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신
화가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한 뒤 1993년부터 1997년 까지 5년 동안 나눔의 집에 거주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대상으로 미술 수업을 진행하였고, 인하대 미술교육대학원에서 정신 질환자의 미술 치료 가능성에 대해 수학하였다.
일본군‘위안부’ 등 성노예제 문제를 주제로 한 작가 자신의 그림뿐 아니라 할머니들이 직접 그린 그림으로 국내·외 전시를 개최하여 한일 역 사의 이면에 은폐되어 온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알려왔다. 저서로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했던 미술 수업 이야기를 담은 「못다 핀 꽃」이 있다.
올해는 광복 73주년이자, 일본군‘위안부’였던 김학순 할머니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1991년 8월 14 일에 첫 번째 정부 기념식을 가진 해이다. 김 할머니의 증언에 용기를 얻은 다른 피해자들은 전후 반세기만에 무거운 입을 열어 증언을 이어갔고, 오랫동안 지워진 역사는 새 숨을 얻었다. 그러나 현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27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에 재단은 이러한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일본군‘위 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첫 미술 선생이었던 이경신 화가의 기록화 130여 점을 선보이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그림 이야기> 전시회를 지난 10월 서울 시민청에서 개최했다. 1993년부터 5년간 ‘나눔의 집’에서 피해자 할머니들과 미술 수업을 진행한 이경신 작가를 만나 이번 전시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본다.
Q
전시장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다 보니 할머니들과 작가님의 이야기가 궁금 해집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 미술 수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제가 할머니들을 처음 만난 건 1993년이었습니다. 미대를 졸업하고 학교라는 울타리 밖에서 화가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인생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가를 고민하던 시기였죠. 그런데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일본군‘위 안부’ 피해자들이 모여 사는 나눔의집에서 자원봉사자를 찾는다는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방송을 듣고 자신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는 충격적 인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딱히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역사가 지워주는 무게를 외면할 수 없었다고 할까요? 그렇게 나눔의집 전화번호를 누르면서 할머니들과 첫 만남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매개로 거의 20년 만에 그림과 책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계십니다. 이번 전시는 어떤 배경에서 기획하게 되셨는지요?
A
할머니들은 당신들께서 경험한 치욕스러운 일을, 그리고 그 실체와 의미를 용기 있게 드러내신 분들입니다. 저와 할머니들이 처음 만났을 당시 저에게는 그림이라는 도구가 있었고, 할머니들은 당신들의 경험과 뜻을 전하는 도구로 그림을 사용하셨어요. 어떻게 보면 참 신기한 일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제가 할머니들과의 미술 수업을 5년이나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죠. 오랜 시간 동안 할머니들과 함께 그렸던 그림은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고, 또 개인적 차원의 성취를 넘어서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어요. 더욱이 해외 전시를 통해 할머니들의 그림이 일본 시민사회에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기도 했습니다. 당시 저는 할 머니들의 문제 해결에 작은 도움이 된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어요.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이십 대 시절에 한 일 중 가장 순수한 열정을 쏟았던 일이고, 가장 잘한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들께서 아픔을 드러내고 표현하며 함께 숨 쉬었던 현장에서 저만이 경험한, 저만이 알고 있는 절절한 순간들을 알릴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꺼림칙 한 느낌이 있었어요. 할머니들이 역사의 피해자로서 쏟아놓은 떨림과 상처의 증거들을 정리해야 한다는 마음의 빚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015년 12월 28일 한·일 정부는 「한·일 위안부 합의」를 발표했고, 텔레비전 화면에서 할머니들이 분노하시는 모습을 보며 저 역시 매우 화가 났습니다. 일본 정부는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1991년 당시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어요. 그래서 미술 선생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았고, 할머니들이 어떤 방 식으로 자신들의 상처를 드러내고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나를 곰곰이 떠올려 봤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들이 자신의 상처와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과, 마지막까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것. 그것이 미술 선생으로서 해야 할 마지막 일임을 깨닫게 되었던 거죠.
Q
할머니들과 미술 수업을 하셨을 당시의 사회나 수업 분위기는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A
1990년대 초반은 할머니들이 사진 찍히는 것이나 자신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고 입에 올리는 것조차 어려워하던 때였어요. 특히나 가족이 있는 경우에는 더했죠. 할머니들 개인이 겪으신 정신적 충격이나 오랜 세월 이어져 온 가부장적인 사회 분위기에 할머니들 스스로 위축되어 있었어요.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할머니들은, 당신들을 찾아와 주는 나이 어린 초짜 선생을 밀어내거나 무시하지 않고 ‘선생’으로 깍듯이 대해주셨어요. 그리고 저는 막연하게 나마 ‘할머니들이 당신들 가슴 속 고통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다면 고통에서 벗어나 상처받은 삶을 복구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림은 언어와는 달라서 고통과 상처를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직면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도 해요. 그래서 선뜻 그 시작을 제안할 수가 없었죠. 무언가를 표현하는 행위와 과정이 분명 할머니들을 변화시킬 것이라 고는 생각했지만, 저만의 생각에 기대어 할머니들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춰진 괴로운 과거를 밖으로 표출하라고 강요할 수만은 없었거든요.
Q
그러면 처음부터 미술 치료에 대한 이론이나 기술을 알고 가르치기 시작한 게 아니라, 할머니들과 함께 수업을 진행하면서 그 개념과 필요성을 깨달아가기 시작했다는 말씀이신가요?
A
네, 맞습니다. 할머니들 스스로 상처에 맞서 용기를 내도록 하는 방법을 알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수업 방향에 변화를 주어야 했고요. 그러다 우연히 한 미술 잡지에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미술 치료’에 대해 쓰신 글을 보고 정체감을 돌파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제가 그림을 통해 얻고자하는 궁극적인 목표와, 정신과에서 이루어지는 미술 치료의 개념이 완벽하게 맞 아떨어지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할머니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에 담고, 자신의 변화를 경험하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방법이라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모든 과정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작업은 할머니들의 상처를 그림으로 끌어내는 일이었어요. 현재 느끼는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마음속에 가둬놓았던 분노와 슬픔, 외로움의 감정들을 풀어보기로 했어요. 할머니들은 우울과 절망의 시간들을 그림으로 쏟아내며 스스로 치유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모든 과정들은 인생의 의미와 본질을 찾아 헤매던 풋내기 청춘이었던 제게 충분한 대답과 보상 이상의 그 무언가를 경험하게 했습니다.
Q
당시 작가님께서 할머니들과의 수업에 적용하신 ‘심상 표현’ 방법은 처음부터 효과적이었나요?
A
할머니들께 당신의 상처를 표현해 보라는 말이 처음부터 입 밖으로 쉽게 나왔던 건 아니었어요. 비단 할머니들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굉장히 난해하고 모호한 주문이니까요. 자신을 가장 약하게 하는 장면에 직면했을 때 할머니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예상할 수조차 없으니 겁도 많이 났죠. 당연히 제가 새로운 방식을 이끌어가는 데 미숙한 탓도 있었지만, 자신의 상처에 정면으로 맞서야만 하는 새로운 수업 방식을 원치 않는 분도 계셨어요.
모두 당황하면서 머뭇거리고 있던 그때, 이용수 할머니가 하얀 종이 위에 거침없이 과감하게 선을 긋고 색을 칠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대비해가면서 그림에 대한 설명까지 해주셨죠. 저는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할머니들 모두가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할머니의 용기와 표현방법, 긍정적인 힘이 그 수업을 어렵게 생각하고 주저하던 다른 할머니들께 전해졌어요. 결국 심상표현 수업은 할머니들이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도록 해주었고, 할머니들께 꼭 필요하고 중요한 과정이 되었습니다.
저는 할머니들이 심상 표현의 단계를 넘어 자신의 상처를 용기 있게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를 기다렸고, 자신의 문제에서 한 발 떨어져 객관화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가장 아픈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하셨을 때 ‘할머니들의 첫 번째 미술 선생’으로서, 또 작가로서 큰 고뇌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림의 힘을 깨닫는 과정이었죠.
Q
전시회를 찾은 관객에게 던지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시다면요?
A
할머니들은 역사와 시대의 피해자입니다. 50년 넘게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와 상처를 분출하지 못 했던 분들이에요. 할머니들은 그림을 그리면서 가슴 깊 은 곳에 갇혀있던 분노를 쏟아내고 자신감과 성취감을 얻으며 새 삶을 시작하셨어요. 할머니들이 역사의 피해자로 머무르지 않고, 그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승화시킨 과정으로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할머니들과 함께한 5년이라는 시간은 할머니들이 자신을 드러내며 치유해가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제가 할머 니들을 만나서 미술 치료라는 새로운 분야를 접하고 할머니들과 함께 그림을 즐겼던 저의 성장기이기도 합니다. 할머니들의 그림이 이미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었습니다만,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이 할머니의 삶과 그림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얻기를 바랍니다.
Q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일본 사회의 자발적이고 성찰적인 고백이 있어야만 진정한 의미의 역사 화해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께서는 일본이 일본 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정성 있게 사과하지 않는 모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그동안 할머니들은 공식적인 사과는 물론 피해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에 분노해 왔습 니다. 할머니들이 원했던 것은 돈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는 거였어요. 하지만 일본 정부는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지 않은 채 끊임없이 어정쩡한 상태로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매듭지으려고 했습니다. 오히려 공개적으로 일본군‘위안부’의 강제 연행과 성노예제의 피해자라는 사실을 부정해 왔죠. 선대의 과오를 인정하고 그동안의 잘못된 방식을 각성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일 겁니다. 하지만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인간의 존엄에 관한 문제이기에 불행의 역사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할머니 들의 그림 이야기가 이 문제에 대해 보다 깊이 이해하고 역사적 반성을 행하는 계기가 되고, 또 이런 마음이 일본인 개개인에게 모두 전해져서 일본인 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도구가 되었으 면 합니다. 일본군‘위안부’와 같이 잊혀져가는 역사를 안타까워하는 양심 있는 일본 시민들이 많아진다면 한일양국 역사 문제를 해결하는 밑거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Q
앞으로도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들에게 울림을 주실 기회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과 관련해서 재단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A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현재의 문제입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 해결해야 할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막상 일본군‘위안부’ 제도가 무엇이고, 피해자들이 실제 어떤 일을 당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이 문제의 역사성을 알리고, 더 많은 이들에게 할머니들을 기억하게 해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할머니들이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라는 굴레를 벗어나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는 할머니들의 그림이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밝힐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재단에 바라는 것은, 앞으로 일본군‘위안부’와 같은 비극적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돌아볼 수 있도록 이 문제가 가진 의미를 많은 이들에게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을 진행해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