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 이후 요동
역사적으로 요동 지역은 만주, 북중국, 몽골, 한반도와 연결되는 지리적 허브로 이 지역의 세력 변화는 고려와 조선의 북방 정책에 있어 주요 변수 중 하나였다. 몽골 제국 원과 마찬가지로 한족계 명도 중원을 통합하며 공들인 부분 중 하나가 바로 요동과 그 동쪽 지역에 대한 통제력 확보였다. 특히 요동팔참(遼東八站)[1]으로 구성된 요양-압록강 라인 동쪽에 무순으로부터 압록강 근처까지 새롭게 설치된 다섯 보 ‐ 동주보(東州堡), 마근단보(馬根單堡), 청하보(淸河堡), 감양보(鹻陽堡), 애양보(靉陽堡)는 이러한 명의 요동 진출을 잘 보여준다.
경계의 시선
1469년 정조사 오백창이 조정에 신설 5보의 존재를 최초로 알린 후 1년 뒤 통사 최유강이 다섯 보의 총 거리, 보 간 거리, 각 보의 주둔 병력 및 최남단 애양보와 압록강 중류의 군사 거점 창성과의 거리 등을 보고했다. 조선으로서는 연산관과 압록강 사이의 중간 지대가 있던 전과 달리 명과 국경을 맞대야 하는 상황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왜냐하면 지역 안보의 중대 사안 중 하나인 유민流民 문제가 더 복잡해질 가능성이 커졌고, 압록강 이북과 요동 지역으로 對여진 군사 작전을 감행할 경우 명이 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자칫 공조라는 명목으로 명의 對여진 정책에 보다 직접적으로 얽히게 되어 결과적으로 조선의 對여진 정책이 상당히 위축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정에서는 명의 요동 방어선 확장이 조선에 유리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경계론이 등장한다. 양성지는 명이 요동 지역에 꾸준히 장장(長墻)을 축조하면서 여진을 방어할 뿐 아니라 조선, 여진 등 인근 지역의 현지 인들을 수용하여 장장 안쪽을 내지화 하는 문제에 주목 했다. 명이 실효 지배를 시도할 때 조·명 간 경계가 맞붙어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경우 對여진 작전 등 국경 안보를 핑계로 압록강 건너 조선땅마저 점거될 수 있음도 경고했다.
유자광도 구역(區域)을 만들고 울타리를 치는 예방 조치 가 없을 경우 조선은 명의 침탈을 면치 못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명의 행보로 보아 향후 양국의 이해관계는 상충할 가능성이 있고 이 상황이 지속될 경우 장기적인 적대 관계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대응
이러한 긴장과 우려 속에서 조선 정부는 자국 안보 우선주의를 원칙으로 명과 밀고 당김 내지는 주고받음의 외교 전략을 모색했다.
궁각弓角 소재인 물소뿔 수입이 그 대표적인 예다. 조선은 이전부터 궁각을 명으로부터 전량 의존해 우수 국산 무기 편전片箭을 생산해 왔다. 그런데 1477년 성종成宗 8년 성절사로 파견된 사행단이 귀환 시 궁각을 명에서 몰래 가져오다 공락역 근처에서 문책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기존 50대의 한도를 초과해 더 많은 양을 확보하고자 밀거래를 진행하다 발각된 것이다. 성화제(成化帝)는 성절사가 이미 길을 떠났음을 이유로 더 문제화하지는 않았으나, 공락역이 현재 천진시 근방으로 북경과 가까운 거리였기에 명 조정이 자국 내 밀수로 꼬투리를 잡았다면 양국 간 큰 외교 사안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흥미롭게도 조선 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궁각 매매 규 제 완화를 요청하는 역공책을 펼쳤는데, 그 명분은 조선과 명이 모두 당면한 북로남왜(北虜南倭)를 대비하기 위한 군수 확보였다. 또한 명이 외국 사신 입국 시 조선에 게만 궁시 등을 착용케 하여 내외 구별을 없게 한 관행과 명태조가 화약, 화포를 보내는 등 조선에 대한 대우가 특별했다는 사실도 부각시킴으로써 건국 초부터 이어진 돈독한 조·명 관계를 강조하여 궁각 수입 확대를 합리화했다. 즉, 궁각 수입의 용처를 ‘야인’ 방어를 위한 것으로 명시하여 명을 배신할 생각이 없음을 공개적으로 알렸는데, 당시 변경 문제는 명의 국방에 중차대한 사안이었고 조선은 이 점을 십분 활용하여 자국의 군비 확충이 명의 안보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게 된 명과의 협력 강화라는 안보 현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對여진 군사 작전을 위한 군수재 확보라는 실리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간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조선 정부는 1477년 궁각 밀매 이전부터 서북면 군사 작전 시 투입할 수 있는 새로운
편전(片箭)에 대해서 15세기 후반까지 논의를 이어갔다. 1483년
병조에서는 군사 훈련 시 편전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을 방도 마련을 조정에 주문했다. 8년 뒤 1491년 올적합 야인의 조산 보 습격 이후 변방 경계 강화를 논하는 자리에서도 편전을 미리 지급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방안이 다시 제기됐다. 편전의 효력은 이즈음 벌어진 창성 전투에 기록돼 있다. 당시 적은 기보(騎步)로 구성된 백여 명 중 절반이 옷깃과 소매를 철로 가리고 얼굴은 눈만 보일 정도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조선군이 일반 화살인 장전을 쏘자 철갑을 입은 적이 화살을 받아쳐내고 심지어 떨어진 화살을 주워서 맞쏘기도 했으나 편전을 사용하자
매우 두려워하며 피했다고 한다. 속도와 침투력에서 편전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1년이 지난 1492년 이극균은 정확도와 관통력이 보다 신장되고 끌과 같은 촉으로 강력해진 새로운 편전을 성종에게 소개하였고
성종은 향후 경외(京外)의 모든 편전을 이극균의 신 모델로 제작할 것을 명했다.
궁각과 편전의 사례는 명의 요동 진출을 목도하며 조선이 펼친 적극적 대응의 일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북로남왜’라는 공동의 주적을 상정하여 군비 확충의 필요성과 조·명 안보 동맹을 강조하는 한편, 편전의 보급과 개발에도 소홀치 않는 등 전력 증강도 추구했다. 자국 안보 수호를 원칙으로 명 주도의 지역 질서를 활용한 일종의 방어적 현실주의 전략이라 생각된다.
통시적 연구의 모색
15세기 중반 이후 명은 요동팔참 동쪽 무순-압록강 라인의 5보를 신설하며 요동을 포함한 만주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조선은 이러한 힘의 불균형에 수동적으로 끌려가지 않았다. 오히려 양국 간 특수한 신뢰 관계와 안보 동맹을 근거로 자국의 군사 활동, 군비 증강을 합리화하는 등 명 주도의 지역 질서 속에 서 선제적인 개입 전략을 가동했다. 이러한 대처는 요 동 지역에서 명의 세력 확장이라는 안보 현실을 받아들이되 자국 안보 우선이라는 기본 원칙을 지켰기에 가능 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명과 건주여진의 대립이 격화되어 양자 택일마저 요구된 17세기 전반의 상황과는 다르지만 이미 150여 년 전인 15세기 후반 조선이 요동과 인근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명에 적극적으로 대처한 사실은 동북아 지역 질서의 거시적 변화를 심찰하는 데 중요하다. 14세기 후반 이래 동북아 대륙에 들어선 한족계, 여진계 통합 왕조의 수도가 모두 북경에 위치하면서 안보 전략의 핵심 중 하나가 요동 지역 안정화였고 그 과정에서 조선의 북방 정책이 어떻게 전개됐는가를 분석하는 작업은 임란과 호란 이전 한·중 관계를 계기적으로 관취할 있는 새로운 창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당시 조명 간 사용된 여덟 역참은 다음과 같다. 진강성(鎭江城), 탕참(湯站), 책문(柵門), 봉황성(鳳凰城), 진동보(鎭東堡), 진이보(鎭夷堡), 연산관(連山關), 첨수참(甛水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