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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동서양의 역사를 관통하는 나폴리의 현인
  • 대담 장석호 (재단 북방사연구소 연구위원)

동서양의 역사를 관통하는 나폴리의 현인

마우리찌오 리오또

Maurizio Riotto

나폴리동양학대학교 아시아학과 교수


시칠리아 팔레르모대에서 서양고고학으로 학·석사 학위를 받은 리오또 교수는 국립로마대에서 동양고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문교부 장학생으로 한국을 찾은 그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 고분 발굴 작업에도 참여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일본군‘위안부’ 및 독도 문제, 문재인 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서술한 ‘한국의 역사(Storia della Corea)’ 증보판을 출간하였고, 주요 저서로는 「The Bronze Age in Korea, Poesia religiosa coreana, I misteri di Silla」 등이 있다. 2011년 한국 정부로부터 한국어 세계화에 기여한 공로로 문화포장(文化褒章)을 받기도 했다.


21세기의 화두처럼 등장한 융복합적 연구, 지식의 통섭에 대해 ‘한 가지 분야만 연구해서는 통섭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미시와 거시의 모든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넓은 시야와 다양한 언어를 바탕으로 국가와 문화를 조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한국을 알리기 위해 아직도 할 일이 많다는 마우리찌오 리오또 교수. 동서양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어 한국학의 지평을 확장해 온 리오또 교수를 만나본다. 이번 인터뷰는 영상으로도 제작되어 재단 유튜브(youtube.com/neahistory) ‘동북아 전문가 대담’ 코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서양의 역사를 관통하는 나폴리의 현인Q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문화의 원형과 교류에 대해 깊이 연구해 오셨는데요. 한국학, 그 중에서도 한국사와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신 동기가 궁금합니다.

 

A

고등학교 때부터 동양과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중국과 일본과 대만 등 동아시아 문화를 연결하는 나라인 한국에 매료돼 유학을 결심했죠. 당시 이탈리아의 동양학계를 떠올려 보면 일본이나 중국에 관한 연구는 많았지만 한국학은 그야말로 불모지였습니다. 저에게 한국학을 가르칠 교수진조차 없던 상황이다 보니 1985년 한국에 왔을 때까지도 저는 ‘예, 아니요’ 단 두 마디 외에는 할 줄 아는 한국말이 없었어요. 하지만 메소포타미아에서 발생한 서구 문명이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전파됐듯이, 한국은 중국과 일본 양국의 문물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동아시아의 사거리’와 같았어요. ‘이런 나라의 문화는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파고들다 한국 알리기를 사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거죠. 그래서 서양고고학으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동양고고학(한국의 청동기 연구)으로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한국 고대사와 고대 미술에 흥미를 가지게 됐습니다.


Q

이탈리아 한국학 연구의 현주소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한국학 연구자의 규모, 한국에 대한 인지도, 학생들의 관심사 등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A

1990년에 대학에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 28년간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제자 2명을 대학교수로 배출했습니다. 제 학창 시절에는 이탈리아 내 한국학 전공자가 2명뿐이었지만 지금은 나폴리동양학대 전공 및 부전공 학생 수만 250여 명에 이릅니다. 특히 요새는 ‘K-POP’이라고 지칭하는 한국의 대중가요에 많은 청년들이 열광합니다. 하지만 저는 학자이다 보니 이 방향으로만 가다가는 한국학이 오래 지속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동시에 가지게 됩니다. 양적 팽창은 어느 지점까지 도달했지만 질적인 성장까지는 담보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거든요. 다만, 모든 현상에는 시작과 끝이 있듯이 K-POP 열풍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한국 문화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의 정체성과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할 만한 요소가 개발되고 공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동서양의 역사를 관통하는 나폴리의 현인Q

선생님의 연구 중에는 한·중 양국 사이에고구려 관련 논란의 원인이나고대 한국과 흉노등 한국 고대사 관련 연구가 많습니다. 흉노는 어떤 민족이고, 한국 고대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요?

 

A

사실 몽골 지역 유목민이나 고대 국가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매우 좁습니다. 실제 ‘흉노’는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유목민이 세운 나라로, 여러 북방 민족을 통합한 거대 연합체입니다. 그런데 많은 한국인들은 ‘흉노’라는 이름만 들어도 거부 반응을 일으킵니다. ‘흉(匈)’은 오랑캐, ‘노(奴)’는 ‘노예’라는 뜻으로 이들 유목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깔보고 멸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중국이 붙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흉(匈)’자는 ‘훈(Hun) 혹은 (Khun)’에서 따온 음사이며,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흉노가 ‘노예 같은 오랑캐’라는 뜻이라면 흉노제국이 이런 이름을 용납했을까요?


흉노는 흑해 북쪽 연안에서 태동해서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중국 북쪽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포함하여 유라시아 지역을 점령한 스키타이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들은 농경, 목축, 수렵, 채집 부족군 등 상당히 다양하고 이질적인 종족들이 뒤섞여 정치·경제적으로 복합적인 구조를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이들은 흉노를 형성한 유목민과 다시 결합했고, 그 뒤를 이은 훈족이 세련된 문화를 창조했고, 칸국의 동아시아인과 섞이면서 한국의 고대사회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만약 이 과정에서 한국인이 섞였다면 한국인은 단일민족이 아니라, 사실상 스키타이와 같은 북방 유목민과 토착민의 혼혈 민족으로 볼 수도 있겠죠.


 

Q

고대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한·중 역사 분쟁의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A

중국이 고조선·고구려·발해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시도하고 있지만 그 근거가 불분명합니다. 그 주장대로라면 모든 동북아시아 사람들은 중국 황제족의 후예가 됩니다. 발해와 고구려사가 언제부터 중국사였습니까? 고구려가 중국의 속국이었습니까, 중국 왕조의 지방 정권이었습니까? 고구려는 서기 1세기부터 이미 중국에 군사적으로 대항할 충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외교 정책 역시 매우 독립적이었고요. 언어와 문화 측면 모두에서 중국과는 별개의 문명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고구려를 포함해서 자국 영토 내에 있는 모든 지역의 과거사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과거사를 모두 다 중국이라는 경계 속에 집어넣고, 중국 문화인 양 포장을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사가 곧 중국사’라는 주장은 유럽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를 주장하려면 논리적 타당성을 제시해야 합니다. 중국인들은 더 이상 중국 대륙을 통일한 한나라 사람도, 당나라 사람도 아닙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더 이상 로마제국 사람들이 아니듯이요. 한나라와 당나라는 이미 끝났고, 로마제국도 끝났고, 타국을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주장하며 권리를 주장하던 시대도 끝났습니다. 앞으로 한국은 중국의 역사 왜곡에 경각심을 잃지 말고 사료를 근거로 중국의 미래 전략에 대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 삼자적 시각에서 객관성을 가진 서구의 한국학자는 물론이고, 북한 학자들과도 공동 연구를 추진해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에서라도 남북이 빨리 통일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Q

신라의 화랑과 서양의특수군’, 최치원과 고대 로마의 시인베르길리우스’, 바리데기와 페르시아의파리자드공주 설화를 대조한 연구 등에서 학자로서 예리한 시선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각기 다른 시대와 지역에서 나타나는 문화의 동질성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먼저 신라의 화랑(花郞)과 고대 그리스 테베의 특수군(Sacred Band of Thebes)은 미소년과 남성 청년의 집단생활이나 단체활동, 미남 수장을 중심으로 전력을 과시한 무장집단이자 정예부대라는 점 등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또 문헌에 따르면 최치원이 한을 품고 자결한 자매의 혼백을 시(詩)로 위로하고 죽은 자와 인연을 맺었다, 주문을 외워 산속의 해충을 없애는 마술을 부렸다는 기이한 내용이 나옵니다.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역시 마술을 부렸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동양을 대표하는 가장 훌륭한 문인 최치원과 로마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탁월한 두 인물이 마술사 설화를 남긴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바리데기 공주가 있다면, 아라비안나이트에는 파리자드 공주가 등장합니다. 두 공주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갖은 고초를 겪다가 초월자의 도움을 받아 죽은 가족을 살린다는 공통된 구조와 전개를 세계문학사 차원에서 비교문화적으로 연구해보고 싶었습니다.


역사나 문화는 인간의 기층문화, 즉 인간 본성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시간적, 공간적, 민족적 교류가 없던 지역들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문화의 동질성, 유사성, 연관성을 어느 일방에서 다른 한 방향으로의 전파나 영향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문화의 발생과 원인을 주(主)와 종(種), 본류(本流)와 아류(亞流)로 접근하는 것이 꼭 능사는 아니니까요.


 

Q

그렇다면 고대 사회에서 시인은 어떤 존재였습니까? 시인 최치원이무당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신 것을 보고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A

고대 사회에서 시인은 자기가 속한 민족의 역사적 기억(Historical Memory)을 서술하는 사람입니다. 세계의 기원, 신들의 싸움, 인간의 전쟁, 여러 민족의 왕조, 왕들과 영웅의 언행을 노래했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다 볼 수 있기에 누구보다 지식이 많았고, 비범했기 때문에 그들을 존경하면서도 무서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고대 로마 최고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세상 모든 것을 알았던 사람이기에 예언자로 불렸고, 신성한 사람으로 인식됐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인 최치원은 높은 지식수준에 도달한 것은 물론이요, 시와 문학에 능했고, 유·불·선을 포함한 모든 종교와 영적 차원을 두루 통달한 신라 말기의 독보적 지성이었습니다. 그를 신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죠.


한국에서는 무당을 경시하는 풍조가 있다지만 이 무당이라는 개념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람, 완전히 다른 차원의 현자(賢者)를 말합니다. 이탈리아어로 역사상 뛰어나고 위대한 시인을 ‘바아테(vate)’라고 해요. 라틴어 ‘바테스(vātes)’는 점쟁이, 예언자, 도사, 신의 영감을 받은 시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단한 문인들은 인간의 차원을 넘어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봤어요. 시인들은 신성함과 초자연력을 지닌 무당이었던 것이지요.


 

Q

얼마 전 재단에서 유럽의 역사교육자협의회 유로클리오를 초청하여 개최한 학술회의에서 선생님의 강연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여러 사례를 들면서 역사교육으로 조성될 수 있는 그릇된 선입견의 위험성과, 양국 관계에 미치는 항구적인 악영향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때 참석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다시 한 번 문제의식을 짚어주시면 어떨까요?

 

A

역사학계에서는 유독 수정주의(Revisionism)에 대한 심한 거부감과 적대감을 보이는 현상이 존재합니다. 원래 수정주의는 전통적 입지에서 벗어나 기존의 자료와 사상을 개량하고 개선한다는 좋은 의미를 가집니다. 어떤 형상, 가설, 재료들이 모여서 새로운 형태로 구성되고 개량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역사에서만큼은 이 말이 굉장히 부정적인 뜻으로 받아들여지곤 합니다.


우리는 종교, 지역, 계급, 인종, 습관에 따라 자타를 구별하고, 다른 나라나 집합적 연대를 평가하는 틀(frame)을 씌웁니다. 그럼 타자(주변국)의 형상은 누가 만드나요? 역사는 다수 혹은 강자의 기록입니다. 그들은 승리를 거듭하며 세계 질서를 만들어갑니다. 과거의 역사와 형상들을 깨뜨릴 수도 있는 거죠. 그 때문에 소수 약자의 역사는 주변 강국에 의해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자에 대한 인식은 강대국의 패권적 지위 변화에 따라 달라집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수정주의적 시각이나, 주변국 모두를 ‘오랑캐’라 일컬었던 중국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강대국은 전략적 이해에 따라 타자를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고, 결국 역사를 독식합니다. 역사 기술의 맹점은 그 승자가 기술한다는 데 있어요. 자신이나 자국에 불리해 보이는 것들은 골라내고 유리한 것은 과도하게 미화하고 과장하면서 타자의 형상을 왜곡합니다.


역사는 시각에 따라, 시대와 사회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서구식 민주주의를 절대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절대악으로서의 독재, 절대선으로서의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민주주의의 한계에 봉착하거나 민주주의가 부패하면 그것을 무너뜨리고 다른 제도를 받아들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맹목적으로 신봉되거나, 탁월한 우수성을 주장할 만한 명제는 아니라는 겁니다.


세계 어느 나라건 각기 다른 역사의식과 독자적인 역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역사는 돌고 도는 것입니다. 만약 수정주의가 없다면 우리는 현재의 교과서를 성서처럼 받아들이고, 비판 없이 무조건 믿고 수용해야 합니다. 그래서 역사에는 숙명적으로 수정주의가 필요합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적 사실을 비판적이고 비평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다면 역사의 객관성과 균형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