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중 마상재가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마상재는 종래 유희를 겸한 군사 훈련의 수단에서 독자적인 무예로 발돋움했다.


이제는 몇 장의 그림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의 마상재를 에도시대 일본의 쇼군과 다이묘들은 수차례 관람했고 또 애호했다. 그들은 어떻게 조선의 마상재를 일본에서 관람할 수 있었던 걸까. 처음으로 조선의 마상재가 일본을 방문하게 된 계기는 1634년, ‘쇼군 이에미쓰가 조선의 기마가 천하제일이라고 들었으나 아직 본 적이 없어 초청하기를 원하신다’는 쓰시마의 요청을 조선 정부가 수락하면서이다.


헌데 쓰시마가 이런 요청을 한 시기는 쓰시마나 양국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진행 중이던 때였다. 1634년 당시, 일본에서는 쓰시마번주 소 요시나리(宗義成)와 그의 가신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 간의 갈등, 대립이 본격화되어 막부가 심리에 돌입한 상황이었다. 상대에 대한 비방을 거듭하던 두 사람은 1631년 서로를 막부에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막부가 양자를 심의하는 과정에서 그간 쓰시마가 조선과 일본의 국서를 개작한 사실이 폭로되어, 그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다이묘 가문에서 후계자 상속 문제, 번정(藩政)의 운영 등을 둘러싸고 파벌 다툼이 발생하여 번주와 가신이 격하게 대립하는 일이 발생할 경우, 에도 시대 초기에는 막부가 사건에 개입하여 다이묘에게 영지의 몰수·삭감·이전 등의 처벌 조치를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가신단 내부에서 일어난 정쟁을 해결하지 못한 것은 결국 다이묘 본인의 통치 능력 결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풍조가 이렇다 보니 쓰시마번주 소 요시나리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경우 영지를 몰수당해 쓰시마에 대한 지배권을 박탈당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처럼 번의 운명이 결정될 중대한 시기에 쓰시마는 돌연 조선의 마술(馬術)기예인을 초빙한 것이다. 실제로 막부의 지시가 있기는 했지만 아마도 쓰시마가 먼저 막부에 조선의 마상재에 관해 알리고 초대를 제의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번주 소 요시나리의 입장에서 이 사행은 쇼군 이에미쓰에게 ‘조선의 곡마술’을 선보임으로써, 자신의 대조선 교섭능력이 야나가와씨보다 우월함을 막부에 각인시키려 했을 것이다. 막부는 막부대로 야나가와씨가 배제된 상태에서 소씨의 대조선 외교 능력을 시험해보려 했을 것이다.


또한 소씨와 야나가와씨의 불화가 막부 내에서 공식화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조선은 마상재를 파견하여 이 사건의 결말을 현지 일본에서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막부의 판결에 따라서는 향후 조선이 상대해야 할 일차적인 통교 대상이 종래의 소씨에서 다른 누구인가로 교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역관 홍희남과 최의길은 마상재인(馬上才人) 2명, 말 2필, 쓰시마의 사신과 함께 1635년 정월에 조선을 출발, 에도로 향했다. 수행원까지 합해서 총 21명으로 구성된 사행단은 3월 말, 에도에 도착했는데, 사행단이 에도에 도착했을 때 소씨와 야나가와씨의 분쟁은 쇼군 이에미쓰에 의해 번주 소씨의 승리로 이미 결론이 난 상태였다. 3월 12일, 13일에 막부는 야나가와씨를 비롯 한 관련자 개개인에 관한 구체적인 처벌을 언도했기 때문이다. 물론 마상재 일행이 조선으로 귀국한 후, 역관 홍희남은 막부의 결정 사항을 조정에 보고했다.


에도 안에는 마장이 여러 군데 설치되어 있어 무사들의 승마 연습이나 경마에 사용되고 있었다. 마상재가 공식적으로 공연한 장소는 야요스노가시(八代洲河岸)’에 위치한 마장으로 현재의 야에스가시(八重洲河岸)이다. 4월, 역관과 마상재인들은 소씨와 함께 쇼군이 거주하는 에도성에도 등성하여 쇼군 이에미쓰와 막부의 고관들을 알현했다. 마장에서 공연이 펼쳐진 후 막부는 마상재 일 행에게 은(銀) 1,000매(枚), 쌀, 옷 등을 지급했다.


당시 일본인들에게 마상재는 매우 흥미로운 곡예였던 것 같다. 쇼군에게 마상재를 선보인 이후에도 막부의 요인과 다이묘들로부터 조선인의 곡마술을 구경하고 싶다는 요청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해서 재인 두 사람은 다이묘의 저택을 수차례 개별 방문하여 기예를 선보였을 정도였다.


그 후로 통신사는 방일할 때마다 마상재를 대동하여 1764년 사행까지 에도에서 마상재 공연이 여섯 번 개최되었다. 1711년 막부는 쇼군이 관람하기 쉽도록 아예 에도성 다야스몬(田安門) 안에 새로운 마장을 두었고, 이 후 여기에서 마상재를 공연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곳은 ‘조센바조(朝鮮馬場)’라 불리었다. 마상재는 쇼군· 막부의 고위 관료·일부 다이묘만이 관람할 수 있어, 일반 무사나 에도 시민들이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 마상재는 한시(漢詩)와 회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